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이에요
선물로 받은 튤립 무드등이 마음에 든다. 내 집이 아니지만 내 방에도 어느새 하나둘씩 살림살이가 추가되고 있다. 짐 많이 늘리면 이사할 때 힘든데. 아직 공부 중이라 일하지 않고 있는 친구가 무드등이랑 향초 중에 뭐가 좋냐고 했을 때 생각 없이 우와 무드등 완전 좋아! 해버렸다. 아니다 아니다 진짜 안 줘도 돼. 마음만 받을게 용돈 보태 쓰지ㅜㅜ 뒤늦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결국 보내줘서 감사하게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었다.
창원에도 파카 입는 사람들이 생겼다. 주말에 집에 올라갔다가 맹추위를 경험하고 나도 파카를 입고 내려왔다. 나는 바람막이를 입고 갔는데 지하철 사람들이 모두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어 놀랐다. 이 날 창원보다 10도가 낮았다(평소에는 5도에서 7도 정도 낮은 것 같다). 역시나 붐비는 지하철이 적응되지 않기도 하고. 속에 가볍게 입었음에도 창원에서 아직 파카 입기엔 낮에는 땀이 난다. 경상도 남자 동기들은 춥다고 자켓 위에 롱 패딩 입고 있는데 나는 블라우스 위에 얇은 코트 하나 입으니 역시 윗 지방에서 와서 추위를 덜 타는 것 같다고 한다(나도 밤엔 춥다).
창원에서 근무 중인 나의 동기는 나를 포함하여 5명이고 나를 제외하고 모두 남성이다. 외지에 혼자 여자를 보내다니 하고 혼자 여자인 나를 잘 챙겨준다. 신기하게도 다들 동갑이거나 한 살 많은 또래로 구성되어있다. 우리 모두 관사에 살거나 자취를 하고 있어 퇴근 후 종종 저녁을 같이 먹는다. 어제는 날이 추워졌고 한 명이 인후염에 걸려서 국밥을 먹을까 마라탕을 먹을까 부대찌개를 먹을까 하다가 나는 마라탕을 매워서 못 먹고 어제 점심에 부대찌개를 먹어서 제외되었고,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상남시장에서 닭갈비를 먹었는데 꽤 맛있고 질도 좋았다.
닭갈비를 먹는데 나처럼 서울말을 쓰는 남자 동기 한 명이 자꾸 어디 카페 좋은 데를 발견했는데 할 거 없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저 내일 운전면허 필기시험이라 공부해야 되는데. 와서 해도 돼요. 각자 할 거해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만나요.
다른 한 명은 도서관에 들려 책을 빌려오기로 하고 나도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와서 청바지에 패딩으로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지도에 쳐보니 걸어서 40분이라고 뜬다. 뭐야 너무 먼데. 누비자도 만료되었는데. 동기는 자기 누비자 계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어디까지 와서 반납하고 같이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동기의 핸드폰 번호와 생년월일을 입력하니 동기에게 6자리 숫자가 갔고 동기는 나에게 보내주었다. 기어가 잘 돌아가는 자전거 하나를 골랐고 높이를 조절하려는데 다시 찰칵하고 자전거가 잠겼다. 아, 빼놓고 조절할걸 미안. 다시 계정을 치느라 6월 1일이라는 생일만 외웠다.
밤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손이 많이 시렸다. 집에서 장갑 가져온 거 있는데 가지고 나올걸. 도대체 어느 카페를 가길래 이 추위에 자전거까지 타고 가서 가자는 거야. ㅇㅇㅇ(이름) ㅂㄷㅂㄷ.... 하며 15분을 달렸다. 만나자마자 내가 속으로 부들부들하면서 왔다고 하니 빵 터지며 가보면 좋을 거라고 했다.
창원은 탄천로가 없는 대신 곳곳에 높은 가로수가 뻗어있는 산책로가 잘되어있다. 황금색으로 물든 나무들 사이로 산책을 하면 정말 황홀하다.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고 나면, 역시 가을은 맨눈으로 봐야 예뻐, 하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넷이 대화를 하며 걸으니 추위가 덜한 것 같았다. 그냥 평범한 아파트, 주택가, 상가를 지나가다가 그 동기가 이제부터 잘 봐야 돼요. 언제 나올지 몰라요. 하고 조금 뒤에 지하로 통하는 장막이 있는 곳이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핑크색으로 된 조명 하나 켜져 있고, 하얀색 장막 같은 것이 달려 있는데, 모텔 외관 같기도 하고 세차장 같기도 했다. 그 동기도 발길 닿는 대로 마을을 둘러보다 이런 곳에 이런데가 있다니! 하고 들어갔다가 다음에 꼭 다시 와봐야겠다 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약간 지하처럼 내려가듯이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감탄사가 나왔다. 와. 이렇게 넓은 공간이 나타나다니. 일부러 찾아올 만하다! 데려와줘서 고마워라는 감정이 솟아났다. 커다랗고 짙은 황토색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본 감성스러우면서도 이국적으로 모던한 공간이 나왔다. 넓은 테이블에 바처럼 손님들이 나란히 앉는 구조였다. 술집이 아닌데 술집 같기도 하고 뭔가 퇴근 후에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평일의 하루를 마감하고 싶은 분위기였다. 행복하게 둘러보았다.
찾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알파벳을 세로로 쓴 메뉴판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쉬웠다. 주인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성 직원 분은 차분했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도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독자들이 지긋지긋해할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입구에 들어오면서 또 바르셀로나가 생각났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이틀 정도 남긴 날 밤 초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라시아 밤거리를 걷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점심에 돈을 많이 썼으니 저녁은 가볍게 먹자는 생각으로 방에 사둔 바게트 빵에 하몽을 올려 먹고 말자, 하고 숙소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때 외곽 후미진 곳에 일본어로 써진 조명이 있었고 나무로 된 문이 있었다. 겉에서 메뉴판을 보니 일식 치고 가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먹고 가자 결심이 선 후 문을 열어 계단을 약간 내려가니 현지인들이 많아 보였다. 일식집이라 아시아인들이 많을 것 같았는데 현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튀김 세트와 초밥을 먹고 있었다. 가족 단위로 아이와 함께 젊은 부부가 외식을 하는 모습이 지금도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냥 그때 일식을 발견한 기쁨과 내부의 밝았던 분위기가 좋았고 밖은 깜깜한 겨울로, 남쪽이라 딱 지금 정도의 날씨와 추위여서 더 겹쳐서 느껴진 것 같다. 외국 감성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과 예기치 않은 문학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따뜻한 밀크 초콜릿도 맛있었다.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 학원홍보 문구가 현란한 1000문제 짜리 운전면허 책을 꺼내 잠깐 집중하여 300문제 정도 풀었다. 중간중간 수다를 더 많이 떤 것 같지만. 주말엔 사람이 많을 것 같고 평일 저녁에 혼자 와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책을 읽고 하루를 정리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정말 일기 같다. 추위에 지지 마시고 늦가을의 감성을 풍부하게 느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