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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Dec 03. 2023

감정노동 기획자가 자신을 지키는 법

기획자의 자아가 갖는 힘

3주 전부터 도서 인플루언서 고유님과 박정원 작가님이 운영하는 글방에 다니고 있다. 약 7주간 글을 쓰고 난 다음 함께 쓰는 동료와 책을 출간하는 취지를 갖고 있는 글방이다. 10명의 동료가 모여 자유로운 주제로 서로의 글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개인의 글이 만나고,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감이 교환된다. 글방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모든 과정 속에 함께 쓰는 동료로부터 따뜻하게 인정받고, 동료의 글에 신선한 자극을 느낀다.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듯 역시나 글 ‘잘’ 쓰는 사람도 많다는 걸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내 직업과 관련된 이야기

나는 이 공간에서 내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기로 했다. 브런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토해내는 공간이었다면, 고유 글방에서는 직업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예를 들어 아내와의 소소한 에피소드,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데 어려움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꼭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만큼은 나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기 어려웠다. 늘 오피스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두리뭉실했고, 나를 대변하지 않는 이야기인 걸 스스로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글을 쓰면서, 일하는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현생에 가장 많은 고생을 맡아서 하고 있는 일하는 ‘나’를 보살펴 달래주고, 수고한다고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다. 사실 늘 ‘일하는 자아’의 상태를 외면했었다. 일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스트레스가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하는 자아를 유리병에 덮어두고 묵혔더니, 나는 점점 더 오피스에서 우울해졌다. 내가 힘들어서 이제는 이 자아를 유리병 속에 꺼내 해방시키려 한다. 나 자신을 직면하고 ‘이만하면 괜찮은 기획자라고 토닥여 주고 싶다’. 그게 내가 ‘기획자의 낙서장’ 시리즈를 연재하는 이유다.


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이유는
'수고하고 있는 일하는 나를 칭찬해 주고 싶어서'이다.


기획자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

먼저, ‘기획자’라는 직업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내가 하고 있는 광고 마케팅 필드에서의 기획자는 남들이 머리 써서 하기 어렵거나 때로는 여유가 없어서 광고 만들기가 힘들 때, 그 일을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일을 의뢰하는 광고주라는 자리가 있고, 일을 받아서 대신 행하는(대행) 기획자라는 자리가 있다. 세상에 많은 유형의 기획자가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일 ‘대행’의 관점에서의 기획자 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속해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주로 의뢰받는 일은 디지털 마케팅이다. 과거의 디지털 광고의 범위가 TV 브라운관에 제한되었다면, 현대에 와서는 그 범위가 홈페이지, SNS, 뉴스레터 등으로 종류가 다양화되었다. 광고주는 디지털 마케팅을 할 수 있는 플랫폼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콘텐츠가 돋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 우리에게 일을 의뢰를 한다. 고객에게 닿기 위한 광고를 만들어 내고 싶은 ‘니즈’라 볼 수 있다.


광고 대행사의 기획자는 광고주를 도와
더 나은 광고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획자의 일 첫 번째 단계, ‘제안서 쓰기’

광고주가 일을 의뢰하는 순간부터 일이 시작된다. 일의 첫 번째 단계는 제안서를 쓰는 단계이다. 무수히 많은 대행사가 광고주가 제시한 일을 수주하기 위해 경쟁 PT(Presentation)을 준비한다. 이때 발표를 위해 잘 만들어진 기획안이 필요하다. 제안서는 브랜드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가는 환경분석, 브랜드가 처한 환경 내에 적합한 커뮤니케이션 전략, 마지막으로 어떤 메시지를 담은 소재를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쉽게 말해 제안서는 ‘1년 동안 어떻게 플랫폼 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 콘텐츠를 만들어 낼지’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1년 동한 진행하게 되는 과업의 모든 내용을 다뤄야 해서 쓰는 범위가 무척 광범위하다. 1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을 2-3주 내 마무리 지어야 한다.


기획안에서는 기획자가 어필해야 할 내용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 회사는 똑똑하다’이다. 시장의 흐름을 적확하게 읽어내야 하고, 크리에이티브를 담은 카피와 화려한 비주얼로 광고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공공기관 사업을 기준으로 한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참여하는 사업체가 많게는 30개 정도까지 된다. 기획자는 무한 경쟁시대에서 늘 돋보이는 기획안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과의 사투를 벌인다.


