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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r 27. 2022

채소의 기분은 모르지만 쭈꾸미의 기분은 알 거 같아

유퀴즈 유튜브에서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매일 증조할머니를 싫어하던 걸 후회하고 기도한다고 하는 걸 보았다. 낮에 약기운에 세 시간이나 낮잠을 잤더니 새벽까지 잠이 안 와 뒤척이며 생각했다. 나도 죽고 나면 누군가 나와 관련된 후회를 할까. 내가 죽고 나면 느낄 수가 없으니 미래의 나 대신 지금이라도 누군가의 후회를 상상으로나마 들어주고 괜찮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마음이 편하면 좋겠다.


매일 조금씩 죽음을 준비한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른다. 가까운 미래가 될지. 시한부인걸 차라리 모르는 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서른아홉>을 보면 췌장암에 걸려 몇 달 살지 못하는 여자가 나오는데, 자기도 죽음이 무서울 텐데 남은 가족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우리 할머니는 60대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자기가 죽을병에 걸린 줄 모르고 돌아가셨다. 내가 6개월밖에 살 수 없는 걸 알게 된다면 마음이 힘들 것 같다. 그냥 갑자기 사고사를 당하든가 스르륵 죽으면 좋겠다. 요즘 드라마에 췌장암 걸린 사람이 자주 나온다. 오늘 <신사와 아가씨>라는 주말 드라마에서는 딸이 갓난아기때 떠난 여자가 췌장암에 걸렸는데, 전 남편과 딸은 그 여자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곧 죽는다하니 불쌍해서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나왔다. 재혼한 와이프는 그 여자가 죽든 말든 왜 신경쓰고 걱정하냐고 그 여자를 챙기는 남편에게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남편은 사랑했던 여자이자 딸의 친모가 측은하고 안됐고 가슴이 미어져 홀로 술을 마신다.


코로나로 잠 못 이루던 밤, 차라리 누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 확진 열흘 째인 오늘 밤도 잔기침을 한다. 여전히 목이 마르고 콧물이 간간히 난다. 기운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이곳은 적절하지 않을 때가 많다. 격리 기간 동안 잠깐 괜찮아질 때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를 읽었다. 하루키는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쉽고 재밌게 쓰던데, 나는 아무래도 능력과 내공이 떨어진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감각적인 제목의 에세이다. 하루키는 느낌 있는 제목을 먼저 짓고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편이라고 한다. 1Q84 같은 장편도 그렇고, 하루키 글은 감각적이고 예쁜 소제목들이 많다. 예를 들면,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을 한 나의 가난> 등등. 나도 제목을 지어 놓고 글을 써봐야지, 한 주제를 가지고 내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는 글을 써 봐야지, 하고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근데 막상 만족할 만한 글을 쓰기 어렵고 하고 싶은 말은 저 가슴 아래 글감으로만 떠돈다. 6개월이 남았다고 하면 서둘러 풀어낼 텐데 아마 아파서 또 못하고 가게 될까.


대학교 때 친구가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소개해주고 싶다던 선배가 있었는데 실현되지는 않았고, 그는 지금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고 그 사람은 나의 존재를 모르지만 친구의 친구여서 왠지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사람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 취업의 길이 아니라 소설가의 길을 걷기로 했고, 성공했다는 게 여러모로 대단하고 부럽다. 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역량도 부족해서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전에 죽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아쉽다.


격리 해제 후 회사에 나갔다. 일을 대신 해준 여자 동기에게 만나자 마자 사랑해요 대리님! 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오며 가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하고 말하면 허스키하게 잠겨 있는 내 목소리에  놀란다. 부서원들은 내가 계속 기침을 하고 축 늘어져 있으니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오가다 만나는, 아직 안 걸린 사람들은 나의 코로나 증상을 듣고 한 걱정을 하며 두려워한다. 기운이 없지만 장난은 치고 싶어 “저 아직 바이러스 남아있는 거 같은데 묻혀야겠다,” 하고 팔을 만지면 엘리베이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듣고는 다들 웃는다. 내가 코로나 걸린 것을 알고 걱정하는 말투로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들을 보면 고맙다. 몸도 안 좋고 아직 조심해야하는 시기 같아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어준다. 정을 느낀다. 나 조차도 하도 모든 부서에 전방위적으로 걸려서 이젠 누가 걸렸는지 관심도 없고 감기처럼 무뎌져서 돌아오면 돌아왔겠거니 하는데 나는 너무 유별나게 걸린 것 같기도 하다.


화이트데이에 어떤 분이 오늘 초콜릿 받았어요? 하면서 주고 간 하리보 젤리가 아직 남아 집게에 찝혀있다. 왠지 상큼한 게 먹고 싶어 콜라맛 젤리를 한 개 꺼내 입에 넣고 다시 사무용 집게로 봉해 놓는다. 하도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서 배가 아프다. 격리 4일차부터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고 배가 아파서 회사에 나오려고 전날 지사제를 먹었더니 속이 메스껍다. 설사가 코로나 증상인지 아니면 약봉투에 써 있는 ‘설사 유발 가능’이라는 약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더 이상 먹으면 안 되겠다, 하고 배를 웅켜 쥔다. 하리보와 함께 받은 페레로로쉐는 부서원들과 나눠먹고, 차장님이 준 핑크색 하트 모양의 사탕은 쪼개서 다른 부서 사람들하고 나눠 먹었다. 옆 부서에 가서 자랑을 하였지. 사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선물로 받으면 왠지 맛이 있다.


옆자리 과장님이 내가 밥을 못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따뜻한 라떼와 스콘을 사다 준 적이 있는데 평소에 커피를 잘 안 마시고 스콘도 뻑뻑해서 안 좋아하는데 나를 생각해서 사다 준 마음에 잘 먹었다. 괜히 큰 소리로 과장님 이렇게 따뜻한 분인지 몰랐다 너무 감동이다, 하고 말하니 민망해하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과장님의 친한 남자동기에게 메신저로 말했더니 ㅋ로 가득 채우며 겨우 스콘에 넘어간거냐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절대 넘어가지마라,라는 말을 남겨 웃음이 났다. 옆자리 과장님은 틱틱거리지만 츤데레이다. 내가 코를 틀어막으며 힝 코피 나요, 하고 쳐다보면 “뭐했다고.” 한마디 하고 다시 모니터를 보며 하던 일을 한다. “뭐했다고 라뇨! 너무한 거 아니에요?”하면 듣지도 않는다. 가끔씩 내가 말을 걸면  “한가하구나?” 하는 식이다. 왜 자꾸 저한테 반말하고 너라고 해요! 하면 못들은 척 한다. 주변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느낄 것 같은 사람인데 감정을 잘 읽는 사람이란 걸 느끼고 놀랐다. 엄청나게 솔직하게 마음의 소리를 표출하는 점이 나랑 비슷하고 신비로운 아우라가 있어서 전갈자리인가 했는데 자기는 황소자리라고 했다.


<맛있는 녀석들>은 뭐 먹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틀어 놓고 보기에 좋다. 음식을 먹을 땐 한국어 방송을 트는 게 좋다. 다음 주 예고에 쭈꾸미 샤부샤부가 나오는데 살아 움직이는 생쭈꾸미를 끓는 육수에 바로 집어넣는 장면이 나온다. 팔팔 끓는 물에 들어가는 쭈꾸미에게는 생지옥이 따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더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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