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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y 28. 2022

우리들의 블루스

기장 바다

밤바다는 깜깜했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낮에 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깜깜하니 물소리에 집중되었다.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다 모래가 고왔다. 맨발의 스니커즈는 모래가 들어갈까 봐 조심조심 걸었지만 어느 순간 발가락에 조금씩 모래가 느껴졌다.


일광 해수욕장은 유원지 느낌이 났다. 조개구이 연탄 냄새, 지나가는 오토바이 냄새, 조명들, 바닷가에 둥글게 모여 앉아 술을 마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폭죽 터지는 소리. 한 여학생은 일어나서 춤을 추고 있었다. “와, 나도 저렇게 놀고 싶어!”


평일 밤이어서 그런지 기장 바다로 가는 길은 뻥 뚫렸다. 광안대교를 지나가며 창문을 내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깜깜한 하늘과 어두운 깊은 바다가 느껴져 무섭다고 말했다. 터널에 들어가는데 앞에 가는 버스가 가운데 차선으로 달렸다.

“와, 어떻게 터널에서 가운데로 달려?”

“이게 부산 버스랑 택시지.”

구불구불한 길은 무서웠다. 그는 왼쪽을 보며 가이드처럼 저기가 어디라고 설명을 하였다. “으악 앞에 좀 봐! 우악 이러다 뚫고 바다로 나가면 어또캐애애애 속도를 줄여 봐!” 했더니 그는 뭐든 무서워하는 나를 재미있어하며 여유 있는 말투로 다 보고 있다며, 자기는 운전병 조교 출신이라고 무서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말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어른 같애, 하니 그가 웃으며 이미 나이가 몇 살인데 어른이래, 하고 말했다.


부산을 매년 갔지만 뚜벅이인 나는 기장을 가보기 어려웠다. 나보다 열한 살이 많은 여자 차장은 우리 또래는 광안리나 해운대 가면 안 된다고 거기는 젊은 친구들이 가는데라며 기장으로 빠져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왜 우리가 또래예요,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차장은 자꾸 나보고 이미 기성세대라고 말한다.


동갑의 그는 나를 기장 바다로 데려다주었다.  ~씨 하던 사이이지만 말을 놓고 친구가 되기로 하였다. 나는 친해도 반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그는 사실 말을 놓자고 하기 전부터도 반 정도 말을 놓고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안경을 벗어서인지 달라 보였다. 라식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인상이 부드럽고 맑아 보였다. 저음이 묵직한 목소리의 억양이 크지는 않지만 사투리가 분명한 부산 남자이다. 홍대에 갔다가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는데 네 줄로 사람들이 올라가고 위에 사람들은 한 줄로 내려오는 거에 충격을 받았다는, 서울은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부산 남자.


그의 차에 올라타 음악을 틀어달라고 했다. 무슨 음악을 트는지 궁금했다. 무난한 팝송 모음이었다. 다음에 썸이 있거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의미심장한 가사를 담은 음악을 틀어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손을 잡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난다는 가사를 틀거나 자기 마음을 담은 곡을 트는 남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친구는 그런 생각은 자기는 해보지도 못했다며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신기하다고 했다. 로이킴의 ‘어쩌면 나’를 틀던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가 했던 얘기가 담겨있는 가사였다. 이 노래만 들으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왜, 둘이 차를 타고 가면 가사가 들리는데 그런 의미심장한 가사가 들리면 나한테 하는 얘기 같고 그래. 근데 조심해야 해. 바람둥이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럼 자연스럽게 해야겠네.” 하고 그가 말했다.

기장 바다가 보이는 카페는 규모가 굉장히 컸다. 바다만 보여도 될 텐데, 건축물이 과도하게 멋있었다. 커피 팔아서 충당이 되려나, 하고 괜한 걱정까지 들었다. 뮤지엄 산 같은 미술관 같기도 했다. 들어가는 입구가 굽이굽이 깊었다. 야외에서 바다를 보며 앉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친구가 시킨 콜드 브루 라떼를 컵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셔보았다. 시그니처라고 하는데 소금이 들어있어 짰다. 우악 나는 별로인 것 같아. 부산에 왔으니 회를 먹어야지 하면서 저녁에 회를 사줘서 나도 빵과 음료를 사주었다. 친구는 가져온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로 앙버터 크로와상과 두툼한 에그 타르트를 열심히 잘랐다. 야외라 약간 쌀쌀했다. 친구는 차에서 잠바를 가져다주냐고 물었다. 아니 괜찮아 따뜻한 거 시키면 돼, 하고 말했다.


