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립미술관과 무라카미 하루키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
이만큼 와버렸으니 이제 와서 뒤로
되돌아갈 순 없잖아. 그렇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인공으로 이루어진 대나무 숲 속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요가할 때 나올 법한 몽환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각 나무 대마다 들어있는 조명은 어두운 공간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압도적인 기운이 커다란 공간을 채웠다. 천장에는 뻗어 나온 대나무로 가득했다. 생명력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자연이 아닌 인위적인 공간은 따스한 위로와 여운을 주었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공감해 주었다. 다 안다는 듯이 계속 나를 지켜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른 시공간에 온 듯했다.
중학생 무리가 잠깐 왔다 간 것 외에는 나 혼자였다. 이 공간에 마련된 유일한 벤치에 앉아 대나무 숲을 바라보고 계속 생각에 잠겼다. 너와 나를 아는 눈동자가 주는 무언의 위로, 따뜻함. 아주 조금의 비난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도 없이 오로지 품어주는 성숙한 눈빛.
하지메와 시마모토가 서로를 그리워할 때 이 대나무 숲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메는 십여 년 간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계속 시마모토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첫사랑이다. 시마모토는 잡지에 나온 인터뷰를 보고 고민을 하다 하지메가 일하는 바에 찾아왔다. 15년 만의 재회이다. 한 번 보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는 그를 망칠 것 같은 예감이 있었지만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나고도 또 다시 사라진 시마모토를 그리워하며, 가정을 포기하더라도 다시 만난 그녀를 절대 놓기 싫었던, 아내에겐 미안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 때, 그리고 결국 그녀를 상실해 버렸을 때 하지메가 이곳에 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으면서 하지메와 시마모토의 사랑에 공감을 하면서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그들의 영혼에 엄청난 치유와 회복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해서 안도하면서도, 결국엔 그들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경남도립미술관의 <온 라이프>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세상에서 인간의 정체성, 사랑, 자연, 비인간과의 공존 등 생각해 볼 주제를 던져준다. 1층에서 2층으로 향하는 길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커다란 공간이 깨끗하고 현대적이다. 온 라이프 전시는 각 전시실마다 영상과 음악, 조명 등을 활용해 다양한 생각과 울림을 준다.
사랑은 시간에 구애받기도 구애받지 않기도 하다. 같이 있어주는 게 사랑이기도 하다. 첫사랑 시마모토를 향한 마음 절절한, 시간이 지나도 강렬하게 끌리는 사랑도 사랑이고, 현재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아내 유키코와의 사랑도 사랑이다. 새로운 시작을 마음먹지만 하지메의 마음은 평생 괜찮아지기 어려울 것 같다. 채워질 수 없이 깊이 구멍 난 그 결핍 때문에 안쓰러워 찌르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