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 나는 계곡의 지류에 따라 위치한 수목원 내에 있는 카페에 앉았다. 지역 언론에서 시민기자 일을 하며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곳의 주인장이 처음 수목원 운영을 밝히고, 그 길을 답사하며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지역의 명소가 됐다.
단연 으뜸은 400여종이 넘는 수국류였다. 팜파이스의 흩날림에 사진 찍기도 좋아, 꽃을 좋아하는 사람, 자연에 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곳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카페에 앉아 창문을 두드리다 훌쩍 날아가는 여린 새의 날갯짓을 훔쳐보다 어린 시절 기억을 불러왔다.
입안에 쌉싸름하게 번져오는 커피 향과 목을 넘기는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는 것만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따뜻한 햇살이 논밭을 비추고 있었다. 마을의 입구에 신작로가 나오고, 할머니 손에 이끌려 길을 걷는, 여섯살 첫째 아이만한 때의 일이었다. 모내기한 어린싹이 잠잠한 논물에 잠겨 여린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길을 걷는 것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눈으로 닿는 촉각이란 무엇이었을까.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할머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 품세에서 바람은 알맞게 길을 이끌어 주었다. 그 부드러운 촉감의 말들, 할머니와 함께 밟았던 논둑길의 거친 촉감이 왜 이토록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그때 그 길에서 무엇을 상상했을까.
감촉의 너머를 쫓다 보니 언제가 마을에서 봤던 비닐하우스가 연상되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꽈리고추, 오이고추, 청양고추가 심겨 있었고 그 옆으로는 호박이 덩굴을 땅을 지지대 삼아 펼쳐져 있었다. 작물들이 숨을 쉬며 내뱉는 향기가 발등을 타고 올랐다. 바깥에 이따금 오가는 못돼 먹은 까치가 괜히 비닐을 한번 툭 치고 지나갔다. 황혼이 짙게 깔리면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가 피로에 노곤한 몸을 마사지 해주는 듯했다.
다시 돌아와서, 한동안 논두렁을 따라 걸었다. 꼭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이 아니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둘러보면 논밭이니 길은 무던히 뻗어 있는 까닭에 소탈 없이 걸었다. 풀이 바스락거렸고, 귀는 트랙터 소리를 쫓았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냇가를 전진하며, 가재를 잡네, 다슬기를 잡는다고 하며 냇가의 돌을 뒤적였던 촉감이 손끝에서 찌르르 울럈다. 그리운 것들, 개천은 공사가 됐고, 흙길은 시멘트로, 아스팔트로 새롭게 단장한 사이 나는 무던히 나이만 먹은 것 같았다. 작은 벌레 소리는 예전 같지 않았고, 드론이 농약을 살포하는 장면은 썩 볼만한 풍경이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풀잎을 마냥 손끝으로 문지르던 그 시절이 애달팠다.
경운기 엔진이 내는 소리에 맞춰 둔탁한 땅이 갈리고, 흙은 경직된 몸을 탈탈 털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는 듯 보드라워졌다. 여기에는 어떤 생이 또 걷어 올려질까. 한해를 잘 부탁해, 아니 한 철을 잘 보듬어달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경운기의 진동은 생의 부름 같았고, 그 떨림을 온몸으로 안았다. 두렵고도 무서운 미래, 어쩌면 거칠 것이 없이 전진하고 또 뒤돌아서며 할머니를 놀렸던 어린 날의 나를 나는 불혹이 넘어서면 너무 많이 밀쳐냈는지도 모르겠다. 그 촉감을, 그 소리를, 더 나아가 그 풍경을 부정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물속에 손을 넣고 작은 돌멩이를 뒤집어가며 가재를 찾던 순간들. 가재를 발견했을 때의 그 흥분감과 손끝에 느껴지던 가재의 날카로운 집게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하다. 며칠 전 이제는 보기도 힘든 가재를 아들에게 잡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 흔한 것이 다 어디로 가서, 한참을 헤매다 겨우 체면치레 할 수 있었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되었다고 말해야만 할까. 그 민망함을 적이 누른 것은 아들의 웃음소리였다. 그 옛날 사촌 동생들의 웃음소리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잊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리운 것이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서 흘러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무엇을 상상하는 것일까. 카페는 늘 들리는 것이 아니지만, 한 번쯤, 꽃이 필 때면, 축제가 열릴 때면, 쥔장의 페이스북에 소식이 올라올 때면, 가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찾아오지만, 또 떠날 것을 염두에 둔다. 나는 빌려둔 시간에 보은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갚아야 할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채권과 채무의 사이를 늘 종횡무진하며 자연에 산다. 시골에 산다. 마을에 산다.
그때와는 다른 내가 서 있는 최초의 시간, 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다시 풍경을 걸었다. 어린 시절의 노스탤지어에 인사하며 깊이 스며드는 마음을 안고 말이다. 내 두 아들에게도 이런 감각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