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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an 14. 2022

일방의 역사 (1) 홧홧하고 소중했던 그것을

2010


그때까지의 나에게 연애란 빼빼로 데이와 같은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는 이 흐름에 배제되지 않고 싶어 잘생기고 키 큰 친구 한 명을 나의 짝사랑 남으로 지정, 철마다 편지를 쓰거나 초콜릿 같은 것들을 챙겨주었다. 아직 키가 한참 작았던 남자애들과 사귀는 여자애들을 구경하며 이성 간의 스스럼없는 모습을 부러워했던 것 같다.


연애를 통해 사교계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하던 찰나, 춤과 관심이 좋아 들어간 동아리에서 춤보다 누군가를 훨씬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 어떤 전후 맥락도 개연성도 없이 차에 치인 것처럼 황당해하며 사고 현장만을 1초 단위로 블랙박스마냥 뇌리에 강제 저장할 뿐이었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그 애의 모습, 별로 잘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세상 멋졌던 축구 경기, 친구들이 쥐여준 드림 콘서트 티켓, 그 아이와 함께하게 된 커플 댄스 따위가 주는 홧홧하고 소중한 마음은 충격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 아이를 통해 경험한 ‘좋음’이란 이전까지의 ‘좋음’과는 질이나 정도가 아닌, 차원에 어떤 차이가 있어 하루하루의 시작부터 마감까지 어지럽지 않은 틈이 없었다.


중학생의 나는 정자동 네이버 건물에 갇혀서 웹툰을 그리고 있다는 모 웹툰 작가에 떠들어대다가 선생님께 스마트폰을 뺏기기도 했다. 입을 비쭉이며 투박한 투지 핸드폰을 들고 다니던 어느 날 내 실력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좋아하는 아이가 있니?'


이다음에 내가 보내는 답장 문자들이 내 생애 최초의 고백이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내 의지로 알릴 기회도 없이 고백을 유도당한 뒤에는 '알겠으니 못 들은 거로 하겠다’는, 어쩌면 그 애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었다.


며칠 뒤 나는 그 문자가 전체 쪽지였다는 사실을, 몇 달 뒤에는 예쁘장하고 붙임성이 좋은 내 친구와 그 아이가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몇 년 뒤에는 그 아이가 내 친구에게 차이고도 여전히 일편단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3~2014


그는 기타를 치지만 그다지 잘생기지는 않은 교회 조장 중 한 명이었다. 고3 모임의 조장과 수능을 마친 후 어디에든 열정을 불태우던 학생은 코드가 꽤 잘 맞았다. 조장님은 말수가 적으면서 어떤 구석은 특이한 나의 농담에 큰 소리로 웃어주었고,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들과 인생의 쉽지 않았던 순간들에 이야기해주며 내가 꽤 괜찮은 어른을 알았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기대감에 찼던 것과는 달리 스무 살의 햇볕은 따뜻하기보다 날이 서 있어 내 인생을 푹푹 찔러댔다. 나는 이 아픔을 누군가에게 수시로 털어놓고 다니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은 상태를 견디고 있었다. 오빠는 슬픔을 광고하며 주변인들을 쉬이 지치게 하는 나의 연락을 잘 받아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우리 학교까지 찾아와 샤부샤부도 사주고, 던킨도너츠에서 음료도 사주고, 그렇게 나를 달래서 오후 수업에 집어 넣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 이상의 느낌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을 명확하게 인지한 건 그가 입대한 후였던 것 같다. 매일같이 시간 단위의 통화를 하고 이게 커플이 아니면 뭔가 싶은 간질거리는 멘트도 날렸다. 전화를 끊고 나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이 사이가 어떤 사이로 발전될 것인지 얼굴이 빨개지도록 설렘을 나눴다. 또래의 선후배들과 말을 쉬이 놓지 못하는 나에게 그가 오빠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내 마음이 받아들여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주. 매일 하던 전화가 갑작스레 2주간 오지 않았다. 군인이 전화를 걸면 길고 이상한 번호로 전화가 오고 직접 연락을 할 수는 없었던 때였으므로 기다리는 것 외의 방법은 없었다. 그 2주간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억지로 삭제한 듯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영겁의 2주 후 우리의 마지막 통화 내용은 세세하게 기억한다.


그러니까 교보문고에 가서 이것저것을 구매하고 아이스라테를 사서 귀가하는 중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따뜻한 낮이었고 전화가 오는 순간 기쁨과 번호의 길이만큼 알 수 없는 그의 의중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미안하다는 거였다.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해 들었다고. 그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같지 않다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잠이 오지 않는 긴긴밤 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표현도 하지 못한 채 거절당한 내 마음을 달래야 할지 추슬러야 할지 자책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내 친구들과만 오빠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누가 나의 마음을 제멋대로 이야기했는지, 그는 어디까지 알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알아내려 들수록 더 상처받을 것만 같았다. 그 일주일 동안의 낮은 모르겠지만, 밤에 누울 때마다 커지는 수치심에 떨며 이것이 사랑의 결론이구나, 하고 연애를 시작도 못 한 채 두려워 떨 것만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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