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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r 28. 2021

카카오톡을 쓰레기통에 버려줘

시간이 날 때는 글을 쓰기가 귀찮았고 딱히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운 부서로 옮긴 지금은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 책 읽기의 재미에 빠져 작년 한 해 동안은 두꺼운 고전문학도 여러 권 완독하고 작가의 범주도 넓혀보았는데 올해는 책 읽을 여유가 도저히 안 날 것 같다. 일로 성장하는 것과 자아의 성장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가.


개나리가 노랗게 피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만 본다. 진정으로 즐길 마음의 여유가 나지 않는다.


모든 부서원들이 하루에 기본 4시간은 초과근무를 하는 것 같다. 제일 빨리 퇴근하는 내가 보통 9시~9시 반에 퇴근하고 보통 새벽에 집에 간다. 부장, 차장급이 일을 제일 많이 하는, 어쩌면 바람직한 구조의 회사이다. 덕분에 집에 오면 피곤해서 자기 바쁘고, 주말에는 힐링할 여유도 없이 잠을 몰아 잔다. 매일 늦게 들어오는 나에게 엄마는 이제야 직장 생활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아가씨들은 데이트도 좀 하게 일찍 퇴근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단체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라고 해."라고 말하며 그 부서는 시집도 못 가게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정이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크게 책임질 것이 없는, 나이도 연차로도 막내 대리인 나는 모든 사람의 () 되어 일을 분담한다.  업무분장에 없는 다른 사람의 일을 돕다 보면  일이 뒤로 밀리긴 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책임지지 않고 보조하면서 약간 경험만 해보는 것이 좋다.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고 그들과 일상에서 대화하고 같이 일하는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가령, 차장님이 구두를 벗고 아빠 다리를   일에 집중해 있는 모습을 보면 반전 매력이 느껴진다. 겉으로 보기엔 전날 밤을 새더라도 외모도 일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의 커리어 우먼인데 실상은 굉장히 털털하다. 구두가 여기저기 내팽개쳐서 널브러져 있는 모습, 건달처럼 다가와 툭치며 오늘 점심 약속 있냐고 묻고 다니는 , 영혼 없는 말투로 과하게 호응하는  등이 재미있다.


각자가 너무 바쁘니까 새 부서로 온 첫째 주에는 한 사람과 1분 이상 대화를 해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2주 차에는 저녁을 시켜서 같이 먹으면서 대화를 했고 나에게 궁금한 것도 물었다. 우리 부서에는 본래 악의적인 사람은 없고 다들 나에게 호의적이어서 감사하다. 나이와 전공을 물었고 전 부서와 비교해서 이곳은 어떤지 물었다. 쉽게 가기 힘들다는 전 부서에는 어떻게 발탁되어 가게 되었는지도 물었다. 어디까지 나를 드러낼 것인가, 어떻게 겸손한 방식으로 나를 설명할 것인가를 순간순간 판단하면서 풀어나가야 한다. 대상에 따라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달리 설명한다. 늘 거만한 사람, 나의 가치를 깎아내릴 준비를 하고 묻는 사람, 순수하게 내가 궁금해서 알아가고 싶은 사람, 나를 잔뜩 오해한 채로 묻는 사람, 질투심이 눈과 입에서 가득 흘러나오는 사람, 판단력이 흐린 사람, 의례적으로 별 생각 없이 묻는 사람 등.


나에게 주어진 일 중 화상회의가 있다. 화상회의에 참여하는 간부들에게는 태블릿 pc가 하나씩 제공되는데, 다른 부서장 한 분이 태블릿 사용법과 화상회의에 접속하는 법 등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찾아갔다. 이미 다른 사람하고 업무 중이었다. 처음엔 서서 기다리다가 그 부서 차장님이 커피를 하나 갖다 주면서 앉아서 기다리라고 해서 앉아 있다가 시간이 25분가량 흘렀다.


