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자마자 관사로 돌아왔다. 오늘은 집에 가는 날. 배낭에 멸치, 콩, 회사에서 가져온 더치커피, 방향제, 립스틱, USB, 이어폰을 넣었다. 멸치랑 콩은 뭐냐면, 주변에 큰 시장이 있다고 하니 엄마가 경상도에서 사면 멸치가 더 싸고 질이 좋지 않겠냐고 멸치 볶음 할 멸치를 조금 사 오라고 하였고, 콩자반 할 서리태 콩이 있으면 좀 사 오라고 해서 이틀 전에 상남시장을 둘러보다가 산 것이었다. 상남시장에 가보니 통영 멸치 직판장이 있어서 샀는데, 멸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뭔가 딱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여서 만 오천 원어치 샀다.
회사에서 어느 날 어디서 들어왔는지 누가 자리에 하나씩 방향제를 놓았고, 인턴 분들이 더치커피를 하나씩 돌렸는데 나는 커피를 안 마셔서 엄마나 줘야겠다 하고 배낭에 챙겼다. 립스틱은 이사 올 때 몇 개 챙겨 온 것 중 러시안 레드 색인 줄 알고 쌌던 것이 예전에 산 딸기 우유색 립스틱이어서 집에 다시 갖다 놓으려고 챙겼다.
배낭을 꾸리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상의는 오늘 하루 종일 입은 검은색 칠부인데, 아무래도 앞으로 추워질 것 같아 집에 벗어 두고 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갈아입지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 낮에 하루 종일 더워서 외투 없이 칠부만 입기에도 충분했고 지금 시간에도 아직 밖이 더워서 그냥 외투는 입지 않기로 했다. 밤에 도착할 것을 생각 못한 큰 실수였지만. 빨래를 햇빛이 잘 드는 거실에 널어놓고 주말 동안 환기가 잘 되라고 방문을 열어 놓고, 바람이 불어 닫히지 않도록 갑 티슈를 하나 받쳐놓고 배낭을 메고 나왔다.
고속버스 정류장까지는 초행길이라 지도를 캡처해서 두었는데 버스로 20분 자전거로 18분이 나왔다. 버스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동료들 말로는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잘 안 온다 해서 그냥 자전거 타고 가자, 하고 누비자를 하나 골랐다. 배낭을 메고 타야 되나 고민했는데 누비자 앞 바구니에 배낭이 충분히 들어갔다. 누비자를 타고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하굣길인지 교복 입은 학생 무리를 지나쳤다. 생기 넘치는 어린 학생들을 보니 에너지가 느껴졌다. 길이 밀리는 시간이어서 버스보다 누비자가 빠른 느낌이었다. 자전거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감으로는 많이 온 것 같은데 버스 정류장이 나타나지 않자 이 길이 맞나 싶어서 중간에 자전거를 탄 아저씨에게 고속버스 정류장이 어디예요? 물었더니 내가 맞는 길로 잘 가고 있었다. 홈플러스와 아웃렛을 지나 터미널 근처에 도착했고 누비자를 반납했다.
초행길이기도 하고 가서 저녁을 간단하게 먹을 생각으로 한 시간도 더 일찍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행히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잠깐 의자에 앉아 쉬어야겠다 생각하고 둘러보는데 뒷모습이 익숙했다. 이00씨. 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불렀다. 뒤 돌아 나를 쳐다본 얼굴은 아래층에서 일하는 남자 동기였다. 내가 뒤에서 워-하고 놀라게 하는 장난을 쳐도 침착하게 안녕하세요 하는 사람이다. 동기는 반가워하며 한 칸 땡겨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자전거 타고 왔다는 얘기에 목마르겠다며 암바사를 하나 주었다. 아니 괜찮아요. 버스에서 먹으려고 산 거 아니에요? 아 원 플러스 원으로 산 거여서. 여기 드세요. 아 그럼 감사합니다. 암바사를 마시며 어제오늘의 안부를 물었다. 동기는 부산으로 출장을 다녀왔는데 뷔페를 먹었다고 했다. 좋겠다. 동기는 내가 단톡방에 올린 봉사활동 사진을 보더니 오늘 봉사활동은 어땠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지원자들을 받아 단체로 간 지역 환경미화활동이었는데 동네도 둘러보고 바람도 쐬니 좋았다. 거리가 청소가 정말 잘되어 있어서 할 일이 없어서 민망하긴 했지만 날도 따뜻하고 같이 간 과장님이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사주셔서 좋았다.
