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운명 같은 만남

치앙마이(7)

by 모네

요새 종종 소파와 하얀 침대 시트에 자꾸 꺼먼 먼지 뭉탱이가 흩날렸는데 천장에서 떨어진 건지 소파가 회색인데 여기서 일어난 먼지인지, 몇 번 툭툭 털다가 오늘은 너무 많이 나와서 보니 에어컨에서 무진장 나오고 있었다. 으악, 바로 에어컨을 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집 주변에서 열리는 노점상 아줌마 쏨땀을 사다 그릇에 막 옮겨 담은 참인데 검은 먼지가 여기에도 들어갔을까 봐 얼른 테이블을 옮겼다. 공부하러 나가는 길에 오피스에 에어컨에 대해 말하니 바로 고쳐주겠다 해서 얼마 정도 걸릴 거 같냐고 하니 지금 바로 확인해서 고쳐놓겠다고 했다.


4시간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부터 내 방에 누군가 있고 시끄럽게 소리가 나고 있다. 아 뭐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들어왔을 때 착 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사건 현장을 보니 베란다에 온갖 빨래를 잔뜩 널어놓은 빨래 건조대는 방 안에 들여져 있다. 오늘 햇빛이 좋아 짱짱하게 말리고 싶었는데 안 되겠구만. 아저씨 한 명은 화장대 의자에 앉아 있고 한 명은 에어컨을 통째로 뜯어 대공사를 하고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엄청나는데 물로 막 에어컨 안을 청소하는 거 같기도 한데 베란다 바닥에도 물이 흥건하다. 화장실 가고 싶었었는데 못 가겠네 이거. 손이라도 씻고 나가려고 화장실에 가는데 동공지진이 났다. 변기 안에 호수를 연결해서 변기물을 끌어다가 에어컨 안을 씻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악 이건 또 뭐야. 왠지 찝찝해! 내가 눈으로 보는 이게 맞나. 그렇게 손만 간단히 씻고 배낭에 아이패드와 공부한 짐을 뺀 채 가볍게 배낭을 메고 그랩을 불러 쇼핑몰로 향한다.



요즘 라부부 인가 하는 게 뉴스건 인스타건 자주 뜬다. 보니까 귀엽긴 해서 라부부, 하고 쳐보니 연예인들이 힘들게 구했다고 뉴스에 뜨기도 한다. 특히 고급스러운 태국 드레스를 입은 라부부 인형은 정말 귀여워서 소장욕구가 생긴다. 사람들은 뭐 크림에서 구했다 당근에서 구했다, 하는데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나는 태국에 있으니까 태국 배송 사이트에 검색해 보니 그 태국 드레스 라부부 인형은 1200바트 정도로 이 정도면 사겠다, 하고 내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비싸다. 그리고 정품인지도 모르겠고.


저번에 센트럴 페스티벌이라는 쇼핑몰 갔을 때 나는 피규어나 이런 걸 좋아하지 않아서 둘러보지 않았는데 구글맵에 보니 센트럴 페스티벌 안에 이거 정품을 파는 pop mart라는 곳이 있다. 그래서 언제 다시 쇼핑몰을 가게 되면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은 볼트에서 20% 바우처를 주길래 34바트, 약 15분 정도 타고서 쇼핑몰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같은 길이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그래도 두 번 타봤다고 덜 무섭다. 정확히 확인하진 않았지만 10분 정도 되어 도착한 느낌이다. 오토바이 뒤에 손으로 간단히 잡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시내에선 그냥 내 무릎에 손을 올리고 타는데 고속도로에서 너무 빠른 속도에 날라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손잡이를 잡고 왔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가서 손을 씻는데 화장실 가는 길에 마침 팝 마트가 보인다.



팝 마트는 들어가고 나가는 줄에 가드가 있고 큰 가방이나 이런 건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이런 쇼핑몰에서도 훔쳐가는 사람이 있나? 난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들어가도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들어가 보니 붐벼서 작은 걸 가방에 슥 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단 라부부라는 게 뭔지 찾아보자. 삐까뚱시 유튜브 보면 여행 오면 꼭 피규어 사고 이런 랜덤 뽑기를 사던데. 나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지도 않고 돈낭비라고 생각 들어서 굳이 상점에 들어가지 않는다. 근데 귀엽고 독특하고 그 나라에서만 살 수 있는 건 좋아한다.


