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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Aug 22. 2024

결혼, 할 수 있을까?

  결혼날이 다가올수록 돈 걱정 때문에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당장 나에게 꼭 필요한 비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스튜디오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 대략 250만원 

  2. 신혼여행 : 대략 400만원

  3. 신혼집 : ????만원


  나는 내 맘에 쏙 드는 여자를 찾았다. 하나님께서 이 자매를 내게 주셨다는 확신도 강하게 들었다. 나는 무조건 결혼하고 싶었다. 마치 기적처럼 내 짝을 찾아냈다는 기쁨, 결혼에 대한 설렘, 현재의 행복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데 내 재산은 포르테 차량 한 대가 전부였다. 모아둔 돈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빈털털이였다. 정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내가 결혼을 약속해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결혼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나님께서 내 옆으로 내 아내를 데려다 놓으셨으니 왠지 결혼식까지는 책임져 주실 것 같았다.

   

  스튜디오촬영날이 다가왔다. 아내에게 문자와 왔다. 

  "OO월 OO일까지 스튜디오 계좌로 OOO원 입금 부탁해요."

  눈 앞이 하얘졌다. 급할 때 내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다행히 한 명 있었다. 용이. 나는 용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용아, 나 곧 결혼해."

  "응. 섭아 축하해." 

  "진짜 미안한데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얼마 정도?"

  "한 300만원 정도......"

  "아......힘들 것 같은데......내가 한 번 만들어볼게."

  "정말 고맙다. 친구야."


  전화를 받았을 때 용이는 통장에 딱 300만원이 남아있었고, 그 돈은 업무상 꼭 필요한 기계를 사야 하는 돈이었다. 그런데 용이는 그 기계를 포기하고,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용이는 얼마 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 기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업을 원하는 지인이 사려고 했던 기계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짧은 시기에 서로에게 기적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나님이 용이의 선한 마음을 아시고 선물을 주신 것만 같았다. 용이는 내게 그 누구보다 고마운 친구다.


  어느날 아내에게 또 문자가 왔다.

  "OO월 OO일까지 신혼여행비 입금부탁해요."


  송약사님과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내가 책 내용을 요약하고, 나눔 질문을 준비해오면 송약사님은 맛있는 커피를 사주시곤 했다. 나는 모임 때마다 돈 걱정이 들면 송약사님께 이렇게 부탁하곤 했다.

 

  "약사님 저 결혼해야 하는데, 돈이 정말 하나도 없어요. 한 1000만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일해서 최대한 빨리 갚을게요."

  "알겠어요. 그런데 1000만원은 좀 힘들 것 같구요. 500만원은 빌려드릴 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그 때가 왔다. 나는 송약사님께 500만원 대출을 부탁드렸다. 송약사님은 휴대폰을 몇 번 만지시더니 순식간에 500만원을 이체해주셨다. 순식간에 기적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송약사님, 덕분에 신혼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신혼집을 구할 차례였다. 나는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가족이 없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셨고,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계셨고, 어머니는 결혼에 반대하셨다. 혹시 할머니께서 내 결혼을 위해 준비하신 유산이 있는지 궁금해서 난 첫째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 안녕하세요." 

  "어, 일섭아. 왠일이고?"

  "저 내년 2월에 결혼해요."

  "섭아. 축하한데이~"

  "근데, 고모 혹시 할머니께서 제 결혼을 위해 남겨두신 돈이 있을까요?"

  "어. 일섭아 이천만원 있다. 계좌번호 보내봐라. 어여 보내줄게."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모."


  고모는 몇 시간 후에 내 통장에 이천만원을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내 얼굴을 알아보셨고, 나와 짧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할머니께 효도할 수 있는 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세 번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신 분은 바로 할머니였다.


  첫번째, 1987년 부모님이 나를 버렸을 때 58세의 할머니께서는 여섯 살의 손자를 거두어들이셨다. 할머니의 정성어린 사랑을 받아 여섯 살의 손자는 스물 네살의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할머니는 내게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분이셨다. 요즘 들어 할머니를 생각할 때 나는 이상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 할머니는 내게 정말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대신 늘 내게 "섭아, 할매는 널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 감사해요. 할머니를 만난 건 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었어요. 저는 할머니의 열매에요.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 할머니와 두 손 꼬옥 잡고 오래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두번째, 서울대 합격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등록하지 못할 때 76세의 할머니께서는 꼬깃꼬깃 숨겨두신 비자금 300만원을 꺼내주셨다. 아버지는 그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지만, 할머니께서는 손자인 나에게 주셨다. 할머니는 내가 서울에서 새출발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나는 입학금 이상을 가족들에게 바라지 않았다. 나머지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귀한 300만원을 헛되게 쓸 수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나의 서울대 합격과 우수한 성적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할머니를 칭찬하고 부러워하게 했다. 심지어 새벽 기도시간에는 목사님께서 공개적으로 할머니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이렇게나마 내가 효도할 수 있었음에 나는 정말 감사하다.