동기와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있는데 멀리서 옆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가 걷고 있었다. 멀리서 동료를 불러 인사했더니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더니 결국 다가와 인사했다. 우리도 여기서 막 만나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들 집에 올라가시나 봐요 몇 시 차 어디로 가세요? 동료가 물었다. 그 동료는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주저주저하더니 놀러 간다고 말했다. 왜 이리 조심스럽게 말하세요? 아, 누가 들을까 봐요. 터미널 곳곳에 알게 모르게 동료들이 지나다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환근무니 주말에는 집에 가는 사람이 많고 나도 모르게 나를 보거나 대화를 들을 수 있으니 입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서울행 버스에 올라 탄 아래층 동기를 보내고 어슬렁거리다 4시간 동안 버스 타려면 뭐를 먹어야겠다 싶어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여러 메뉴가 있었는데 김밥을 먹기에 아쉬워 우동도 같이 시켰다. 양이 많긴 하겠지만 뭔가 따뜻한 국물은 조금 먹고 싶은데 라면은 별로 안 먹고 싶었다. 여럿이 앉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바로 앞에는 티비가 있었고 연합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와 정말 오랜만에 보는 티비다. 정말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다(방에 와이파이가 안되고 데이터는 다 쓴 상황이다 다음 달에는 요금제를 반드시 바꿔야지).
버스는 조금 일찍 예매해서 2번 자리를 얻었다. 기사 아저씨 바로 뒷자리인데 다리 뻗기에 엄청 넉넉한 자리여서 앞으로 여기 아니면 3번 자리를 예매해야지, 하고 결심했다. KTX를 타고 가면 좀 더 빠르고 편리하지만 서울역에 도착하면 또 집까지 오는 시간이 걸리고 KTX 자리도 항상 거의 없어서 버스를 타고 왔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것 같다. 금요일 저녁이라 밀릴 줄 알았는데 오는 길에 차가 거의 없었고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번 쉬니 올만 했다. 게다가 앞에 TV를 틀어주는데 보면서 오니 지루하지가 않았다. SBS가 틀어져 있었는데 이 날 궁금한 이야기Y에서는 친할머니가 자기가 키우는 18세인 소녀에게 15세부터 성매매로 돈을 벌어오라고 한 내용이 나왔다.
배가본드라는 드라마 2부가 시작될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봐서 낯선 풍경의 동네가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정말 오랜만이다. 카드 지갑을 찍는데 '카드를 한 장만 대주세요'라고 울렸다. 뭐지. 아이 누비자. 뭐야 누비자 타려고 산 교통카드다. 교통카드를 가방에 빼서 넣고 지하철로 들어왔다. 와. 사람이 너무 많다. 아으 그리고 너무 춥다. 거울에 비친 나는 혼자 칠부를 입고 있다. 가방이 이미 무거워 외투를 넣기 귀찮았는데 실수였다. 너무 춥다. 으스스 떨며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아직 내 칫솔이 꽂혀 있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간단히 샤워를 한 뒤 나와서 엄마 로션을 발랐다. 집에 오니 순간 2주 간의 창원 생활이 꿈만 같았다. 여기가 우리 집인데. 나는 여행을 갔다 온 것인가? 몽롱했다. 오랜만에 엄마를 봤다. 엄마는 맨날 내가 같이 있어서 챙겨주다가 혼자서 챙겨 먹자니 밥을 잘 못 챙겨 먹어 어지럽다고 했다. 2주 동안 엄마가 좀 늙어진 것 같기도 하다. 엄마에게 2주 간 창원 생활, 새로운 직장과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카톡으로 자주 주고받긴 했지만 활자와 대면은 생생함이 다르다.
