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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pr 22. 2022

슬프지만 달콤한 인생

서울시립미술관 <시적소장품>

짙은 보라색과 청록색, 해괴한 반짝이 크롬색으로 이루어진 무늬의 절개가 세련된, 엉덩이는 딱 달라붙고 관능적으로 퍼지는 머메이드 스커트를 입었다. 위에는 흐르는 느낌의 부드러운 검은색 셔츠블라우스를 입었다. 허리는 짤록하고 엉덩이는 둥그런 거울 속 몸매가 아름다워 보인다. 과즙 메이크업을 했다. 요즘에는 과즙 메이크업에 꽂혀서 볼터치를 매일 한다.


업무 관련해서 제도 설명회를 들으러 가는데 각 공공기관 담당자들이 모인다. 나랑 같은 업무를 하는 다른 기관 사람들을 볼 수 있어 신기하다. 컨벤션 홀에 들어가서 명부에 사인을 하는데 가나다 순이 아니어서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무슨 무슨 공사, 진흥원 등. 항상 행사를 진행하다가 행사에 참여자? 손님?으로 앉아서 둘러보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아 현수막은 저런 식으로 디자인했네, 윗사람 인사 말씀이 끝나자마자 마이크 단상을 치우고 이후부터 진행될 ppt 설명을 위해 앞에 조명을 끄네. 지체 없이 딱딱 이루어지는 군. 질의 응답을 위한 마이크 전달도 보게 된다.


설명을 해주는 주관 기관 담당 과장의 설명은 자세하고 알기 쉽지만 나도 이 업무를 담당한 지 2달이 채 안되다 보니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남자 과장의 목소리는 약간 지지직 거리고 매끄럽지 않아 매력적이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와 말투는 매력을 끄는데 정말 중요하다. 어떤 목소리는 정말 좋아서 그 사람의 모든걸 덮어 타고 넘쳐 흐른다. 대중적으로 호감형 인간이 되기 쉽다. 그런 목소리들은 환상을 심어준다. 사람과 공간을,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압도한다. 나도 좋아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나는 목소리를 잘 구분하는 편이다. 전화가 올 때 그쪽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누구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00이시죠? 할 때가 즐겁다.


우리는 제도를 이제 도입하는 단계라 기관에서 담당자가 나 하나인데, 선도하는 기관들은 한 부서에서 체계적으로 담당하고 적어도 둘 이상이 업무를 한다. 설명을 들을수록, 와 이걸 나 혼자 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된다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10~ 20년차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왔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 기관의 어떤 것과 접목을 시켜 점수를 받을 지 여러가지 생각이 들긴 했는데 좀 막막하다. 휴, 월요일에 돌아가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야하는데 골머리다.

외투를 입기 애매했는데 입고 나오길 잘했다. 바람이 분다. 날씨가 흐리고 먹먹하다. 옷을 여몄다. 정동길을 걸었다. Он боится, что влюбится в вас окончательно, 하고 아까 잠깐 라떼를 마시며 익힌 표현을 되뇌었다. 대구처럼 배재학당과 성당처럼 벽돌로 된 근대 건물들이 분위기를 만든다. 평일 낮인데도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남학생은 크림색 포장지에 든 크림색과 옅은 핑크색 꽃 두송이를 들고 서있다.


서울시립미술관 건물 외벽을 좋아한다. 시적 소장품이라는 전시를 둘러보았다. 그림만 보는 걸 좋아하는데 오늘은 시에서 파생된 특성을 예술로 엮은 전시여서 설명을 보는 것이 좋았다. 미술, 사진, 영상 다양했다. 초록색 트리처럼 옷을 입은, 괴물 같은 해괴한 모습은 어떤 감정의 초상화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즐거움을 표상하는 걸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 때. 억지로 행복한 척하는 우리. 애써 괜찮은 척할 수밖에 없는 우리. 부풀린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럴수록 더 투명하게 기형적인 나의 모습이 보인다면. 나의 감정의 초상화는 어떨까?


시인을 비롯한 창작자들은 화자로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자신을 숨기기도, 가상의 인물을 창작하여 대변하기도 한다. 예술은 재밌다.


사랑할 땐 열심히 접던 종이학이 이제는 쓸모없어졌는데, 예술가는 그 종이학을 다 펴서 뒷면의 금박지를 엮어 예술로 만들었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영상 속의 화자는 영어로 말을 한다. 바닷가를 보며 이러 저런 얘기를 하고 밑에 자막이 깔린다. 사랑했던 여자를 보내주었던 그때의 아쉬운 감정을 회상한다. 온 마음을 주었는데 결국 첫사랑은 실패했다. 그녀는 없고 바닷가에 혼자 있다. 주저리주저리 목소리에 내 생각을 얹어 만들어도 예술이 된다. 예술적이다.


2층의 천경자 상설 전시관에 들어갔다. 6년 만에 그 그림 앞에 섰다. 화병이 된 마돈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다. 화려하지만 그 속의 슬픈 눈. 설명에는 원하는 걸 성취하지 못한 눈이라고 하는데 난 왠지 화려함의 겉모양 속에 슬프고 외로운 눈빛으로 느껴진다. 자유로운 여자, 슬프고 외롭지만 달콤한 인생이라는 천경자라는 여자의 감수성과 인생과 예술이 무겁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다 잊히겠지, 잊힐 거야. 잊히고 싶어, 잊고 싶어, 아니 잊히기 싫어. 잊히지는 않아.


6년 전 우울하던 그때는 핑크색 나시를 입고 있었는데같은 장소에 오니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때 생각하던 사람이 누군지는 생각이 났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이 안 났다. 그냥 그때의 나만 생각이 난다.


서울시청과 광장 주변은 변했다. 주변의 압도하는 건물들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왠지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날이 흐려 결과물이 별로이다. 집에 오는 길 항상 버스를 타는 롯데백화점 앞에는 엄청 큰 애플 매장이 생겼고, 내가 새 폰을 산 곳이기도 하다. 학교를 다닐 때 매일 집에가는 버스를 타는 곳이었지, 하고 이곳에서 버스 탈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한다. 졸업한지 10년이 다 되어 가네, 와 집에가는 2층 버스도 생겼다. 보라색 껍질을 씌운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니 무릎 위 치마와 잘 어울렸다.


“이제 대리님이 2호가 되겠네.” 어제 부서 점심 회식에 결혼을 하는 사람에게 우리 부서 결혼 1호라고 축하한 뒤 나에게 누가 말했다. “그럴까요?” 호호호 웃었다. “대리님은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신대요.” 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프랑스의 누군가 진정한 사랑은 desire to be desirable 어쩌구 하던게 생각이 난다. 무슨 말인진 알겠지만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 같다. 그냥 집착일 수 있다. 미묘한 걸 느끼는 사람이 좋다. 사람이 뭔 말을 하면 날카롭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말고 예민하게 알아채는 사람. 그 사람과 말을 하다 설레서 미소가 나고 웃음이 터지면 그걸 느끼고 나랑 똑같은 웃음을 짓는데, 순간적으로 그 웃음을 보고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도 같은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 재밌다고 전갈자리의 친구에게 말했다. 또, 눈웃음과 뜨거움이 흘러나오는 눈빛을 좋아하지만 그게 과연 진정한 사랑인지는 모르겠다고.

천경자, 화병이 된 마돈나,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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