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작가님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의 마음은 시드머니를 키워나갈 투자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지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블로그를 키울 수 있는 콘텐츠를 찾고 쌓아가야 할지, 온라인에서 수익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지 늘 모호했다. 모호한 상태로는 어느 하나에 제대로 몰입할 수 없었다.
글쓰기를 하라는 대답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알고 버는 것이 먼저인 게 맞다고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기대했던 걸까.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유아전집 방문 영업을 했다. 구두를 신고 샘플 책자와 브로셔를 들고 다녔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첫째를 낳고 유모차를 밀며 마트에 갈 때 내게 말을 거는 유아전집, 학습지 영업사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자꾸만 말을 거는 사람들을 피해 못 들은 척 지나치려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엄마가 한참 영업일로 바쁠 때 그즈음 학교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하시던 일도 생각이 난다.대학 교수님부터 은행원, 학교 선생님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에 발표를 시키다가갑자기 ㅇㅇ의 아버님은 대학교 교수님이라며 치켜세워주던 일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친구가 그때 반장이었던 것 같다. 연구단지가 특색이었던 지방 도시의 특성으로기업이나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중학교 선생님이야.
아빠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야.
우리 아빠 ㅇㅇ은행에 다니잖아.
너네 엄마 아빠는 무슨 일 하셔?
엄마, 아빠도 분명히 성실하게 살아오시며 계속 일을 하셨다. 열몇 살의 나는 명확하게 설명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의 이름을 엄마에게 몇 번 묻고 들었지만 나도 잘 몰랐고, 친구들에게 말한다고 설명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빠는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사무직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신발에 흙이 묻는 기술직이고 현장직이라고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그 즈음 친구들이 한 단어나 두 단어로 부모님의 일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때면 나는 막연하게 선망을 하고 부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엄마아빠 두분이 다 기업의 연구원이었던 친한 친구네 집에 놀러갔을 때 우리 부모님은 맨날 바빠- 그런 말도 들었나보다.
설명이 쉽게 되는 일이나 직장에 비해 물건을 판매하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지금에야 그 당시 주말부부로 지내고 일도 하면서 우리를 챙기고 열심히 살아온 엄마의 모습을 존경하지만 어렸을 땐 그럴듯한 직장이나 직업의 이름이 더 좋아 보였다. 아니 어쩌면 나는 열몇 살이 아닌 마흔 살이 된 바로 얼마 전까지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파는 일은 어른이 된 후에도 나의 무의식 깊은 곳 어딘가에서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어느 소속도 조직도 아닌 채 살고 싶었다.회사라는 조직에 대해 질릴만큼 질린 후에도 판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을 깨지 못한 채로는 회사 밖으로 나가 내 일을 찾는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도 깨달았다.그 두려움을 파헤치다 보니 사춘기에 겪었던 비교의 마음이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내 입으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움츠려 들었던 내 모습이 마음속에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그때 내가 더 당당하게 대답했더라면 충분히 사라졌을 법한 감정이었다.
회사 밖에서 경제 주체로 살아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회사 밖에서 돈을 번다면 투자로 수익을 내고 임대료나 배당수익 같은 현금흐름만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굴릴 수 있는 돈의 단위가 커야 했고 집을 깔고 앉아 있으면 안 되었다. 말로만 외치던 퇴사는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굳이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면 스마트 스토어처럼 물건만 팔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파는 일은 여전히 부끄럽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렸을 적 고객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돌리며 늘 바빴던 엄마의 모습도 떠올랐다.
적당히 내가 즐기는 것들을 SNS에 올리면서 바쁘게, 열심히 사는 지금의 내가 좋았다. 부자는 멀고도 먼 이야기이고 럭셔리와는 거리가 먼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 수준에서 필요한 것은 살 수 있었다. 이대로 만족하고 멈추고 싶은 마음과 현재의 삶을 계속 이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매번 충돌했다. 아니, 지금의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퇴직으로 지금의 수입이 끊기게 될 어느 날 이후의 삶은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회사를 나올 때 중요한 것은 돈(적정 현금흐름)과 소속감(인정 욕구의 충족, 커뮤니티, 유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두 가지를 회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회사를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부족했던 것 같다. 돈을 버는 일에 대한 판단, 다시 말해 사농공상에 대한 유교적 사상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에서는 가치 있는 무엇이든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파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파는 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인정하고 깨는 일이 필요했다.
사농공상 선비ㆍ농부(農夫)ㆍ공장(工匠)ㆍ상인(商人) 등(等) 네 가지 신분(身分)을 아울러 이르는 말. 봉건(封建) 시대(時代)의 계급(階級) 관념(觀念)을 순서(順序)대로 일컫는 말 출처 : 네이버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