사실 나는 제안서를 써야 하는 이 기간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 허공에서 떠도는 생각을 캐치해야만 하고 뇌를 짜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을 그림과 글자로 가시적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인고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 또한 느끼게 된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아이디어는 정말로 실현 가능할까?’ ‘제안서 대로만 사업을 운영한다면, 브랜드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게 될 수 있을까?’ 잡다한 생각의 최종 종착지는 ‘우리가 디지털 마케팅 전문가라 할 수 있는가?’까지 이르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하는 일에 어느 정도의 과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를 사기꾼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하는 일에 
어느 정도의 과장이 존재한다는 것



기획자의 일  두 번째 단계, ‘실행하기’

일의 두 번째 단계는 ‘실행하기’이다. 새로운 사업을 수주에 성공하면, 장황하게 설명했던 제안서 내의 아이디어를 실천하기 위한 실행 안을 세우게 된다. 어떤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세워 고객과 논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단계부터 광고주와 기획자 간의 합이 중요해진다. 기획자는 광고주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빠르게 캐치해서 목적에 다를 수 있는 최적의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만 한다.


2단계에서 많은 기획자의 고충이 시작된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공감력이 떨어지는 광고주를 만나게 되면, 기획자는 소통이 불가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광고주와 기획자는 같은 목적을 갖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합이 제대로 맞지 않을 때는 팀의 개념이 무너진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히 나누어져 있기에 광고주의 무리한 요청에 대해 기획자는 화를 자기 내면으로 삭인 채 그 혹은 그녀의 마음대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행업에 종사하는 기획자는 광고주를 광고’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팀이라면 기분 좋게 광고주를 위해 일을 실행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엔 광고주는 대행사의 공공의 적으로 남게 되어 증오의 대상이 된다.


광고주와 기획자는 적이 아닌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한 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획자의 일 세 번째 단계, ‘결과보고’

마지막 3단계는 프로젝트 결과에 대한 결과 보고의 단계이다. 진행한 사업에 대한 성과를 광고주에게 보고한다. 조회, 노출, 참여수가 몇 회를 기록하였는지, 그리고 프로젝트에서 의미 있는 해석은 무엇이 있을지 상세히 보고해야 한다. 결과보고는 배정된 예산 내에서 최대한 많은 일을 했음과, 그 동시에 사업이 단체에 단기 장기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표현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클라이언트 담당자와 마케팅 대행사는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인정받을 수 있다.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광고주 담당자의 추천으로 기관 혹은 브랜드의 다른 일이 들어오기도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결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하고 있는 광고 대행사 기획자의 일은 크게 제안-운영-결과보고 이렇게 3단계로 나뉜다. 3단계와 내가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나는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브랜드가 고유의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최적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방향대로 일이 실행될 수 있도록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제안과 설득, 실행이 반복된다. 사람 간의 관계 속에 이뤄지는 일이 많아 일이 감정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분노를 삭이거나 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억눌러진 감정을 표출한다. 이 일은 정신적으로 지속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프로젝트가 마침표를 찍었을 때 주는 쾌감과 해방감이 있다. 이것은 포트폴리오가 되어 기획자에게 경험이라는 자산으로 남게 된다. 공허해진 나에게 공명되어 울리는 ‘보람’이라는 감정을 주기에 기획 일은 내 삶에서 끊어내고 싶어도 끊어낼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러가지 감정선으로 지속하기 어려운 일
그럼에도 이 일은 중독성이 있다


기획이라는 일은 분명한 명과 암이 존재하고, 온갖 흔들어 대는 외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직업이다. 여러 가지 환경이 자신을 흔들어 댄다면, 파동을 고요하게 만들게 하는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자아’가 기획자에게는 필요하다. 일에 너무나 많은 신경과 에너지를 쏟고 현업에 치여 살아가다 보면, 자칫 수많은 자아를 잡고 있는 밧줄을 놓치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 기획자에게는 다시 놓았던 밧줄을 힘껏 끌어당길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을 형성하는 수많은 정체성을 소중하게 지켜 나가야 일하는 자신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는 어떤 자아를 가지고 있을까?’ 나는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 ‘기획자의 자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시리즈에서 나는 기획자가 지속 가능하게 일을 하기 위해 고유한 자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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