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3) 라바트
라바트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감기기운으로 몸이 쓰러질듯해서 곧바로 약국에 갔다. 챗지피티에게 증상을 말하니 알려준 프랑스어로 화면을 캡처해서 보여줬는데 젊은 여자 약사는 잽싸게 약을 주더니 이게 좋다고 잘 들을 거라고 했다. 혹시 외국인이라 바가지를 쓸까 봐 학생이라 너무 비싼 약이 아니면 좋겠다고 한 줄 추가했었는데 19디르함 정도로 너무 착한 가격이었다. 네모난 종이 박스에 타미플루처럼 물에 타먹으면 오렌지 맛이 나는 봉투로 된 약이 몇 개 들어있는데 겉표지가 아랍어로 쓰여있어서 이국적이다. 아랍약도 잘 듣겠지. 반신반의하며,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에겐 이 약이 유일한 도움인데 잘 되겠지. 기대감을 가지고 약국을 나와 숙소가 있는 메디나로 향했다. 왼손엔 캐리어를 끌고, 오른손엔 핸드폰 지도를 본채로.
아랍약은 예전에 아부다비에서 위장이 쓰려서 사 먹었는데 너무 잘 들었었는데(이때 약이 너무 비쌌었던 기억에) 이번에도 약이 잘 듣는다. 다만 하루에 3번 먹으라는 약사의 말을 너무 잘 들어 코감기약 성분으로 졸린데 낮에 좀비처럼 헤롱한 채로 다녔다. 나중엔 며칠 더 저녁에만 먹고 자니 금방 나아졌다. 목, 코감기는 코로나 이후 더 오래가고 심각한데 이번엔 다행히 금방 나았다. 그래도 감기로 몽롱하고 기운 없는 기간에 여행한 곳은 좀 아쉽다.
나는 약을 한국에서 챙겨가기보다는 여행하다 현지에서 사 먹는 편인데,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도 약사들은 엘리트여서 그런지 영어를 잘 알아듣는다. 괜히 내가 설명을 잘 못해서 약을 잘못 주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현지어로 번역을 해서 보여주면 유창한 영어로 증상을 한번 더 되묻는다. 그렇게 최근 여행지에선 아부다비, 헝가리, 터키, 태국, 그리고 여기 모로코에서 약을 사서 먹어봤는데, 길거리 아무 데나 들어가도 약사들이 영어를 알아 들었다.
방에서 누워서 쉬고 싶지만 라바트에서의 이틀째, 그리고 마지막 밤을 그냥 흘러보기 아쉬워서 그렇게 축 늘어지며 걸어 보았다. 어제 한 번 메디나, 카스바 주변을 한 번 걸어봐서 길이 익숙해졌다. 작고 하얀 바닷가 집들을 흙색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카스바 주변에는 계단을 따라 커다란 야자수와 벤치가 잘 조성되어 있다. 저녁이 되자 현지인들도 일부 여행자들도 나와서 사진도 찍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사진 언덕을 따라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일몰을 보고 싶어 계속 그 방향을 따라 올라갔다. 코너를 도니 멀리 깊은 바다를 따라 해안가가 보이고 하얀색 낮은 집과 아랍 건물들을 배경으로 하늘이 점차 물들고 있다. 와, 아름답다, 하고 핸드폰을 들고 너도나도 사진을 찍고 있는 방향을 따라간다. 저녁이 되어 약간 쌀쌀해졌지만 약간씩 불어오는 바닷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아 청량하게 느껴진다. 니하오, 하고 가볍게 스카프를 두른 현지 여성이 활기찬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하며 지나갔다.
요 며칠 계속 비가 오다가 어제오늘 포근하고 맑은 날씨여서 구름도 흐리지 않고 쨍한 형광 주황색 일몰을 본다. 하루 종일 몽롱한 채로 걷다가 운좋게 일몰을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생겼다. 해는 바다 쪽이 아닌 바다에서 약간 안쪽에 있는 무덤가 위로 지기 시작했다. 일몰이 아니면 이곳이 무덤가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각자의 색깔과 크기와 모양을 가진 비석이 들쑥날쑥 세워져 있는 슈하다 묘지 위로 태양이 그토록 화려하게 색을 뽑아내면서 져간다. 무덤 바로 옆은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싶게 깊고 끝없어 보이는 대서양의 어두워진 깊은 바다에 파도가 친다.
힘 있게 작렬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다 지는 저 일몰은 지금 이 순간에 볼 수 있는 짧지만 은근히 긴 순간이다. 엄청나게 넓은 이 대지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수만 개의 비석, 그 험난하고 화려하고 또는 평범했던 각자의 여러 인생의 이야기와 소음을 한 번에 빨아들이고 사라지는 소용돌이 같다.
그래, 내가 죽어도 다시 해는 뜨고 진다.
셀수도 없이 초원을 꽉 채우고 있는 수만개의 무덤 위로 지는 태양을 보며 인간의 인생은 참으로 짧고 덧없으며 누구나 죽음의 순간은 닥친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갈길을 간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도 수십 년 수백 년 전 이곳에서 해가 지는 걸 봤었겠지. 이 아름다운 풍경을 저 멀리 신비로운 동양의 나라에서 온 내가, 지금은 바라보고 있구나. 어떻게든 순간의 일몰 사진을 예쁘게 담으려는 나를 포함한 여기 함께 서있는 인간들의 아주 피상적인 태도와 감상도 인간다움이고 인간의 입체적인 면모 중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삶과 죽음과 관계없이 법칙대로 흘러가는 대자연에게서 무관심과 엄숙함, 압도감, 그리고 무한함을 느낀다.
지평선 아래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 갔음을 흔적을 통해 소리치고, 하늘에서는 화려한 태양이 시각적으로 엄청난 굉음을 내뱉으며 양분되어 팽팽한 대결을 하다가 이내 모두 어둠 속에 사라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