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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민 Aug 08. 2020

내 우울은 나를 좀먹는다

 최근에 든 생각이었다.
 우울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 우리는 각자의 우울을 하나씩은 품고 살아간다는 것. 그 우울이 나를 조금씩 좀먹는다는 것.


그렇게 나의, 우리의 우울은 나를, 우리를 좀먹는다.

 내 우울의 시초는 약 10년 전, 부모님의 이별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었으며, 그 몫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그때 빚어진 우울은 나를 조금씩 좀먹으며 몸속에서 기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생하던 우울은 6년 전 외삼촌의 죽음과 함께 더욱 비대해져만 갔다. 그의 죽음을 통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사명死命이 산 사람의 우울로 이양되는 것만 같다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과 희망 따위가 아닌, 온전히 우울의 몫으로 전달된다고.
 남겨진 자들의 슬픔은 그런 것이었다.

 내 우울은 계속해서 나를 좀먹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소모임을 하거나, 진득하게 밤까지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할 때 결국에는 살아가면서 힘든 일들을 토의하는 시간이 되곤 한다. ‘우리 교수님이, 내 성적이, 직장 상사가, 내 취업이.’라는 주어를 시작으로 말을 꺼내며.
 이 친구들의 우울도 나의 우울처럼 자리를 잡고 비대해졌을까? 그들을 좀먹으며 기생하고 있을까? 그래서 이렇게 고달프고 곤궁하게 흘러가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우리는 매번 그렇듯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조언과 도움말을 주며 위로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온 그 말은 각자가 가장 듣고 싶었던, 품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우리는 각자 마음에 우울을 꾸린 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속에서 기생하며 살아있는 생을 좀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를 넘보며 먹어 치우는 것을 뜬눈으로 보기만 하고 놔두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이미 결속되어버린 우울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의 멍에는 나의 몫이다. 온전히 훌훌 털며 내버릴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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