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다. 한 분은 나를 낳아주는 어머니, 다른 한 분은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이다.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에게는 나 말고도 또 다른 아들이 있다. 나는 그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성인이 된 이후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불가피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두 어머니 중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두 분의 어머니는 공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두 어머니의 우선순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내가 우선순위였고,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인 아버지가 우선순위였다. 사람은 어릴 때 음식을 차려준 손길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할머니께서 끼니 때마다 차려주신 그 밥상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반찬은 주로 구운 김, 무말랭이, 멸치, 쥐포 같은 것들이었고, 때때로 미역국, 된장찌개 같은 국물류가 나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반찬은 사실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할머니께서는 바쁘실 때 또는 집에 반찬거리가 하나도 없을 때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에 밥 말아먹어라"
그럴 때마다 나는 "네!"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그러하겠지만, 나도 밥 먹기가 귀찮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빨리 밥을 먹고 나가서 오락실에 가거나,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었다. 바로 그럴 때 밥에 보리차를 부어 말아먹으면 정말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가서 놀 수 있다. 나는 아들들에게 이 이야기를 몇 번 해준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아들들은 아빠를 불쌍하게 쳐다보면서 말한다.
"아빠는 참 가난했구나."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편식 좀 하지 마."
할머니는 오갈 데 없는 손자를 받아주신 고마운 은인 아닌가? 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우선순위가 아버지인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나를 낳아주는 어머니께서도 나의 결심을 눈치채셨고, 우리는 서로에게 선을 그었다. 친어머니는 내게 실망하셨는지 어느 순간부터 내 연락을 받지 않으셨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 23년 봄에 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신분증, 도장, 인감증명서 좀 보내라. 내 좀 쓰고 다시 보내줄게."
몇 년만에 어머니로부터 온 메시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 머리는 온갖 가정과 상상으로 꽉 차서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몹시 슬펐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어머니를 믿고 싶었고, 도와드리고 싶었다. 내 심정 같아선 바로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내 이성의 끈이 끝가지 나를 붙잡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
"뭐 때문에 인감증명서까지 필요하세요?"
"네 이름으로 가입한 내 보험이 하나 있는데 계약 변경 좀 하려고......"
"아 그러세요? 그럼 제가 어머니 이름으로 계약자 변경해드릴게요."
"응. 그래. 고맙다."
나는 아침 일찍 시간을 내어 삼성생명 빌딩으로 갔다. 보험상담사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셨고, 모든 업무를 신속정확하게 처리해주셨다. 마지막으로 보험상담사 선생님은 몇가지 확인차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셨다.
"OOO님, 정보 확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계약 사항을 변경하길 원하세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네? 사망시 보험금 수령자 변경이요? 지금 아드님으로 되어 있는데......"
보험상담사 선생님은 약간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 선생님은 아들인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신중히 결정하세요.'
보험상담사 선생님은 내게 다시 질문하셨다.
"정말 계약자 변경하시겠어요?"
"네. 변경해주세요."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 돈은 어머니 돈이지, 내 돈이 아니다.'
아내는 그 날 하루종일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