90년도에 입사한, 경상도 사투리가 진한 아저씨였다. 새로 온 그 부서장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이가 있으니 태블릿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 부장이나 다른 간부들은 업데이트되는 IT 세상에 익숙해지고자 배우려고 노력하는데 이분은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나, 어쩌면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못하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화상회의 시스템 접속법을 알려주고 나니 우리 회사 재택 시스템도 온 김에 알려달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재택 시스템은 문서에 하는 법이 세세하게 나와있고 또 모르면 자기 부서 후배들한테 물어봐도 되는데 왜 이러나 싶었다. 능글맞게 "온 김에 이것도 해줘~" 하고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아까 커피를 주고 간 남자 차장님이 약간 사색이 되어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돈은 내고 알려달라고 하는 거냐고 했더니, 그분은 또 능글맞게 여기 커피 줬잖아, 라고 했다. 남자 차장은 “아니 그 커피는 제가 준 거죠.” 하고 대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난처한 듯 자리를 떠났다.


재택 시스템을 알려주고 나니 카카오톡도 깔아달라고 했다. 카카오톡 같은 거 여기 까시면 안 돼요, 하니 자기는 핸드폰으로 카카오톡을 할 줄 모른다고 막무가내로 깔아달라고 했다.. "카카오톡은 거기 쓰레기통에 넣어 줘," 하고 안 보이게 숨겨달라고 했다. 휴지통을 쓰레기통이라고 하다니ㅎㅎ 아 그러면 여기 파일을 하나 만들어서 거기 넣어드릴게요, 했는데 파일 안에 카카오톡 밖에 없어서 파일 밖으로 카카오톡 이모티콘이 쏙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하하, 안 되겠네요 하니 "쓰레기통에 넣어~"라고 말했다. 그러고서는 카카오톡 삭제할 때도 와서 해줄 거지?라고 말해서 황당했다. “카카오톡 쓰시면 데이터 비용 감당 안되실텐데.” 라고 아까 그 남자 차장이 다가와 말했다. 그랬더니 그 부장은 여태까지 쓴 데이터 얼만 지 좀 확인해 보라고 했다. 수발은 끝이 없구만.


나는 운 좋게 항상 좋은 상사만 만났었나 보다. 동기나 또래들의 얘기를 듣거나 블라인드 같은 데 오른 글을 보면 우리 회사는 세대갈등이 심한 것 같은데 나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항상 예의도 바르고 하급 직원들을 존중하는 모습이 굉장히 수평적인 회사라고 생각했다. 전에 다니던 직장은 직급에 따라 아래 직원에게는 나이와 상관 없이 무조건 반말을 하고 군대식 문화에 가까웠기에 이 곳에 입사하고서는 신세계였다. 사내 문화가 정말 건전하게 느껴졌고, 우리 사회의 변화보다 빠른 곳이라고 느꼈다. 조금이라도 언행이 문제가 되고, 매뉴얼 상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차별적 언행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면 제삼자도 감사실에 적극적으로 신고? 하는 그런 곳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직원들은 현재 이런 수준도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가해자에게 더 적극적으로 처벌이 가해지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어 회사 밖의 세상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느껴진다.


내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고 퇴근하는 길에 깜깜해진 하늘을 보면서 카카오톡까지 깔아주다가 한 시간이 흘러서 그래, 하고 자기 자식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왜 상관도 없는 남의 부서원한테 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하는 것이 있으면 서로서로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늘 일까지는 그래도 크게 불평스러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매일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내는 부서장을 모시는 부서원들은 세대갈등의 불만이 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체감하지 못한 갈등들이 더 많겠구나,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는 신구 갈등뿐 아니라 직급별 갈등, 정규직-무기계약직 간 갈등 등이 있다. 다행히 남녀 갈등은 거의 없는 편인 것 같다. 서로 존중하고 갈등을 해소해나가려는 노력은 어렵지만, 서로가 노력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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