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Jan 05. 2020

화장실에서 넘어졌다

<킬링이브>


운전면허 장내시험에서 실격되었다. 마치 실연을 당한 것처럼 망연자실, 어깨가 축 쳐졌다.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교육을 받은 지 2주나 되어 기억이 안 났다. 돌발 돌발, 할 때 얼른 브레이크를 밟고 비상등인지 세모난 빨간색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도무지 안보였다. 알고 보니 오래돼서 빨간색이 다 지워졌다. 가속 구간 후 감속을 해야 하는데 어디쯤에서 감속을 해야 하는지, 하얀색 라인이 두 개 있는데 어디서 서는 거였더라. 하다가 정지선이 아닌 감속 구간이 끝나는 하얀색 라인에서 멈추었다.


운전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다. 집에 와서 씻고 좀 쉬려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오는데 발에 물기가 있는 상태로 나오다 크게 미끄러졌다. 화장실에 둔 물건들은 우당탕탕 소리가 났고, 내 몸은 더 큰 사고를 예방하고자 잔뜩 힘을 준 탓에 온몸이 멍이 들고 쑤셨다. 왼쪽 종아리가 빨개지며 멍드는 신호가 느껴졌다. 왼쪽 다리를 부여잡고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채 소리 내며 그르릉거렸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항상 덤벙덤벙 실수 투성. 엄마한테 말하면 분명 넌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할 거다.


온몸이 쑤시고 조금만 움직여도 끙끙거리는 소리를 입밖에 내며 침대 밖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왓챠 플레이를 켜고 킬링 이브를 틀었다. 산드라 오 닮은 친구 있었는데. 쾌활하고 밝은 친구였는데 잘 지내나. 산드라 오는 영국 정보 당국자로 나오고, 신박하게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 여자는 러시아 정보당국과 연결되어있는 매력적인 러시아 여자로 나온다.

유괴, 협박.
날 쏠 수 있을 것 같아? 여유
의사로 변장. 말에서 떨어져서 다쳤대
프랑스어 연기.
임기응변으로 주워입은 다양한 복장
새로 변장한 패션
아슬아슬
또 새로운 스타일

집에 나 자신을 고립시킨 지 이틀째. 킬링 이브도 시즌2를 보고 있다. 빌라넬(사이코패스 러시안)이 이브(산드라 오)의 손에 칼을 맞아 피흐르는 복부를 감싼 채 돌아다닌다. 사이코패스이지만 화려한 변장술, 연기, 다국어를 사용하는 게 멋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도시를 돌아다닌다. 매력적인 정보요원으로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빨래가 다되었다고 덜덜거림을 멈춘 세탁기가 알림 소리를 냈다. 쑤셔서 들기 힘든 왼쪽 팔을 부여잡고 몸이 아파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로 세탁물을 빼러 방에서 걸어 나간다. 빨래를 널고, 화장실을 갔다 오고, 냉동실의 피자를 데워먹고, 머그잔에 500ml 생수를 뜯어 따르고, 보일러를 켰다 껐다, 옷방에서 물건을 가져오고 들락날락,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방이 남향이라 그런지 햇빛이 잘든다. 따뜻하다. 침대에 누워 따뜻함 즐기기.


어느새 세 달간 지내며 익숙해진 이 아파트의 생활. 공간을 다시 둘러보니 낯설다. 창원이라는 도시의 30년 된 낡은 아파트. 이 시간에 이 공간에서 나는 아픈 채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나 자신을 부상을 입은 채 숨어 지내는 빌라넬처럼, 준비된 아파트에서 당분간 외부와 단절된 채로 갇혀 지내는 1Q84의 아오마메가 된 것처럼 상상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 감흥 별로 없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