다음 날 아침. 엄마가 그저께 담갔다는 겉절이와 내가 사 온 콩으로 만든 콩자반에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드디어 집밥이다. 콩이 좋은 콩이라고 했다. 저녁은 고등어 사다 고등어 조림 해먹자. 콩 파는 할머니에게 국산 서리태 맞냐고 세 번이나 확인했는데 할머니가 의심하는 것 같이 느꼈는지 좋은 거 맞다고 진짜 좋은 콩이니까 먹어보면 알 거라고 했는데 맛이 있었다. 아점을 먹고 엄마와 목욕탕에 갔다. 평소 가는 목욕탕 때밀이 아줌마에게 시원하게 때를 밀었다. 처음에 밀 때 아파요. 했는데 괜찮다고 곧 아가씨 때가 여기 묻으면 덜 아파질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때 밀 때마다 아줌마가 만세를 해라 옆으로 누워라 뒤로 누워라 일어나 앉아라 하는 사인은 아무래도 적응이 안된다. 아줌마는 나를 밀면서 옆 때밀이 아줌마에게 자기 딸에게 맨날 돈 달라고 전화하는 어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엄마는 엄마 맞대? 아니 딸이 아파트도 사주고 매달 100만 원씩 꼬박꼬박 보내는데도 중간중간 계속 전화해서 돈 달라고 난리야. 딸 하나 있는 거 외지 가서 살면 안 됐지도 않나. 70세에 100만 원이면 연금하고 같이 타서 쓰기 충분하지 뭐 그래 계속 돈 보내라고 난리래. 어휴 그 딸 스트레스받겠어 엄마한테 전화 걸면 항상 돈 달라고 돈돈돈돈. 70이면 어디 가서 일해도 되지 요즘엔 칠십이 칠십이래? 우리 매점 언니도 칠십인데 저렇게 일하는 것 봐 얼마나 좋아. 아휴 나는 내가 일해서 돈 벌어서 쓰는 게 편하지 나이 들어 자식들 등골 빼고 싶지 않아.
사우나를 갔다가 쇼핑을 했다. 베이지색 블라우스도 사고 탠디에서 대대적으로 세일을 하길래 다홍색의 약간의 굽이 있는 구두도 샀다. 탠디 구두도 락포트 마냥 편해서 이쁘면 신어보고 편하면 항상 사두는 편이다. 쇼핑을 하는데 일상에서 사투리가 없어서 잠깐 신기했다. 창원에서는 음식점을 가거나 쇼핑을 가서 말을 하면 내가 말하는 내용보다는 항상 위에서 오신감네. 서울말을 쓰네 라는 말을 거의 항상 들었는데 여기는 타인이 딱히 내 말씨에 감흥을 못 느낀다(서울말이라는 표현 자체도 사실 어색하다).
다시 월요일이 되면 다른 언어권 생활이 시작되고 나는 또 집에 왔던 3일의 시간을 잠깐 동안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며 지낼 것이다. 4시간으로 언어권을 넘나드니 여행을 하는 것 같다. 그냥 다시 백수가 되어 엄마가 있는 집에 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잘 수 있는 곳이 두 군데가 있어 숙박비가 들지 않으니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12월에는 엄마가 한 번 내려와 같이 주변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 전에는 광주에서 다른 동기들이 창원에 한 번 놀러 오기로 했고, 서울에서 공부할 때 만난 부산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부산에 가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주에는 프로젝트를 하기 좋아하는 95년생 친구가 서로 모르는 자신의 친구 15명을 초대해서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기로 해서 뭔가 색다른 연말을 보낼 계획이다. 예술성 있고 공감이 잘 되는 친구라 그 친구의 친구들도 기대가 되고 비슷한 듯 다른 사람들끼리 영감을 주고받는 자리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