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기획자의 자아
나는 평소에 섬세하고 꼼꼼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듣는 편이다. 찬찬하고 세밀하게 삶을 대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섬세하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다. ‘거북이’인 필명도 찬찬히 세상을 보겠다는 의미에서 짓게 되었다. 나를 규정하는 여러 단어가 있겠지만, 나는 이 단어가 참 좋다. 섬세하다는 말속에는 사람이 쉽게 느끼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감성이 살아 있는 듯하고,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대한 따뜻함도 보이기 때문이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 성격은 조금 더 섬세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전이었다면 쉽게 느끼기 어려웠을 감정을 느끼곤 한다. 특히 TV 프로그램을 볼 때 출연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잘 된다. 아주 눈물샘이 바람 잘 날이 없는데, 나의 섬세한 감성을 건드리는 티핑 포인트가 있다. 나는 일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와 그 태도를 누군가 알아봐 주는 인정의 장면에 약하다. 얼마 전 종영한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2’에서 힙합 크루 레이디 바운스가 배틀 후 아쉽게 탈락했을 때, 댄서 비기는 춤에 대한 진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비기 l “저는 춤을 너무 좋아해요 진짜로.. 근데 오랜 시간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 어려웠거든요 스우파에 출연하게 되어 춤을 더 좋아하게 됐어요 앞으로 더 멋있어질 거예요 “
뒤 이은 허니제이의 심사평
허니제이 l “비기야 너 진짜 멋있어졌다. 제가 사실 학생이었을 때 이 친구를 수업을 했었는데, 비기가 춤추는데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 이 친구가 정말 많은 노력을 했구나 성장을 했구나를 볼 수 있었어요”
아내와 같이 이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왔다. 아내는 울고 있는 나를 보며, 크게 웃으며 영상을 촬영했지만, 나는 당시 꽤 진지했다. 댄서 비기의 춤과 울먹임 그리고 직업을 대하는 진심 어린 말속에 자신의 일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느껴졌다. 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꿈을 향해 달려온 그녀의 고난과 행복이 함께 스쳐 지나가 감정이입을 했다. 그리고 그 열정과 노력을 알아봐 준 허니제이 심사위원.. 허니제이의 말 한마디는 수많은 고민을 안고 스우파라는 무대까지 달려온 댄서 비기의 고충을 담은 마음을 한방에 달래 주었다. 무언가에 진심으로 열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고충을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진심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열정을 쉽게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스우파라는 댄서들의 최고의 무대에서 과거 그녀의 스승이었던 허니제이는 비기의 열정을 인정했다. 멋지다고 이야기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그녀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을까?
일을 할 때의 섬세함
기획자로서 일을 대할 때는 동료와의 관계, 그리고 일 처리에 대해 섬세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후임 직원과 함께 일을 할 때, 그들이 직장에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직장에서 기여하고 이를 인정받기를 원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이 직장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직장에 일하는 모든 동료까지는 아니어도 나와 함께 일 하는 후임 직원이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보람되게 일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 처리에 있어서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과정에 꼼꼼하게 집중하는 편이다. 일에 대한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가시적으로 그려 놓고, 일을 나눌 수 있는 작은 단위의 과정을 차근차근 마무리하기 위해 과정에 꼼꼼하게 집중하고 있다. 여러 가지 업무툴을 활용하여 일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읽으려 노력하고 동료와 일의 진행과정을 공유한다. 내가 하는 일련의 일 처리 과정을 ‘일 정리’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눈에는 정리를 위한 정리라는 비효율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나는 일에 대한 정리를 지속적으로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정리하게 되면 일을 이해하기 쉬워지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사전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섬세하게 감정에 공감하기
동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감정에 섬세하게 감정이입 하려 노력하고 있다. 옆에서 함께 일하다 보면 후임직원이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쉽게 보인다. 그렇기에 피드백을 할 때 아쉬운 것보다 고생한 과정에 대해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처음엔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편하게 이런 말들을 꺼내고 있다. 직장에서 목적 달성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을 알고 있지만 경주마처럼 목표만을 바라봐 시야가 좁아지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좀 더 과정에 집중하고 서로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가고 싶다.
어느 날은 팀의 후임 동료가 내게 면담을 요청한 적이 있다. 동료는 나에게 스스로가 겪고 있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제 제안서도 많이 써본 것 같은데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 걸음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동료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한마디를 듣고 단번에 위로와 공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동료가 잘하는 부분을 먼저 짚어주었다. 후임은 누구보다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통통 튀는 생각을 하는 감각을 갖춘 동료였다. 나는 이 부분이 제안서의 ‘킥(Kick)함’ 크리에이티브를 높여주고 있음을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보지 못하는 강점이 꼭 한 가지 이상은 숨어있기 마련이다. 마음이 힘들 때면 그것이 더욱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럴 때면, 움츠러들고 자신감이 없어지기 마련인데, 동료의 움츠러든 마음을 정성스레 그리고 조심스레 펴 주고 싶었다.
