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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ug 28. 2019

차가운 겨울의 모스크바를 떠올리다

<안나>

머리를 말리고 난 뒤 거울 앞의 나를 보았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에 제 생명을 다한 듯 구불구불 부스스하게 풀린 머리. 한 십오 센티 정도는 제 머리가 자라나 꼬불하게 파마된 부분과의 경계가 선명해 보기 싫다. 난 납작한 내 뒤통수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 생머리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고객님 머리는 너무 상해서 뭘 하시면 안 돼요.' 이삼 주 전, 머리를 어떻게든 소생시켜보겠다고 찾아간 미용실의 언니는 파마는 절대 안 되고 그렇다고 단발로 확 자른다면 삼각김밥 머리가 된다면서 딱 이 정도의 애매한 길이로 싹둑 자른 뒤 층을 내주었다. 휴, 그래 이게 최선이야.


겔랑에서 받아온 15ml 짜리의 감사한 양의 에센스를 바르고, 비오템이 준 수분크림 샘플을 하나 새로 뜯어 짜서 바른다. 돈이 떨어진 것에 맞추어 수분크림도, 생리대도 다 떨어졌다. 컨실러로 볼 주위의 붉은 부분만 가린 뒤 립스틱만 쓱쓱 바른다. 두 번 정도 바르면 약간 붉은 기 도는 자두색이고 세 번 이상 바르면 검붉은 자두색이 되는 색인데, 오늘은 밝은 자두색으로 가볍게 바른다. 눈썹은 그리지 않는다. 십 대 때부터 연하다 못해 거의 희미한 눈썹을 강박증적으로 채우고 다녔던 나지만, 요즘엔 흐린 눈썹이 신비로워 보여 눈썹 없는 메이크업을 즐기는 중이다.


지금은 정신이 몽롱하다. 생리 약 1주일 전부터는 푹 자고 난 뒤에도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처럼, 혹은 너무 많이 잔 듯 몽롱-하다. 매달 반복되는 것임에도 왜 이렇게 에너지가 없지, 비타민이 부족한가 하고 비타민C를 꿀꺽 삼키고 냉장고를 열어 홍삼을 한 숟갈 퍼서 먹는다. 그리고 생리가 가까울수록 아랫배가 뭉근해지고 약간 부푸는 것을 느끼면서 아 생리할 때가 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시원한 답을 찾는다. 생리 이틀 째. 몽롱함이 분명 옅어져가고 있기는 하다. 호르몬으로 인한 몽롱함은 기분 좋은 몽롱함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여성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을 하자. 무릎을 약간 넘는, 고무줄로 되어 편하게 퍼지는 흰검 줄무니 치마에 어제 입고 행거에 널브러져 있는 사바이디라고 쓰여있는 검은색 라오스 티셔츠를 대충 주워 입고 방금 예매한 영화 <안나>를 보러 나간다.  


<안나>의 첫 장면은 1985년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붉은색의 국립 역사박물관과 크렘린 외벽을 비춘다. 2019년 겨울, 내가 지나갔던 그곳의 모습과 같아서 신기하다. 물론 영화도 최근의 모습을 담은 것이겠지만 80년대 역시 지금과 다르지 않으리. 이 영화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구 소련과 미국의 냉전시대 KGB와 CIA의 스파이 활동을 배경으로 세련되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시대의 공중전화, 옛날 핸드폰의 아날로그함을 깨끗한 화면에서 보는 것이 이질적이지 않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스크바의 거리, 붉은 광장 주변과 이즈마일로보 시장, 우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내부, 인용된 도스토옙스키와 체홉의 글, 러시아어의 말소리를 들으면 내가 느낀 모스크바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https://youtu.be/1TZKNTRUcY0

1986년 모스크바 길거리

날씨 앱이 -15도를 가리키는 1월의 모스크바 한가운데. 이 정도는 러시아 치고는 추운 것이 아니라는 날씨이지만 남쪽에서 온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바람이 더욱 따가웠다. 그래 러시아에 왔으면 겨울의 맛을 느끼고 가야지. 여름에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걷던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 거리는 정말 앙증맞은 것이었다. 이 거리가 그 유명한 모스크바의 아르바트구나. 활자로만 접하며 꿈꾸고 상상한 모스크바의 아르바트라는 글자 속에서 내가 걷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륙답게 시원시원한 땅덩어리에 러시아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웅장했고 도로는 정말 넓고 길었다.


시내에 도착하자마 추워서 500 루블 주고 새로 산 갈색 장갑을 낀 손으로, 몸을 최대한 여미고 수그리며 약간은 얼어붙은 대륙의 거리를 눈보라를 맞으며 걷는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이 생경해 이리저리 올려다보는 시골 소녀가 된 것 같다. 나무로 된 크고 높고 웅장한 갈색 문을 흐엉차 하고 열고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따뜻한 실내공기에 노곤해지고 볼은 더 불그스름 뜨거워진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로 가득한 서점에도 들어가 보고, 카페에도 잠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 메뉴판에 Эспрессо(에스프레소), Американо(아메리카노)라고 러시아식으로 쓰여있는 글씨를 구경한다. 직원이 다가오면 따뜻한 Какао(카카오)를 한 잔 시켜야지.


카페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구경한다. 여성들의 저마다 다른 모피코트의 색과 길이의 다양성과 그 멋에 놀란다. 부츠도 제각각이다.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손님들은 카페에 들어와 자리를 앉기 전 무거운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건다. 자리에 앉으면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온다. 영화 속에서 안나가 입은 긴 크림색 모피코트와 모자도 예뻤지만, 현실에서 본 젊은 여성, 중년 여성, 노년 여성의 다양한 모피코트가 하나같이 예뻤던 기억이 있다. 한없이 추운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오랜 전통일 것 같다.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카페 직원은 수시로 바닥을 걸레로 닦는다. 손님들이 밖에서 눈과 흙을 묻혀 들어와 바닥이 금방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파리와 모스크바를 넘나들며 생활하는 안나를 보며 더더욱 외국에서 살고 싶어진다. 낡았지만 감성이 있는 각 나라의 아파트,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의 잦은 만남과 교류,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이 좋다. 얼핏 스파이로서의 삶이 위험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파란하늘이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전에는 결코 몰랐다. 길 위로 너무나 예쁘고 우아하게 기운 대나무 숲에서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자유! 그게 바로 그녀의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생각이었고, 비록 미래는 아주 희미했지만 아침 햇살이 드리운 안개 낀 강물처럼 다채롭게 빛났다. 자유! 답답한 속박으로부터 자유일 뿐 아니라 그녀를 짓눌렀던 애증 관계로부터 자유였다.
자유, 용기, 무슨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 씩씩함이 그녀와 함께했다.
-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


이념과 갈등의 대척점에서 일관되게 그저 ‘자유’를 꿈꾸는 안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공감하며. 두 시간 동안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사람의 삶에 흠뻑 빠졌다가 나오는 것은 일상 속에 독특한 감성을 가져다준다. <안나> 역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꿈꾸게 하는 영화였다. 현실은 아직 무더운 기운이 남아 있는 여름이지만 잠깐이나마 지난 모스크바의 짧은 여행은 까만 코트를 입고, 독특한 임무를 띠고 눈을 맞으며 모스크바 대로변을 걷는 모습으로 상상되었다.


https://youtu.be/x-6acwBpGuc

1981년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
모스크바 아르바트
카페에서 코코아 한잔.
길에서 만난 서점
길 걷다 만난 종교 건축물
저녁이 되자 금방 눈쌓인 거리
인디고 색의 낡은 트램
황량함
마지막까지 눈과 함께, 잘있니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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