  세번째는 결혼날짜는 잡혔는데 돈이 없어 신혼집을 구하지 못할 때 81세의 할머니께서는 큰 고모를 통해 내게 이천만원을 전달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도움 덕분에 원룸을 벗어나 3200만원짜리 전셋집에서 신혼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내 아내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을 구했냐며 좋아했다. 그 신혼집에는 깨가 쏟아졌으며, 첫째 아들 예성이가 태어났다. 비록 전세 3200만원짜리 누추한 집에 불과했지만, 거기서 살았던 때를 떠올리면 행복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할당된 미션을 간신히 완수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었다. 내 결혼식에 숨겨진 히든 퀘스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이었다. 내가 알기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이혼 후 약 25년동안 한 번도 만나신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의 이훈 후 매일 술을 드시다가 알콜에 중독되었고, 결국에는 조현병에까지 걸렸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만난 후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폭발하시면 어떡하지? 과연 아버지께서 결혼식내내 조용히 앉아계실 수 있으실까?"


  최악의 경우 결혼식이 중단될 수도 있는 큰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만약 이런 일로 결혼이 취소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결혼생활 중에 분명히 사고는 터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사고칠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나는 평생 아버지가 술 마시고, 때리고, 도박하고, 사기당하고, 자해하고, 자살시도하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계산했을 때, 내 결혼식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고 폭발해서 싸우거나 자해를 시도할 확률은 20% 내외였다. 나는 그 불행한 20%의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나는 80%의 행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결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신감으로충만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행복해서 도무지 나쁜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결혼식 전 마지막 약국근무를 마치고 나는 부천에 있는 처갓집으로 갔다. 아침 일찍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강남에 있는 미용실로 가야 했으므로 한 곳에 모여 있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원주에서 부천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몸이 이상했다. 운전하는 내내 머리는 아팠고, 눈꺼풀은 자꾸 내려오고,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이러다 곧 사고가 날 것 같아 문막휴게소로 들어가 아내에게 문자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문막휴게소에서 30분만 자고 갈게."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결혼비용 마련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결혼식장 문앞에 다다른 나는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탈진해버렸다. 아내는 이때 처음으로 남편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생겼었다고 말했다. 나는 신혼여행 중에도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잤다. 아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마치 환자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 때 아내는 "남편을 부실한 놈으로 잘못 고른 게 아닌가?"라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6개원간 결혼 반대와 재정 부족으로 인해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풀어지면서 내 몸도 동시에 힘이 풀려버렸던 것 같다.

  

  결혼식장에는 가족들, 친구들, 양쪽 교회성도들, 직장동료들이 많이 오셔서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옆자리에 앉으셨지만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조마조마했다. 원주교회 조집사님께서는 결혼당사자인 나 이상으로 걱정이 되셨나보다. 조집사님께서는 결혼식장에 오셔서 인사하신 후 어딘가로 사라지셨다. 아마도 조집사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무탈하게 결혼식 행사를 마치실 수 있도록 기도하러 가신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고마운 분이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내가 결혼식의 (서브)주인공인 신랑이 되는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곳에 모여 같이 앉아 계신 것도, 1시간 30분이나 걸린 결혼식 내내 아버지께서 마음의 울분을 참아내신 것도, 모두 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마냥 행복했다. 신혼여행지 태국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보는 태국이었지만, 사실 내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와 아내 단둘이, 그것도 방해하는 사람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신혼여행이요."


 사실 첫째가 태어날 때도 엄청 행복했었지만, 그것도 결혼을 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결혼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사랑이자 반드시 내가 이루고 싶었던 사명이었다.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불가능해보였던 목표를 이룬 성취감을 느꼈는데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인생의 보석인 아내는 나에게 금두꺼비 같은 두 보물까지 안겨주었다. 임신해서 아내의 배가 만삭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첫째가 태어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물론 지금도 나에게 아이 같은 면이 많다. 남편이 이렇게까지 부족한 줄 알았었더라면 아마 아내는 나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부족한 나와 결혼해 준 아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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