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따식이가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 때 내 마음은 무너져버렸다. 나는 가족들 앞에서 크게 내색하지 못한 채, 마음 속으로 많이 울었다. 내 마음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어릴적 그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섭아~ 어여 와서 밥 무라~"라고 말씀하시며 내 이름을 불러주셨던 그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이제 내 눈 앞에는 마음이 소녀처럼 어려진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아저씨"라고 부르셨다.
"아저씨 저 차비 좀 줄소. 집에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예. 차비 좀 줄소. 예?"
할머니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애원하셨다. 나는 할머니 손에 만원짜리 지폐 한장을 쥐어드렸다. 할머니께서는 세종대왕의 얼굴을 보시고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환하게 웃으셨다.
"아이고 이 큰 돈을. 아저씨 고맙십니더. 아저씨 고맙십니더."
할머니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하셨다. 고작 만원 때문에......
내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나는 엉엉 울었다. 할매......당신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고작 만원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고작 만원 때문에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십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중에 내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내 머리를 스쳐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할머니께서 지난번에 내게 하신 그 말씀이 유언이 되는건가?"
말의 무게는 그 사람의 진정성에 있고, 말의 영향력은 그 사람이 베푼 은혜에 비례한다. 진정성이 없는 사람의 말은 무게가 없는 언어, 즉 허언이다. 무게가 없는 말은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 사람의 말은 구속력이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당연히 은혜를 갚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당연히 영향력도 더 커진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유언. 그것은 내게 얼마만큼의 무게감이 있을까? 얼마만큼의 구속력이 있을까? 아, 나는 그것을 계산할 수도 없다. 나는 할머니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고아원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 내게 착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물려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나는 크게 엇나갔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나를 주일학교로 데려가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입학금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이천만원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신혼집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나를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 어떤 일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할머니의 유언을 행하기로 결심했다. 손자로서 마지막까지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할머니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아셨을까?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이 말이 유언이 될 줄 미리 아신 것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내게 하셨다.
"일섭아, 네 아비를 부탁한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내게 부탁하셨다. 할머니의 유언은 나의 급소를 찔렀다. 내 마음은 너무 아팠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나를 괴롭힌 원수 아닌가? 할머니께서는 내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셨다. 나는 이 유언을 거부할 수 없다. 평생 이 유언은 내 삶을 구속하며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결국 항복했다.
"네 할머니, 제가 당신의 아들을 끝까지 책임질게요."
신학교 시절부터 그래왔듯이 나는 아버지의 병원비를 내었고, 주기적으로 아버지를 방문해 드시고 싶어하시는 음식을 사드렸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정신병원을 탈출하시면 아내와 함께 대구로 출동해 아버지를 붙잡아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다. 손자들은 할아버지를 만나면 손을 잡고 함께 걸었으며, 헤어질 때면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꼬옥 안아드렸다. 아들들이 태권도를 배운 뒤에는 할아버지 앞에서 태권도 품새 시범도 보여드렸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귀여워했다.
21년 4월 초 목요일 새벽, 갑자기 누군가 현관문을 계속 두드렸다. 인터폰 화면을 보니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캐리어가 보였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나는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고 계셨던 교회 전도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TV를 시청하고 계셨던 전도사님은 성도의 장난전화이거나 잘못 눌려진 전화라고 생각해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으셨고, 콜백도 하지 않으셨다.
아이들은 자고 있었고, 아내는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112로 전화해 경찰을 불렀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나는 가방을 메고 바깥으로 나갔다. 경찰은 우리에게 가족간에 벌어진 일이니 잘 해결하시라고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고모를 내 차에 태우고 대구로 향했다.
당시 아버지는 정신병원 원장과 정신병원 원장 가족이 운영하는 매점에 출처를 알 수 없는 500만원을 빚지고 있었다. 나는 대구에 계신 고모님께 전화드려 "절대 그 빚을 대신 갚아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동안 아버지의 빚을 갚거나 돈을 드릴 때마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구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고모에게 질문했다.
"아버지가 빚도 안 갚았는데 어떻게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내가 할머니 이름으로 나오는 보조금으로 갚았어."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고모에게 화를 냈다.
