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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Sep 26. 2022

행복하면 된거야

<린다의 가장 완벽한 5개월>, 제주일상

<The Pursuit of Love> bbcstudios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하고 항상 사랑을 갈망하며 본능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사는 린다. 린다는 자기가 낳은 아기도 나몰라라 한 채 사랑에 빠진 남자와 도망을 간다. 1930년대 영국, 여자는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맞아가며 자란 린다는 항상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며 몸부림친다. 파티에서 왕자님 같은 남자와 만나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지만 매력적인 공산주의자 크리스티안을 따라 도망가 혁명을 돕는다. 크리스티안이 라벤더라는 여자와 밀회하는 걸 본 린다는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또 파리에서 프랑스 귀족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보헤미안 같이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도 있어야 해.


나쁜 남자에 바람둥이란 걸 알지만 린다는 그 남자를 사랑한다. 아기를 가지면 위험한 몸인데도 그와 사랑에 빠져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낳다가 끝내 죽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린다는 죽으면서도 행복했을 거라고. 린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촌인 패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마음 가는 대로 살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 린다를 부러워한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고 19세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관습대로 뻔한 사는 삶을 사는 여자들은, 어린 나이에 선택한 남자와 아이에 발목 잡혀 평생을 지루하게 살 수 없어! 하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따라 떠난 여자들을 동경하고 질투한다. 돈 많은 귀족을 사랑하며 그가 준 돈으로 산 값비싼 옷과 장식으로 치장한 린다를 고상한 매춘부라 비아냥거려도 린다는 그를 사랑하기에 괜찮다. 기다림이 힘들지만 늘 사랑하는 남자의 전화를 기다린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전화가 온다. 정해진 양식에 얽매여 살고 지나치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나의 행복에 좋은 건 아니다.

괌에 가느라 탔던 티웨이 항공은 왓챠 플레이를 프리미엄으로 일정 기간 무료 감상하도록 해주는 쿠폰을 준다. 넷플릭스를 보다가 몇 년 만에 보게 된 왓챠 플레이로 <린다의 가장 완벽한 5개월>이라는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BBC 시리즈를 보았다. 린다로 나오는 릴리 제임스의 채도 높은 빨간 립스틱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배경의 옷을 입고 있을 테지만 요즘에 입어도 예쁠 색감과 디자인의 옷이 많다. 린다의 엄마가 입은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핏의 블라우스는 보라색 꽃으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너무 입고 싶다. 린다가 스페인으로 가면서 입은 털이 달린 코트도 정말 예쁘다.


출장으로 간 제주의 일상은 나쁘지 않다. 아침 출근길에는 구름에 싸인 몽롱한 풍경의 한라산이 보이고, 일하는 건물에서 종종 밖을 내다보면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가 보인다. 점심에는 보말 칼국수를, 저녁에는 제주 흑돼지에 한라산 소주를 마신다. 그리고 호텔방에 모여 제주 에일 맥주를 마시며 밤새 수다를 떤다.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술을 마시자고 하면 늘 거절당한 동료를 놀리느라 ‘1일 1 한라산.’ 하고 한라산 소주를 찍은 사진을 보낸다. 자기랑은 한 번도 안 마셔 주더니 거기서는 뭘 그리 마시냐고 했다. 의도했던 괴롭힘에 성공했다, 하고 나 홀로 흐뭇함을 느낀다. 내가 원하는 답으로 나를 맞춰준 것일 수도 있다. 늘 거절당함에도 내가 돌아오면 같이 한라산 소주를 마시고 싶다고 표현하는 행위에 상대와의 관계가 그런 말을 해도 괜찮고 문제될 것이 없는 사이라는 게 내재되어 있어서 좋다.

보말칼국수, 힐링되는 시원한 국물!
비빔국수와 멸치고기국수
몸국
제주흑돼지
에일맥주
전복죽
또 흑돼지
고등어, 돌광어, 은갈치회, 다해서 3만원
한치회덮밥
제주공항 근처 카페 고도정

새로 알게 된 동료도 마음에 든다. 순박한 대구 남자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3살이 어리다. 얘기를 나눠보니 또 그렇게 느껴진다. 자세히 보니 외모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첫인상에 왜 이렇게 나이가 많게 느껴졌지? “저는 대리님이 좋은 것 같아요. 솔직한 표정이 느껴져요. 순박한 것 같아요.”라고 하며 가끔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해도 되냐고 물었다. 내 말에 자기가 표정이 솔직하냐며 흠칫 놀랐다. 순박하다는 말에는 그냥 시골 사람 같은 거 아니냐며 웃었다. 나는 표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는 게 안 좋은 뜻이 아니라고 말했다. 좋다는 긍정적인 미소가 얼굴에 바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가식적인 면이 적고 진솔하면서도 날카롭거나 꼬인 구석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업무 협조도 잘될 것 같은 사람을 한 명 더 알게 돼서 좋다.


또 새로 정규직 전환을 앞둔 인턴을 알게 되었다. 20대 여자였는데 밝고 사람을 잘 챙기고 리액션이 좋았다. 상대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성의 있는 리액션을 하는데, 나를 일 년 넘게 지켜본 동료가 “여기 대리님은 그렇게 억지로 리액션 안 해 줘도 돼. 그런 거 오히려 안 좋아해.” 하고 말했다. 사람을 잘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그게 본모습이 아니라 잘 보이기 위한 모습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자기 있는 그대로의 매력과 본모습으로 사랑받는 게 더 건강한 것 같고 오래갈 수 있는 것 같다. 잘 보이려고 애써 노력하면 본인이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승진하고 변한다거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고 나서 변하는 사람을 보면 보기가 안 좋다.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 좋다. 나 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의도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떨 땐 나는 그들의 보여주기식 착한 행동의 수단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별로다.

손톱이 자라 깎고 싶은 걸 보니 어느덧 집에 갈 때가 됐다. 일주일 간 중단한 한약도 다시 먹어야 할 것 같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얼굴에 열이 계속 오르고 왼쪽 귀가 시원하게 들리지 않아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손목에 맥을 짚는 한의사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고 했다.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순간엔 귀가 먹먹해져 순간적으로 안 들리기도 한다. 비행기를 타면 두 귀가 멍멍해지다가 어느 순간 뚫리니, 차라리 비행기를 타면 해소가 되려나 했지만 역시나 똑같다.


바람은 불지만 제주는 따뜻했다. 김포로 돌아와 창밖을 본다. 7시에 가까운 시간, 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맑은 푸른빛 하늘에 인디핑크색 일몰의 흔적이 펼쳐진다. 그래, 내 일상의 일몰도 멋져.


그리고 마음 샌드는 사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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