블로그에 쓴 글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글이었다. 글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한 여러 말들을 문자로 옮겨놓은 형태에 더 가까웠을지 모르겠다.
서른 후반에야 나는 왜 한 회사를 이렇게나 오래 다니고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 것은 취업 원서를 쓰던 23살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난 23살에도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전공에 맞춰서 갈 수 있는 회사와 사업부에 원서를 넣기만 했나보다. 그렇게 취업을 하고 십수년을 한 회사에 다닌 이후에야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태어나서 처음 mbti 검사를 해보았다. 기질 및 성격검사인 tci 검사도 병행했다. 두 검사의 결과는 내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나의 mbti는 여자 중에서 극히 드물다는 ISTP 였고 ISTP의 선호 지표는 아래와 같다.
검사 결과 해석을 해주었던 심리상담사는 내 결과 중 S와 N이 거의 비슷한 정도에서 아주 약간 S가 우위라서 상황에 따라 N이 앞설 수 있다고 했다. 그 외 다른 I, T, P는 그보다 또렷하게 치우쳐있었다.
ISTP는 만능 재주꾼이라는 별칭이 있는데, 구글링을 해보면 어울리는 직업군으로는 공학, 기술, 프로그래머, 시스템 엔지니어, 연구원 등 정밀하면서 혼자 하는 작업 군에 어울린다고 한다. 그 외에는 카레이서. 조종사. 등이 있었다. mbti 결과 해석을 들으면서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어울리는 직업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tci 기질성격검사 결과 나는 새로운 모험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시험 결과에서는 야망이라고 표현이 되었다) 역시 평균보다 높았고 인내심이 높은 편에 속했다.
검사 결과의 해석을 들으면서 나는 왜 입사하고 내내 한 회사에서 같은 일을 긴 시간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법, 아니 꽤 많이 해소가 되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해서 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원서를 넣기 직전 부모님은 내게 집에서 가까운 학교, 취업이 잘 되는 전공을 권했다. 내가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대학을 가고 학점을 받아서 졸업을 했고 전공에 맞춰서 취업을 했다. sw 개발업무를 십여 년이 넘도록, 임신-출산-육아를 두번 거치면서도 쭉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안에 있었다. 내가 나를 더 일찍 알고 이해했더라면, 나는 힘들면서도 왜 계속 버티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회사에서 보내온 긴 시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찾아갔던 심리상담사도 기질 면에서도, 업무 적성 면에서도 지금의 내가 아주 자연스럽다고 했다. 오히려 무리하게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거나 온전히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며 도전하면 더 힘들고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나서야 나도 공감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를 수치로 확인해보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 자극보다는 안정 추구. (관습적이며 무절제한 성향)
- 위험 회피 성향 높음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큼. 낯선 사람에 대한 수줍음 많음)
- 사회적 민감성 많이 낮음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감수성은 높지만 정서적 수용도가 낮음)
- 인내력 높은 편. (끈기 강하고 야망이 있으며 완벽주의 성향)
나는 ISTP 답게 내향인인데 기질성격검사에서도 사회성이 매우 낮게 나오기도 했다. 사회적응력(사회적민감성)이 이렇게 기질적으로 낮은데 회사를 다니며 친한 동료도 만났고 팀에서도 큰 문제는 없이 지내고 있다는 나의 이야기에 상담사는 의아함을 표했다. 분명 스스로 많이 노력하면서 극복해오신 게 틀림없다고 덧붙였던 것 같다.
조직에서 개발자로 일을 하려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당연히 필요하고 또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으로는 모니터를 앞에 두고 혼자 일을 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팀 내부 회의는 가끔 있지만 공식적인 외부 미팅에 참석하거나 식사를 하고 의견을 나누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나뿐만 아니라 현업 개발자들이 옷 입는 것과 외모 치장에 신경을 덜 쓰는(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브 기능 리더부터는 후배들과 함께 일하고 관리자에게 보고를 자주 해야 하니 커뮤니케이션, 협업, 보고 능력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내 자리에서 코드를 들여다보고 로그파일을 뒤져가며 테스트를 반복하는 일이 좀 더 많았다.
그런 점은 분명 사회성 낮은 나에게 일의 성격상 맞았을 것이다. 모니터만 내내 들여다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씨름하는 시간들도 물론 힘들었지만 사람을 만나 말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비하면야 견딜만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개발직군 조직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기 마련인데 각자의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뒤쳐진다는 불안감만 쏙 빼고 본다면, 내가 일해온 여러 부서, 여러 조직의 업무 환경이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에 종종 있는 아주 나쁜 상사나 괴팍한 동료도 만날 일은많지 않았다.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일 잘하는사람들이 많은 업무 환경이었다.
지쳐서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오던 때, 내 마음의 중심을 가장 잘 잡아준 것은 나를 알기 위한 mbti, tci 기질성격검사 결과였다. 일을 핑계로 대고 이젠 그만 하고 싶다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긴 시간 조직생활을 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나의 시선을 외부에 두는 것이었다. 안 그런 척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흔들렸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퇴사를 하건 안 하건, 회사를 나간 후에도 내 삶은 길게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시간을 나답게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의 평가가 예전만큼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부서를 옮겼다. 공부를 하고 있긴 했으나 어쨌든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모르는 일과 새로운 일 앞에서 나의 나이나 연차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간 해온 경험이 있으니 새로운 툴과 환경설정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기는 했다. 나이가 많은만큼 업무를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도 있었다. 일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이 조금 더 매끄러울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예전만큼 불안하고 쫓기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배우고 공부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일이 잘 맞아서 나보다 더 오래 다니는 것 아냐?
나의 설레임과 즐거움를 전하자 남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고 곧 나간다고 생각하니 즐거움이 올라온 것이지 남아서 버틴다고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가 만들었던 나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과감히 낮추어보기로 했다. 내가 만든 기대치를 만족하지 못한 나의 모습에 가장 실망하고 괴로운 것은 누구도 아닌 나였다. 기대치를 낮추자 자연스레 내가 할 일과 공부하면서 알아가야 할 것들에 더 마음이 쓰였다. 모르는 것을 찾아보고 공부하는 시간이 재밌기도 하다. 내가 편안해진 만큼 예전처럼 아웃풋을 많이 내진 못할지는 모르겠다.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