아, 근데 라부부가 뭔지 도통 모르겠어서 두 바퀴를 돌다가 글씨를 보고 발견하였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던데 세 바퀴쯤 도니 캐릭터별 매력이 다른 것 같다. 일단 라부부 키링은 soldout이라고 쓰여있다. 키링인지도 잘 모르겠다. 작은 인형이었는데. 돌아보다가 하치푸푸라는 인형도 귀여워서 네이버에 검색해 본다. 하치푸푸 인형도 배송비 포함 5만 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와 여기서는 만 오천 원~2만 원인데 되게 붙여서 파네. 여기까지 온 김에 왠지 나를 위한 선물로 하나를 사고 싶다.



하치푸푸인형을 보는데 사랑스럽긴 한데 들어보니 가방에 메면 무거울 게 뻔하다. 포기하고 다른 걸 보니 좀 더 가볍고 가격도 100바트 저렴한 하치푸푸 키링이 있다. 근데 얘네는 왜 이리 표정이 울적해 보이는 거야. 나중에 돌아와서 챗지피티에 물어보니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박스에 태국어, 중국어로 쓰여있어서 중국인이 만든 건가 했는데 의외로 한국 작가였다.


랜덤 뽑기로 세줄로 채워져 있는데 그중에 맨 앞줄 꺼를 집었다가 왠지 더 고민하고 집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괜히 더 머물다가 결국 두 번째 줄에 있는 걸 집었다. 계산대 줄도 있고 여기 나름 인기가 많다. 키덜트들이 진짜 많구나. 애기들은 하나도 없고 다 2030이고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고 남녀 성비도 꽤 비슷하다. 처음 맛본 세계. 다들 랜덤박스를 집어서 흔들어서 귀에 소리를 대보고 있다. 그런다고 알려나. 나도 괜히 따라 해 보면서 결국 계산을 하러 간다. 계산을 해주면서 직원이 뜯어보고 망가졌으면 바꿔줄 건데 대신 비디오로 촬영하면서 뜯으라고 했다.


흠, 어디에 앉아서 뜯어봐야 하지. 주변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없고 나가는 출구 문이 있길래 나와서 나무 그늘 아래 얕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폭이 좁고 얕은 벤치 같은 역할을 하는가 보다. 비가 조금 왔는지 주변이 축축이 젖어있다. 비디오를 켜고 찍는데 이거 한 손으로 뜯으며 한 손으로 비디오를 어떻게 찍지? 결국 망가진 것이 아니어서 비디오를 지우려고 보는데 무슨 사건 25시 들이닥친 현장마냥 굉장히 급박해 보인다.


박스 안에 하늘색 비닐을 뜯는데, 와!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 나왔어! 하고 좋아하다가 박스를 살펴보니 12가지 종류에 시크릿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나온 모양이다. 비닐을 박스 안에 넣었다가 다시 보니 안에 카드 같은 게 있길래 봤는데 이 인형 이름은 scorpio라고 쓰여있다. 와? 스콜피오라고? 내가 전갈자리인데 어떻게 스콜피오가 나올 수가 있어! 이건 진짜 운명이야!!!! 하고 혼자 엄청난 흥분감을 마음속에서 표현하며 꽤 오래 행복감이 유지되었다. 가방에 바로 보라색 스콜피오를 매달면서, 니가 스콜피오구나! 전갈자리. 눈이 슬퍼보이는 나같이. 나의 분신 같아! 하면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인형을 보게 되는 나.



치앙마이에서 만난 두 번째 운명 역시 센트럴 페스티벌 쇼핑몰에서이다.


태풍 홍수 경보가 있던 기간에 비도 많이 오니까 쇼핑몰에 가볼까, 하고 처음 가본 그때. 와, 마야몰은 아무것도 아니네, 진짜 구경할 거 많다, 하고 휘둥그레져서 보다가 멀리 화장품 매장들이 보이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아워글래스(hourglass)가 있을까 해서다.


