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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Sep 18. 2018

평범하지 않지만 삐걱대지 않는

내 친구 에리코의 인생경로




칼국수 먹고 싶어!
 드라마 식샤에서 봤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어!




오랜만에 한국에 놀러 온 친구 에리코는 한국 음식과 한국 드라마를 사랑한다.


이번에도 한국에 놀러 온 목적은 심심함+음식이었다.


유학 중 옆 옆방에 살던 에리코는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쭉 예쁘다. 화장을 안 해도 화려한 얼굴에 단발부터 긴 머리까지 다 잘 어울린다. 누구나 얼굴에 약점이나 아쉬운 부분이 하나 이상 있기 마련인데 얼굴에 잡을 흠이 없으며 균형미 있다. 뛰어나게 예쁘면서 수수한 일본 영화배우 같다.

키가 크고 덩치가 제법 있지만 얼굴만 보면 몸에 비해 여리여리해 보인다. 사실 에리코는 한국인들 눈에도 한국인처럼 보여 한국 사람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한국말로 말을 걸고, 나 역시 처음엔 한국 사람인 줄 알았지만 계속 보니 일본 감성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일본의 전형적인 장면을 담은 영화 혹은 화장품 광고에서 막 튀어나온 배우 같다.


예쁜 사람에게 갖는 흔한 편견 중 하나가 깍쟁이 같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나 역시 에리코와 대화를 해보기 전까지는 깍쟁이 같을 것 같아 별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사실 사람들이 더 다가가기 힘든 캐릭터는 오히려 나다). 그런데 에리코는 깍쟁이가 아니라 말괄량이였다. 영어가 미숙해 잘 알아듣지 못해 항상 껄껄거렸고, 팔자걸음을 성큼성큼 걸었으며, 대식가였고, 소탈하고 헐렁했다. 같이 지내면 에리코의 말과 행동에 항상 웃음이 터져 분위기가 즐거웠다.






에리코는 알고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우리가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독특하고 특이한, 그러한 생각과 발언, 행동으로 주위를 싸하게 만드는 류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결코 아니다.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연스럽고 평범해 보인다.


"에리코, 그건 결혼반지야?"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물었다.

"아, 뭐 결혼반지라면 결혼반지! 사실 결혼반지를 딱히 안 했는데, 떨어져 있으니까 남편이 끼래서 그냥 네 번째에 아무거나 끼고 있어. 근데 난 원래 액세서리 안 좋아해서 다 빼버리고 싶어서 빼고 싶어."


에리코를 몇 년 만에 봤는데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고 하니 웨딩 사진을 보고 싶었다. 뭐, 주위에 결혼한 사람들은 국내외 할 것 없이 웨딩화보와 결혼사진을 올리니 에리코도 찍었으면 보여달라고 했다. 왠지 결혼식도 안 하고, 웨딩화보도 안 찍었을 것 같긴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결혼식, 사진 그런 거 돈 낭비이기도 하고, 별로 막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사실 우리 부모님도 닦달하는데, 난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아. 8년 정도 연애하다가 남편이 인도 주재원으로 가게 돼서, 가기 전에 결혼하자고 해서 한 것뿐이야. 설렘 뭐 결혼에 대한 로망 이런 거 없어! 8년이면 그냥 가족이지 뭐. 지금도 언제든지 원하면 이혼하는 거지 뭐!"


"아 요즘 일본에서 그런 거야? 일본인의 특성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거지? 나도 그런 생각 이해해. 나도 결혼식 축의금 문화에 반대하거든."


"맞아, 우리도 결혼하면 3000엔? 그 정도 내고 나도 친구들 결혼식마다 많이 냈어. 그치만 난 결혼식을 안 해서 못 받았지. 그래도 괜찮아!"



에리코는 우리로 치면 시댁 부모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나 보고 거의 안 본다고 한다. 자기네 부모님도 아닌데 굳이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 일을 하지 않지만 남편에게서 돈을 받지도 않는다. 인도에 가기 전 글로벌 브랜드 도쿄 지사 마케팅 팀에서 사무보조를 하며 모은 돈과 실업급여를 가지고 생활한다고 했다. 결혼 후 인도를 함께 갈 때도 인도에 있는 일본 회사 사무직에 지원해서 갔다고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공동 생활비 통장을 만들거나, 내 커리어를 포기하고 가는 거니까 남편의 돈을 받아도 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집안일의 의무에 얽매이고 싶지가 않아! 집안일을 하기 싫거든. 나도 집안일하는 사람을 돈 주고 고용하고 싶어!"


에리코는 여성의 권리 옹호랄지 어떤 신념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에리코는 사회에 대한 불만도, 비난의 감정도 없다. 에리코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만 발언이나 행동이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다. 보기에 편안하다. 남에게 질투심도 없고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아서 좋다.




