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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이 Dec 24. 2023

쉴 때도 읽고 쓰는 몹쓸 기획자

기획자의 쉼

나에게 일터를 벗어난 휴식 시간은 자신에 대해 깊게 탐구해 보는 재충전의 시간이다. 나는 쉴 때, 여러 사람을 만나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라기보다 혼자만의 여유를 갖고 시간을 보낸다. 평일 오피스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짜내는 ‘창작하는 일’을 하고 있기에, 주말에는 사람들과 잠시 멀어져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와 대화하기 위해 읽기


혼자 있는 시간에 나는 자신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자신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혼자 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읽는다. 다독가는 아니고, 책을 꼼꼼하게 읽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책의 문장을 꾹꾹 눌러서 눈으로 담으면, 마음을 때리는 문장을 발견하곤 한다. 그 문장을 발견하면 책 상단을 접고, 밑줄 긋는다. 그리고 독서 애플리케이션 리더스에 문장과 그 문장을 보고 느낀 점을 적어본다. 


올해 7월 별세한 거장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테레자는 동반자 토마시를 만났을 때, 치명적인 우연이 작용했다고 이야기한다. 테레자가 바텐더로 일을 하던 시골 동네의 허름한 바에 등장한 지적인 사내, 그리고 사내의 등장과 함께 흘러나왔던 베토벤의 음악.. 물질 세계에 대한 환멸의 느끼고, 정신적인 것을 동경하던 테레자에게 토마시는 답답한 현실에서 탈피하도록 돕는 구원자 같았다. 허름한 바와 베토벤의 음악 등은 둘 사이 만남에 치명적인 우연으로 작용하여 둘은 결국 연인 사이가 된다. 


밀란 쿤테라는 치명적인 우연을 사람과 사물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때 사람이 순간(사물을 둘러싼 환경)을 얼마나 특별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삶의 악장이 변한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치명적인 우연’을 설명하는 내용이 내 감성에 보슬비를 내려 촉촉하게 했다. 


인생을 조금 더 풍성하게 살아가려면,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순간을 대수로이 여겨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치명적인 우연으로 바라 볼 줄 알고, 우리의 인생을 상황에 맞게 변주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감성과 감정이 풍부해지는 삶이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16 (저: 밀란 쿤테라) 


이처럼 쉬면서 하는 읽는 시간은 나 같은 기획자의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유지하게 되면, 자신과 나누는 대화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 나와 다양한 주제로 대화 할 수 있다. 오늘은 밀란 쿤테라가 정의한 치명적인 우연에 대해 나와 대화했다면, 내일은 요한 이데마가 알려준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관해 이야기해 본다. 나에게 미술이란 작가의 화풍이라는 픽션을 가미한 세계에 빠져보는 시간이다. 미술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림 속에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작품 안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현실 세계를 떠나 그림이라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최근 다녀온 전시 유이치 히라코의 전시 Journey 중


읽고 나와 대화하는 쉬는 과정을 통해 기획을 이해하는 범위의 폭도 넓힌다.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화하는 과정은 나만의 생각을 끌어내는 법을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다. 이 경험은 내가 기획일을 할 때 머릿속에서 사고를 하며 일을 진행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한다. 기획할 때 발생하는 ‘읽음’에서 나는 내가 만들어내는 브랜드의 본질, 전략이 무엇이 될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읽음이라는 휴식 시간을 통해 알게 된 기획의 방법이다. 읽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만의 사고와 감정을 소환한다. 쉬면서 하는 ‘읽음’은 기획자의 기획 더 깊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애견 카페에서 쓰기


여우를 닮은 반려견과 함께 지내고 있다. 나이는 4살이고 이름은 스톤이다. 스톤은 크리스마스에 충주 길거리에서 구조된 5남매 강아지 중 한 마리로, 이름은 구조된 날 크리스마스 한 음절에서 따왔다. ‘크(림)’,’리(치)’,’스(톤)’, ‘마(크)’, ‘스(타)’


나는 가끔 평일에 반차를 내고 스톤이와 애견 운동장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 오프리시로 스톤을 풀어주면, 스톤이는 야생 여우처럼 운동장을 10바퀴 20바퀴 곤 뛰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호자로서 뿌듯함과 함께 행복함까지 느껴진다. 아마 반려견을 키우는 대부분 보호자가 강아지가 놀면서 지치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맛볼 것이다.     


여우를 닮은 반려견 '스톤'


스톤이 열심히 냄새를 맡고 운동장을 몇 바퀴 뛰었을 때,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다. 그리고  무엇을 하느냐?  단어와 문장의 조합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사무실에서 앉아 그렇게 쓰는 일을 하는데, 쓰는 게 지겹지 않냐고? 이렇게 누가 물어본다면, 일이 아닌 진정한 나를 위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지겹지 않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써내려 가는 주제는 아내와의 결혼‘생활’, 문화‘생활’, 직장‘생활’ 등이다. 휴식하면서 하는 글쓰기는 주로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면 나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좋다. 내가 각종 집단과 사회에 속해 살아가면서 ‘잘하거나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나는 인생에 있어 ‘어떤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점검의 시간이다.  글을 쓰며 나를 점검하고, 곱씹고, 소화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를 형성해 온 생활을 꺼내어 쓰다 보면 나를 형성하는 고유한 이야기가 구조화 되어 글로 발현된다. 읽음을 통해 이뤄진 자신과의 대화, 혹은 생활 속 재밌는 에피소드 모두 글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읽음이 생각의 깊이를 넓히는 과정이라면, 쓰기란 생각의 깊이를 잊어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창작의 과정이다.


브런치 플랫폼에서 ‘아내의 생일에 떡볶이를 먹자고 했을 때’ 글을 쓰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아내와 함께하는 결혼생활과 관련된 글이었고, 조회수는 현재까지 약 8만 회를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숱한 아내들에게 악플을 받았더랬다. 그 글이 이렇게 주목받을 걸 알지 못했기에 악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내 글을 통해 사람들이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글은 코로나로 인해 실직했을 때, 재취업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아내에게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그때 나는 내 심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아내의 생일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아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핸드폰 게임을 하면 놀다가 집에 도착했을 때 무작정 떡볶이를 먹자고 제안했었다. 


이때 내가 저지른 만행을 보면, 어쩌면 악플이 달리는 건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많은 관심 덕분에, 자신의 생활에 대해 더욱 객관화 하여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더 잘 보였다. 배우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다면,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과거 싱글의 삶의 허물을 벗어 던져버렸다. 인생을 바라보는 중심을 ‘나’에서 ‘우리’로 가치를 옮겼다. 이제는 나를 통해 아내가 더욱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나를 통해 아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https://brunch.co.kr/@writerturtle/9


이 글을 쓰고 있는 애견 카페에서의 휴식 시간 스톤이는 한참을 놀다가 내 옆에 자리를 트고 엎드려있다. 혓바닥을 날름날름 내밀며 헉헉대고 있는 스톤이를 바라보며, 오늘도 글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글을 통해 세상에 묻는다. ‘저는 현재 이런 삶을 살고 있는데, 제 삶 어떤가요?’, 혹은 ‘저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이 고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의 이야기가 어느새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 우리는 잠시 인생을 공유한다. 나의 인생과 그의 인생이 만나 서로의 인생을 논한다.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생각이 깊어지고,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 회자된다. 나는 일할 때도, 휴식할 때도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몹쓸 기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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