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광안리
여행길에만 오르면 과민성 대장증후군인 건지 배가 아프다. 19년도부터 매년 부산을 가는데 올해도 가게 될 운명이었던 건지 부산으로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내가 관리하는 업무 중 소속기관 담당 직원들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서 서울, 경기, 대전, 대구, 부산, 광주권역에 모여 교육을 하기로 했다. 첫 시작은 부산이었고, 금요일 교육이어서 나는 목요일에 휴가를 쓰고 일찍 부산에 내려갔다. 올해 처음 쓴 연차이다.
대리인데 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운영 계획을 세우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있어 총체적으로 두루 살피고 챙기는 것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직원이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고 힘도 약하다. 사람들이 내가 세운 계획대로 따르게 하고 요청할 때 순순히 하게 하는 것이 쉬우면 쉬운데 어려우면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내가 하는 업무는 대개 과장이나 차장을 푸시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하게 하고 결과물을 받아내는 일이다. 한 페이지 써주는 것도 귀찮은 티 팍팍 내면서 써주는데 대리가 아닌 차장이 부탁했으면 더 순탄하게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뭐,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원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 전국을 돌며 교육을 하는 이 업무는 나랑 비슷한 연차의 대리들이 맡고 있는 업무라 친구 사귀는 마음으로 떠난다. 내가 엑셀로 관리하는 담당자 명단 이름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실제로 보면 신기하고 반갑다. 목소리를 듣고 눈을 맞추고 짧은 대화를 나누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관찰하면 재밌다. 지사의 생활은 어떤지, 어떤 업무를 하는지 고충은 없는지 여러 얘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고 이 중에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 있는 것 같으면 올라가서 간부에게 말한다. 오며 가며 식당에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산책 길에서 결정을 하고 무언가 바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과 스몰 톡을 나누며 끼워서 말한다. 이러이러한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요즘 젊은 직원들 생각은 이런 거 같더라. 내가 새로운 것에 영감을 받고 자극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걸 알기에, 그리고 내가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돌아와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걸 알기에 관리자도 나를 적극적으로 출장길에 보낸다.
srt 맨 뒷자리는 공간이 넓어 뒤로 기댈 수 있어 정말 편하다. 의자 색이 보라색인 것도 좋다. ktx는 맨 뒷자리도 더 이상 뒤로 젖힐 수 없어서 타기 싫다. 좌석도 좁고 앉으면 다리도 닿아서 불편하다. 창원을 좋아하지만 창원은 srt로 갈 수 없고 항상 갈아타거나 서울역이나 수원역에서 ktx를 타야 해서 멀고 불편하다. 수도권에서 창원은 5시간은 잡고 움직여야 하니 교통편이 나빠 우리들 사이에서는 유배지로 간주된다.
srt 맨 뒷자리를 예매하고 기분 좋게 좌석을 뒤로 젖혔다. 대각선으로 흰색 비숑이 보인다. 털이 풍성한 솜뭉치 같다. 얌전하게 앉아서 가는 게 귀엽다. 생머리를 엉덩이까지 기른 주인은 꾸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인조 손톱도 길고 화려하게 붙이고 딱 붙는 핑크색 레이스 스커트를 입었다. 뒤가 뚫린 굽 있는 베이지색 구두를 신었는데 발을 꺼내서 바닥에 놓고 있는데 굉장한 왕발이다. 화려한 손으로 흰털을 계속 쓰다듬고 이뻐해 준다.
서울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지하철을 타면 항상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지하철역 이름도 생소하고 그 안의 사람들의 말씨나 분위기도 다르다. 친구를 만나기까지 혼자만의 여행기분을 즐긴다. 누구와 같이 있으면 여행 온 장소와 사람을 충분히 즐기기 어려워서 아쉽다.
친구가 데려간 곳은 금련산역에 있는 파스타 집이다. 직원 한 명이 주문도 받고 요리도 하는 작은 파스타집이다. 우리는 라자냐를 먹고 싶었는데 하필 그 메뉴만 안된다고 했다. 트리플 오일 향이 나는 크림 파스타와 볼로네제 라구 파스타를 시켰다. 얇은 스파게티면이 아니라 약간 도톰한 면도 소스도 정말 맛있었다. 가격도 만 원 초반대로 가성비 좋은 곳이었다.
광안리에는 바다가 보이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다. 광안대교 하나 보이는 것뿐인데 상권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몰린다. 어쩌다 제주도 컨셉의 카페에 들어왔다. 광안대교가 보인다.
000 하고 000 하고 수원 인계동에서 7시에 저녁 먹을 건데 대리님 올래요? 하고 아이 메시지가 왔다. 나를 귀여워하는, 메신저로 친해진 과장이다. 따분할 때나 짜증 날 때나 메신저를 보내면 항상 얘기도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해준다. 고민이 있고 하면 오빠처럼 생각하며 언제든 자기에게 상담하라고 했다. 안 지 얼마 안 되는 사이이지만 진심인 것 같아 위로가 된다. 힘든 일이 있거나 험한 꼴을 당할 때 내편이 돼주는 오라버니 같은 동료들은 가끔 감동이 된다. 그는 저녁 먹자는 제안을 자주 한다. 여럿이 밥 먹고 술 마시고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누구랑 먹는데 같이 올래요? 하거나 오늘은 비가 오는데 소주 마셔야 하지 않냐, 하고. 한 다섯 번을 거절했는데 한 번은 먹어야 할 것 같다. 아니요, 저는 광안리예요! 하고 사진을 보냈다. 행궁동은 안 가요? 전 행궁동 가보고 싶은데. 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보냈더니 광안리에나 집중하라고 답장이 왔다.
하필 오늘따라 날이 쌀쌀했다. 추울 지경이었다. 평일 낮에 한가하게 바다를 보며 쉬다니,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 하며 멍해졌다. 20대 때 알던 친구를 만나니 내가 직장인인 것도 잊어버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여기가 부산이다. 평소라면 컴퓨터에 앉아 화면을 보고 있었을 텐데, 일상을 이렇게 벗어나는 것도 환기가 되고 좋다.
서울에 남자 친구가 있는 친구는 사정상 2년 간 남자 친구를 못 봤다고 하는데도 사랑과 믿음이 굳건해 보여서 신기했다. 너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을 텐데 그런 마음을 어떻게 해소할지. 남자 친구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믿는 친구의 마음과 건강해 보이는 관계가 좋아 보였다. 연인 간에 조금이라도 혐오하는 마음이 든다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
친구는 나와 사내연애를 하고 헤어졌던 그 사람에 대해 물었다. 새로운 여자 친구가 있다는데도 불필요하게 나에게 메신저를 보내며 말을 거는 게 여자 친구에게도 예의가 아니고 나에게도 예의가 아닌 나쁜 놈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불쾌한 마음은 남았다. 내가 그와 사귀었던 걸 아는 동료에게 그를 마주하고 그와 대화할 자신이 없다고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전달을 부탁했다. 친구는 자기 남자 친구가 전에 사귀던 여자에게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건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을 것 같다고 했다. 불요불급한 것도 아니고 내가 담당자인 건도 아닌데 어쭙잖게 대화를 시도한다는 게 역시나 가벼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영영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고 마주하지도 않을 거야. 사랑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외로워서 연락하고 장난으로 연락하고.. 나에게 상처 주고 결혼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 것에 대한 벌이야. 라고 했더니 친구는 그때는 그래도 사랑했겠지,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