에리코는 후쿠오카에서 사범대를 졸업했다. 그렇지만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유학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당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에리코에게(그 외 한국 노래나 한국 문화, 역사에는 무관심하다) 이따금씩 한글을 알려 주었고, 한국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쫄깃하긴 했지만 아무리 끓여도 밀가루 심지가 사라지지 않는 수제비도 잘 먹었다.


나는 에리코가 승무원의 이미지가 잘 맞는 것 같아 승무원을 해도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나의 아이디어가 우연히도 작동했는지, 에리코의 첫 직장은 한국 항공사의 후쿠오카 지상직 직원이 되었다. 그런데 에리코는 1년을 일하다 너무 힘들다며 그만두었고, 프리터족이 되었다. 빵집에서 일하기도 하고, 사무보조를 하기도 했다. 무역을 하는 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앞으로 어느 나라로 파견될지 모르므로 정규직으로 취업할 생각이 더더욱 없어졌다고 했다.


"나는 일 그만두고 돈이 다 떨어져 가서 걱정이었는데. 너는 별로 그런 것 없어?"


"응 정부에서 실업급여 세 달 동안 나오고 있고, 모아둔 것도 있고. 그런 게 뭐 걱정이겠어. 스포츠 용품 회사 보스가 다시 와서 일해도 된다고 했어. 거기 가서 또 일하면 되지. 뭐 최후의 수단으로 남편도 돈 벌고 있고. 다시 취업 준비해서 들어가는 건 으으 싫어."



에리코는 물욕도 별로 없어 보인다. 사진도 잘 찍지 않는다. 같이 길을 걸으며 이것저것 호기심이 생겨 살법도 한데 별로 관심이 없었고, 여행에도 10kg 이내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기내 캐리어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곧 남편이 인도에서 돌아오면 후쿠오카의 부모님 댁에서 도쿄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물건이 별로 없어 나를 것도 없다고 했다.


유학시절에도 보통 유학생들이 기본적으로 큰 캐리어 두 개, 큰 배낭 가득, 노트북 가방 등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는데, 아무리 그래도 6개월을 살 곳인데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온 에리코가 떠올랐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의 집처럼 방도 텅텅 비었다. 겉모습은 온갖 화려한 것, 명품을 좋아할 것 같고 고혹한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길 것 같은데 물욕이 없고 수수하다. 인생을 아등바등 부여잡지도, 큰 미련도 없어 보여 쿨하게 느껴진다.


인생 그저 흘러가는대로, 내 인생이니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서도 모나지 않게, 무던하게 어울려 살기.


 


 India? Only IT is good.
The other things? Terrible!



인도는 흔히 여행하며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인도는 어땠냐고 물었다.


에리코는 혀를 내두르며 힘들었다고 했다. 일본에도 그런 이유로 인도의 이미지가 생겼지만 절대 로망을 가지고 갈 곳이 아니라고 했다. 대기 오염 정도가 심해서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코가 더럽고 계속 재채기했고, 밖의 화장실은 도저히 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타지 마할에 가려면 세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도로포장이 안 되어 있어 계속 꿀렁거려 멀미로 고생했다고, 낮에는 너무 더워 돌아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인도 카레가 맛은 있지만 비위생적이어서 그런지 배탈이 자주 났고, 그 와중에 한국 식당이 많아 한국 음식으로 힐링을 했다고 했다. 콩국수를 먹어봤는데 별로 맛이 없었다고 했다.


나도 라오스처럼 못 사는 나라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라오스 역시 도로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꿀렁거렸지만, 시내 화장실은 깨끗했고 쌀국수와 팟타이 등 음식이 맛있었다고 했다. 다만 현금을 도둑맞았을 때도 그렇고, 평소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어서 안 좋다고 말했다.


에리코는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어도 안 좋은 나라가 있다고 했다. 인도는 신용카드, 체크카드뿐 아니라 모바일로도 결제할 수 있을 정도로 IT가 발달했지만 화장실이 최악이라고 했다.


"Only IT is good."


6개월 간의 인도에서의 생활을 이 한마디로 단호하게 묘사하는 에리코가 너무 웃겨 한참을 웃었다. 일본인 특유의 짧은 발음, 유학 시절보다 영어를 더 잘 이해하고 말하게 되었지만 완벽한 영어보다는 빙구미를 풍기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에리코, 짜증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귀여운 불평, 자신이 웃긴지 모르는 표정이 어우러져 한참을 웃었다.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에 한국 드라마를 하나 끝냈다며, 집에 돌아가면 또 심심할 테니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요즘 내가 재미있게 보고 있던 보이스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며 추천해주니, 들어봤다면서 관심을 보였다. 또 내가 요즘 보는 드라마가 뭐더라? 하고 생각하다 보니 미스터 션샤인이 떠올랐지만, 차마 미스터 션샤인을 추천해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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