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시작한 일이 있다. 단톡방을 통해 나는 함께 지역에서 대화 마당을 꾸려갈 동료들에게 제안했다. 조금은 버겁더라도 서로를 좀 더 알기 위해 Self-Assessment(자기평가)를 해보자고 했다. ‘기술 및 지식, 리더십 및 협력, 목표 설정 및 달성, 자기 계발 및 학습,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킹, 시간 관리’라는 소주제에 알맞은 질문을 고르고 스스로 답을 해보고, 동료들과 공유해보자는 것이었다.
지역에서 살면서, 담장 너머의 큰 이야기는 매우 쉽게 하면서, 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웃에 대해 입을 다물었는가. 마을의 외적 자원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나게 관심을 가졌으면서, 왜 정작 마을의 사람들 한명과 다른 한명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일까. 개인 자산의 목록화를 통해, 잃어버린 ‘바람’을 구술하고 싶었다.
대화는 그 ‘바람’부터 귀를 기울이는 자세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원론적이거나 추상적인 말의 되돌이표를 쫓는 것이 아닌, 개인 삶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함께 그려나가는 것이 지역에서 ‘대화’하는 방식이지 않을까. 나는 마땅히 대화 마당은 포럼이나 공청회 형식이 아닌 ‘개인’인 지역주민의 관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어 선택은 늘 ‘공동체’이지만 그 속과 관련함에는 개개인이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아는 ‘다양성’의 시각에서 그 ‘공동체’를 향유하는 청년세대의 의미는 그의 자원 목록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파커 J.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통해 뻔뻔스러움과 겸손함에 대한 말의 가치를 설파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의견의 발언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뻔뻔스러움과 내 의견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수용하는 겸손함이 민주주의의 공론장에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 다리 걸치면 아는 지역사회에서 그 뻔뻔스러움은 되려 부도덕한 것이었고, 여기에서 개인은 철저히 강한 벽에 부딪힘으로써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 세상은 개인주의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지역은 그보다 더, 개인 증발의 시대라 말하고 싶은 이유이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윗세대의 권위로 말미암아 혹은 기득권의 담론장에 의해 억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청년의 지역살이에서 맺는 청년 담론의 실종은 필연적이다. 어디 청년뿐이겠는가.
1인 가구, 비혼주의, 다문화, 독거, 장애 등에 함유된 여러 가족 형태의 ‘돌봄’의 문제 역시 주류적 의견에 떠밀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지역에서 진짜로 고민해야 할 문제, 절박성은 사라지고 또 하나의 콘크리트 건물만 무성하게 쌓아 올려질 뿐이다. 한때 유행했던 체험관이 유휴공간으로 분류된 지금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연습이 필요했다. 일상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발적 결사체의 힘을 신뢰해야 한다는 파머의 말처럼, 지역의 자발적 결사체를 키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개인을 아는 것이지 않을까. 또한 그에 맞추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파머는 '로버트의 규칙'에 따라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모습을 빗대어 ‘시민권 연습’이라 표현했는데, 나는 조금 변용하여 ‘주민권 연습’이라고 칭하고 싶다. 서로의 요구에 귀 기울여 분명하게 듣고 말하는 절차적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우리는 외부 세계에 겁먹지 말고,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개인의 무기부터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