내가 팔로우하는 프랑스? 여자가 있는데 매번 되게 깊고 그윽해 보이는 레드립을 바르는데 너무 잘 어울리는 거다. 내가 예전에 한참 바르던 맥 립스틱 하고도 색이 비슷한데 항상 댓글에 립 어디 거냐는 질문에 아워글래스의 red0(레드제로) 매트 립스틱이라고 쓰여있었다. 와, 이건 기회 되면 꼭 발라봐야겠다. 하고 메모장에 적어놨는데 집 근처 백화점에는 아워글래스 매장이 없고, 출국할 때 보니 공항 면세점에도 없다. 치앙마이에 혹시 있을까 싶어 gpt에게 물어봤는데 없어서 포기했다. 그런데 아워글래스 매장이라니!!


매장에 가까워지니 너무 흥분되었다. 빨간색 커버의 레드제로가 바로 눈에 보였다. 직원이 다가오길래 테스트해볼 수 있냐고 하니 같은 색인데 제형이 새틴과 매트가 있다고 둘 다 발라보겠냐고 했다. 직원은 면봉에 덜어 각각 하나씩 주길래 하나는 윗입술 하나는 아랫입술에 발랐다. 와, 너무 예쁘잖아! 발림도 너무 부드럽게 발리고 색도 짙은 레드가 무겁게 앉으니 쉬크해 보인다. 작년엔 채도 쨍한 토마토 레드를 사고 싶었는데 마음에 드는 걸 못 찾았는데 이번엔 내가 원래 잘 바르던 짙은 레드다. 물론 한 번 바르면 되게 맑고 가벼운 레드가 된다 그냥 생기 주는 정도.


거울을 보는데 친한 여자 과장이 "과장님 그거 있는 색 같아요." 할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친다. 둘 다 T성향이 강해서 T적인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인데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쓴소리?를 잘하는데 서로 쓴소리로 느끼지 않아서 좋다. 예를 들면 치앙마이대학교에서 마야몰 방향으로 걸어오던 길거리에 새소리가 차소리를 뚫을 정도로 너무 시끄러워서 보니 전선 가득 새가 앉아 있는 거다. 너무 징그러워서 사진을 찍었었는데, 장난으로 혐오사진을 보낼 때 쓴다. 아무튼, 그 사진을 보고 하는 말이 '도시인데 왜 이리 새가 많냐, 개체수를 줄여야 할 것 같다'며 갑자기 새 개체수 우려에 관한 이야기로 전개되기 시작. 아니 개체수를 줄이라녀.


직원에게 아워글래스 매장이 치앙마이에 있는 줄 몰랐다고 하니, "오. 오늘 처음 문을 열었어요. 오늘 첫날, 첫 손님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와 한 달 동안 여기를 와보지 않다가 오늘 우연히 마음이 들어 처음 왔는데 사고 싶었던 브랜드가 처음 문을 열고 내가 첫 손님이라니, 이건 운명이다! 갑자기 또 너무 기뻐져 가지고 태국 와서 가장 큰 1500바트 소비를 하는 것임에도 이건 진짜 잘한 소비야! 하는 마음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직원은 첫 손님으로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도 되냐며 자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뭘 다다다다 찍는데, 나도 보내달라고 해서 보니 동영상이었다. 자기는 되게 초단위로 이쁜 척을 하는데 나는 계속 멀뚱하게 얼굴을 대고 있어서 웃기다.


아무튼 H라고 쓰여있는 빨간색 립스틱 커버도 영롱하고 미래적인 느낌에다가 색도 질감도 너무 마음에 든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거의 레드립 하면 나인데 레드립하면 나면서도 레드제로를 이제야 갖게 되다니. 검색해 보니 한국에서 인터넷 배송으로 사면 지금 사는 것보다 5천 원 정도 싸다. 대신 발라볼 수가 없으니 사기를 주저했을 것이고 아워글래스 있는 백화점 찾아가서 발라보는 것도 왕복 차비와 시간이 드니. 어쨌든 너무 기분이 좋고 의미도 배가 된다.


결국 며칠 후에 T인 과장에게 너무 운명적이었다고 스 토리를 말 하니 내가 자주 바르던 색깔과 비슷한 거 같다고 답이 와서,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할 게 살 때 머릿속에 휙 지나갔다고 했더니 서로 크크 거리면서. "아니 그래도 텍스쳐도 다르고 색깔도 약간씩 다 다르다구여!!!"

한달동인 하나하나 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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