"내가 절대 갚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돈 안 갚았으면 이렇게 병원 탈출하는 일도 없었을텐데요."
"다른 고모들이 아버지를 너에게 보내자고 했어."
나는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아빠가 일산으로 올라오고 싶어했어요? 아니면 대구에 있고 싶은데 고모가 시켜서 올라온 거에요?"
"고모가 시켜서 올라왔다. 나는 대구에 있는 게 여러모로 좋다."
"아빠, 제가 신혼여행 다녀와서 둘째 고모와 고모부에게 찾아갔을 때 고모부가 저한테 배신자라고 말했어요. 엄마와 연락하고 지낸다고. 결혼식장에 데려왔다고. 그리고 결혼식 축의금까지 본인이 관리한다고 가져가셨어요. 그러니 아빠는 더이상 그 사람들 말 듣지 마세요. 아빠가 대구에 남고 싶으시면 대구에 계세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아버지와 고모는 그 때부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밤새워 운전하여 대구까지 가서 고모를 집 앞에 내려드리고, 아버지와 함께 국밥을 먹으러 갔다. 아버지는 아침이 되면 꼭 병원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하셨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일산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병원 재입원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얼마전 정신병원 수용인원에 관해 새로운 법이 적용되면서 대부분의 정신병원 입원병동이 과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다시 예전에 있었던 B병원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B병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외출이 자유로운 B병원을 가장 좋아하셨다.
2달 뒤 6월 초, 다가오는 주일에 교회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던 토요일 새벽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네. OOO님 보호자시죠? 여기 경북대병원입니다. 지금 수술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나는 대구에 계신 큰 고모에게 전화를 해서 일단 아버지를 부탁드렸다. 큰 고모는 감사하게도 동생인 아버지께 달려가 간병해주셨다. 나는 잠을 청한 뒤 밥을 든든히 먹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버지께서 성기를 절단하셨습니다."
"네??? 뭐라고요?"
"병원에서 출혈이 너무 심해 경북대 응급실로 바로 왔어요. 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빨리 봉합수술을 해야 해요."
대구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계속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 두뇌는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수술 및 치료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상처가 곪거나 썩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기도드리는 것도 힘에 겨워 그만두었다. 갑자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올랐다. 또다시 아버지로 인해 우리 가족이 부서질까 두려웠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대구로 내려가는 1시간 30분동안 '레미제라블'을 읽었다. 장발장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법정으로 달려가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장발장은 절망에 휩싸인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도 장발장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발장으로부터 '비싼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웠다.
아버지는 위험한 정신병원 출신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독방에 갇혀 특별히 관리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아버지를 자세히 보니 팔다리와 온 몸이 끈으로 포박당한 상태였다. 의료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였다. 나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B병원 입원치료와 경북대 응급실 치료를 반복해서 받으셨다. 아버지께서 응급실로 가실 때마다 나는 대구로 내려가야만 했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가 아버지 상태를 확인한 뒤에 다시 새벽기차를 타고 일산으로 올라와 출근했다. 부족한 잠은 기차역 대기실과 기차 안에서 대충 해결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상처가 까맣게 썩어들어갔다. 나는 고름을 제거하기 위해 의료용 거머리까지 20만원 주고 사서 병원 냉장고에 넣어두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북대 병원에서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화상전문병원 밖에 남지 않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일단 아버지를 경북대병원에서 퇴원시켜 B병원에 모셨다. 퇴원하는 과정에서 용이가 많이 도와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나는 B병원에 아버지의 치료를 부탁한 뒤 일산으로 올라가 근방의 병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산에서는 아버지를 치료할 마땅한 병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산에 있는 정신병원까지 알아보았으나, 진짜 고위험군 정신병환자인 아버지를 받아주는 진짜 정신병원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일산집 근처에 있는 원룸을 임대해 아버지를 모실까 고민해보았지만, 주변사람들이 만류했다.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본인이 꼭 대구에 남아있고 싶다고 말씀하시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다.
얼마 후 아버지께 전화드리니 상처가 치료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성경에서 읽었던 그 기적을 실제로 경험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려드렸다. 앞으로의 아버지 인생에 몸을 자해하는 일이 다시는 없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