의자에 기대고 앉아 밤바다 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얘기를 잘 들어준다. 내가 말을 꺼내놓고 생각을 하며 느리게 말을 해도 기다려준다. 문장을 하나 던져 놓으면 바로 응, 하고 대화를 기다린다. 날카롭게 들릴 수 있게 던지는 나의 화법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뜻하게 말한다. 차를 타고 가면서 기장을 데려와 주는데 따라와 놓고는 바다가 깜깜해서 안 보일 것 같다고 하면 아, 그럼 다른 데 가자고 하든지,라고 받아칠 남자들을 상상했다. 멀미난다고 하면 그럼 내려, 라고 말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는 안 보여도 소리가 들리잖아. 가보면 좋아, 하고 말한다.


“너는 감정 굴곡이 잘 없지? 그런 사람 너무 부러워. 무던하고 부드럽고 차분하고 건강해 보여.”

“응, 나는 항상 일정해. 여자 친구는 굴곡이 좀 있었는데, 난 투정 들어주고 챙겨주고 하는 게 좋았어. 나한테 다 덮어 씌우지만 않으면ㅎㅎ”

“너는 얘기를 진짜 잘 들어주는 거 같아. 너 같이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을 만나면 안정되고 편안할 거 같아. 근데 나는 자극적이고 받아치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에게 끌려서 문제야. 머리로는 착한 남자가 나의 이상형이야, 하는데 고분고분한 사람에게는 끌리지가 않아. 근데 결혼은 꼭 착한 남자랑 하고 싶어.”

“응 결국은 자기한테 끌리는 사람하고 이루어지더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거 같아.”

여행 이야기를 하다 그가 아이폰을 꺼내 제주도 갔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 야경 모드를 잘 못하자 핸드폰을 가져가 찍어주었다. 지난달에 아이폰 13 프로를 샀는데 일상에서는 야경을 찍을 일이 없어 처음 해봐서 미숙했다. “너는 삼성폰 쓰게 생겨서 아이폰을 잘 다뤄서 너무 웃겨.” “나 아이폰 포부터 썼다. 식스 에스 계속 쓰다가 십일 프로로 바꿨다.” 하고 말했다. 에프 발음이 없는 포 발음이 억양과 함께 왠지 재미있어 소리 내서 웃었다. 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저기로 쭉 가면 일본이야? 하고 물으니 아이폰 지도를 켰다. 일본이 나오자 일본 여행 얘기를 나누고, 일본 갔던 사진도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 좋아해?” 그가 소설도 그렇고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는다는 얘기에 물었다. 그는 무라카미? 잘 모르겠는데 누구야, 하며 교보문고에 검색을 하였다. “여자 없는 남자들. 엄청 추천이야 꼭 읽어봐! 사랑과 상실에 관한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잘 읽히고 재밌고 감성도 정말 좋아.” 하니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넣으며, 아 1Q84 진짜 재밌게 봤다면서 천재 작가라 생각했다고 그 사람이냐며 말했다.


뒷자리에서 할머니들이 발달장애 어쩌고 얘기를 하였다. “우리들의 블루스 봐? 거기 지난번에 발달 장애인 나왔는데. 진짜 발달 장애인이 연기했대!” 하니 그가 그래? 하며 넷플릭스로 우리들의 블루스를 켰다. “응 거기 좀 더 넘겨봐. 어 거기 거기! 연기 잘하지? 이런 게 발달장애인 예술 직무다 그렇지?” 하니 “다운 증후군이네 염색체인가, 다운 증후군은 다 똑같이 생겼잖아.”

