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현산면에 있는 새하늘지역아동센터에서 '해남청년이 간다' 첫 번째 공연을 했다. 2018년 11월 12일의 공연이 기획된 맥락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공연의 취지는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스스로 무대를 만들어 보자는 것에 있었다. 먼저 각자의 사비를 모아보니, 이백만원 정도의 금액이 모아졌다.
"잘 사는게 뭘까요?"
새하늘지역아동센터 2층 다목적실에 모인 150여명의 지역 주민들에게 물었다. 주민들은 아마도 의아해 했을 것이다. 코어 멤버 세명의 특성과 자질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국악청년, 글 쓰는 청년, 풍물패 운영을 꿈꾸는 청년의 의기 투합이 이 날의 국악공연 놀이마당을 만들었다. 지역민들은 이 질문을 청년들에게 받을 것이라고 상상했을까.
솔직히 질문은 청년 셋이 지역살이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해마다 새롭게, 나와 타인에게 물어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정해진 답은 없었다. '잘'이라는 말을 매끄럽게 이어 '산다'로 붙이고 싶은 욕망은 세대를 막론하고 가슴속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부터 정말 잘 살고 싶고, 삶의 현장에서 감사와 재미를 찾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역민을 향한 봉사, 희생, 애향심 같은 추상적인 말로 애써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귀향한 청년들에게 따라붙는 '도시 생활의 낙오자', '열패자'같은 낱말의 멍애에 벗어나고 싶었다. 흔한 편견인 농삿일이나 어촌업에 종사하기 위해 귀향했다는 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도시만큼 다양한 청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삶에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확장하여 마을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맥락에서 잘 사는 것의 첫번째 답으로 생각한 것이 '더하기'였다. 공연 제목은 그런 맥락에서 지어졌다.
살아가는 데 기운을 빼는 말이 있었다. '더하기'는 그런 말에 하나씩 기운을 불어넣겠다는 반동이었다. 물리학에서 가장 흔하게 배우는 힘의 법칙에 깃든 공식이기도 했다. 세계가 밀치니 나도 밀쳐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밀침을 당한 만큼 딱 그만한 힘으로 세계에 맞서 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었다. 인구절벽이라는 뉘앙스에 갇혀, 부족한 청년, 부족한 일자리, 출산율 저하 등으로 대변되는 지역 청년이 아니라, 여기서 살고 있는 주체라고 말하고 싶었다.
"늘 그런거야. 너만 힘든 것 아니야. 세상의 당연한 법칙이야. 다 그렇게 저렇게 사는데 왜 너만 별나냐?"
흔하게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절대로 수긍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같아서도 안된다. 별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따라서 우리는 별나야만 하는 것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되고 싶었다. 개천을 진흙탕으로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때론 물속에 안착한 흙과 모래가 본래의 자리에서 이소하기를 꿈꿨다. 짓이겨지더라도,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굳어진 삶에 균열을 가할 것이라 믿었다. 흐르지 않는 물이 결국 부패하는 것 아니겠는가. 주위의 힐난이나 걱정은 내 몫이 아니었다. 세상이 별난데, 별나지 않아야 한다는 당신의 말을 내 믿음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다목적실에 모인 지역민들을 보며, 우리의 첫 무대가 시작된다는 점에 가슴이 설랬다. 이후 이 '해남청년이 간다'는 우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무려 7회차 정도의 공연을 매회 하게됐다. 공연의 막은 늘 새로웠고, 우리의 청년기를 멋지게 장식해주었다.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전히 진행형인 이야기를 향한 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그날, 우리의 의지는 여전히 생동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