나와 함께하는 후임 직원이 스스로 너무 작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 나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고 아직까지도 작아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주니어 직급으로 일을 하다 보면 ‘팀에 도움이 크게 되지 않는 것 같다’, ‘늘 똑같고 작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실상은 공동체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이다. 그럴 때 동료의 ‘힘듦’을 공감하고 어루어 만저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노력에 대해 상대방이 인정해 주었을 때, 직장에서 서로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동료를 신뢰하고 따뜻함 가운데 일할 수 있게 된다.
일정을 섬세하게 계획하기
일정에 대한 스케줄링을 할 때에는 프로젝트를 최대한 잘게 썰어본다. 내가 담당했던 SNS 채널 운영을 예로 들면 크게 썰면 콘텐츠 기획, 광고 소재 제작(디자인 및 영상), 사용자 반응 체크 등이 있다. 이 중 콘텐츠 기획 부분을 작게 썰어보면 기관의 이슈 상황 체크, 월간 콘텐츠 캘린더 기획, 자료조사, 광고주 커뮤니케이션 등으로 나뉜다. 일을 썰을 수 있는 만큼 일을 썰어본 뒤, 구글 캘린더에 내용을 기입한다. 그런 다음 작게 썰어 낸 일을 마감이 급한 순으로 하나둘씩 처리해 나간다.
일을 잘게 쪼개지 않고 큰 단위로 일을 진행하다 보면, 일의 세부사항을 놓치기 쉬워진다. 또한 일에 대한 진행 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마음이 막막해지고, 끝나지 않는 숙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한마디로 진도가 더디게 된다. 우리가 학창 시절 두꺼운 정석책을 굳이 어렵게 쪼개는 이유는 공부의 진척 상황 혹은 완결이 다가옴을 느끼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감히 판단해 본다.
작은 덩어리의 일을 처리하다 보면, 구글 캘린더에서 해야 할 일을 지우는 쾌감이 있다. 상위 목표를 잘게 썰어낸다는 개념은 ‘세부 실행계획’을 세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작게 썰어내는 과정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해야 할 일이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면, 곧장 실행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결과물을 쌓아 보다 보면, 마감 기한이 다가왔을 때 목표치에 가깝게 도달한 일이 보인다. 그때 게임할 때 한 퀘스트를 끝낸 것 마냥 뿌듯한 감정이 생긴다. 정우성은 잘생겨서 짜릿하지만, 나는 일을 끝내서 짜릿하다.
워터폴(Waterfall): 목표를 작은 덩어리로 나누어 실행하는 방식
- 일하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p 144 (저: 박소연)
일에 대한 진행상황을 섬세하게 정리하기
일을 진행할 때에는 프로젝트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고, 그 과정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의 핵심은 ‘시각화’이다. 나만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정리가 아닌, 함께 이해하기 위한 시각화를 진행한다. 시각화를 하면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시각화는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일을 설명하는 과정이 되어 일 자체를 깊게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함께 일하는 동료 또한 시각화 자료를 통해 사업이 진행되는 목적과 방향성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각화는 나와 동료가 일을 능동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이끄는 과정이며, 구성원이 각기 다르게 갖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달성 목표를 얼라인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시보드는 일을 나누는 것처럼 파트를 구분하여 내용을 정리한다. 내용은 아이디어 서칭, 콘텐츠 기획, 광고 운영 계획, 광고주 전달자료, 미팅 보고 등 다양하다. 사업을 구성하는 틀을 나누어 정리하다 보면,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기록으로 꼼꼼히 남길 수 있게 된다. 일이 기록으로 남게 되면,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콘텐츠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혹은 광고주가 전달한 피드백의 핵심내용은 무엇인지 등 일을 잘 해결하기 위한 혜안을 얻을 수 있다.
이 과정으로 일에 대해 전체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직장에서 조금씩 주체성을 가지고 일을 대할 수 있다. 매일 수많은 업무를 다루다 보면 당면한 일을 처리하느라 일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는 직장에서 ‘나의 역할’과, ‘성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마련이다. 만약 그 당사자가 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을 지키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과나 창조한 콘텐츠의 아카이빙에 대한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자신이 많은 일을 해왔고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가 눈에 차츰 들어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