“여기 배우가 한지민 쌍둥이 언니로 나오는데 열두 살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한지민이 부양해야 하는데 남자들이 다 결국 도망갔대. 그래서 한지민이 또 상처받을 까 봐 김우빈한테 그만 만나자고 하는데 김우빈은 괜찮다고 그래도 같이 셋이 살자고 했어.”


“아! 이 드라마 처음에 고등학생 둘이 애기 생겨가지고 아버지랑 싸우고 결국 아버지 둘이 결혼 허락하고 거기까지 봤다.” 하고 그가 말했다.

“어 맞아. 근데 낳는 선택하기 진짜 힘들었을 거 같아. 공부도 잘하고 서울 의대로 대학 가고 앞길이 창창한데 갑자기 애기 생기고. 여자들은 몸에 생기니 진짜 힘들잖아.”

“나라면 실수로 애기가 생겼는데 여자가 낳기 싫어하면 애를 놓고 가라고 하고 나라도 키울 거 같아.”

“정말?? 혼자서 키우게?”

“응.”

“그럼 니 인생은? 앞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고 해야 하잖아.”

“안 하면 되지. 애 키우면 되지.”

“힝 아무리 그래도 사랑을 해야지.”

“그니까 애초에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지. 성교육의 중요성이다.”

“그러면 너는 너랑 사귀는 여자가 과거에 실수로 아기를 가지고 낙태했었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음.. 들으면 좀 그럴 거 같긴 해. 한번 그렇게 생명을 잃었는데 또 그럴 수도 있잖아.”

“왜, 여자는 피해자일 수 있잖아. 실수로 생긴 거고 원치 않는 임신인데, 또 안 그러겠지. 임신공격을 당하거나 여자는 원치않았을 수 있는데.” 나의 임신공격이라는 단어에 그는 빵을 먹다가 쿨럭거렸다.

“음 결혼할 여자가 말을 안 하고 나를 속이면 싫을 거 같아. 솔직하게 말만 해주면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그것 때문에 헤어지고 하진 않을 거 같아.”

“그럼 처음부터 말하라는 말이야? 나중에 말하면 또 속였다고 하는 건가.”

“아니 뭐, 사귀면서 깊어지고 하면 말을 해줘야지. 남자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적이 있으면 당연히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10시가 되어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어디로 가면 돼? 하더니 내가 서면으로 가도 돼? 하니 여기까지 왔으니 해변이라도 잠깐 가서 걷고 가자고 했다. 사실 좀 졸렸지만 따라가기로 했다.

“너 MBTI 뭐야?” 하니 자기는 기억을 못 한다며 핸드폰을 열어 ENFP라고 캡처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 활력 넘치는 ENFP. 바다를 걸으며 같이 아는 또 다른 남사친이 생각나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전화를 걸어보자고 했다. 어어!! 그럼 영상통화 하자! 바다 보여주자! 하니 걔 아이폰 아니야, 하며 전화를 걸었다.


그 남사친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역시나 친절하고 다정하고 예의 바르면서 유머러스하다.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여성이 있어, 하니 누군지 몰라했다. 내가 전화를 가져가 반갑게 인사하니 당황했다. 둘이 이 시간에 왜 같이 있냐고, 도대체 뭐냐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뭐 좋은 소식 있는 거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00 결혼한대! 하니 설마 둘은 아니지? 하니 더 놀려줄까 하다가 부산 출장 왔다가 퇴근하고 만났다고 말했다. 저번에 둘이 부모님 집에서 잤다며, 하고 내가 말했다. 부모님 있는 댁에서 친구를 데려와 같이 자기 쉽지 않을 텐데, 니네 정말 친하구나? 하는 의도로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남사친은 어 우리 잤어!라고 말하는 말투가 재미있었다. 뭘 또 잤대, 하고 우리 셋은 소리 내서 웃었다. 조만간 서울에서 셋이 보자, 하고 헤어졌다. 말을 놓고 친구가 되니 새로운 관계가 된 느낌이 들고 감정이 순간 다양해졌다. 말을 뱉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같이 새어 나오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진다. 새로 받은 에너지와 아우라와 감정도, 밤공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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