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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29. 2020

수 세기의 아름다움을 품은 곳

영화 <내셔널 갤러리> 리뷰

“한 때 위용을 자랑했던 전함이 수치스럽게 끌려가는 모습이라니. 시간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법인가 보죠?” <007 스카이폴>에서 다시 돌아온 제임스 본드에게 새로운 쿼터마스터는 무심하게 말한다.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건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다. 무수한 시간을 거쳐 새로운 시대에 직면한 주인공의 삶과 그 미래가 단 몇 초 만에 하나의 그림을 통해 함축되는 이 순간.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림을 향유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이야기, 인간 본연의 감성과 이성으로 조우하며 드넓은 시간을 뛰어넘는 미술의 세계. 그중에서도 13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를 아우르며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사람들을 기다리는 2,300여 개의 작품들을 품은 곳,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녀다.
 
1824년 설립 이후 영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명작들을 꾸준히 전시해 온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은 다큐멘터리 <내셔널 갤러리>는 관람객의 시선과 직원의 시선을 차용해 내셔널 갤러리의 안과 밖을 상세하게 다루는 일종의 내셔널 갤러리 탐방기다. 전시 관람부터 교육 프로그램, 작품 복원 과정, 전시 기획, 미술관의 운영까지 특별한 설명이나 내레이션 없이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철저히 따르는 영화는 갤러리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빌어 수백 년의 시간을 간직한 이 미술관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대신 전한다.

가령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설명하는 큐레이터는 미술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19세기 노예제 자본과 그에 대한 미술관의 책임감을 강조한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책임론의 일부이기도 하다. 약탈품 혹은 누군가의 땀과 희생으로 얻어진 자본 위에 굳건히 세워진 명성은 이를 누리는 현대인들에게 역사의 짐을 함께 떠넘긴 셈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무료 개방 및 교육, 전시에 전념을 다하며 그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 기획자의 인터뷰를 통해 내셔널 갤러리가 어떻게 전시의 전후 과정을 통해 작품으로부터 원동력을 얻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전시관 밖 직원들의 치열한 논의는 내셔널 갤러리라는 거대한 미술관이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와 기준을 제시한다. 이는 정신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운영을 위한 수익사업과 분리될 수 없는 현실에서 미술관이 어떻게 중도를 지키는지 보여준 것. 바로 이 지점이 영화 <내셔널 갤러리>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다. 단순히 그림 감상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말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미술관이 지향하는 목표를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미 ‘미술관’이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구심점이 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방대한 영감을 선사하는 공간이 된 내셔널 갤러리.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작품과 터칭하며 롤랑 바르트가 ‘접촉은 욕망하는 대상의 육체(더 정확히는 그의 살갗)와의 가벼운 접촉으로 야기되는 모든 내적 담론을 가리킨다’라고 했던 것처럼 교감 그 이상의 감동을 얻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미술관을 즐길 수 있을뿐더러 그저 앉아서 쉬는 것만으로도 삶이 풍요로워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내셔널 갤러리는 회화 미술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미술, 음악, 무용 그리고 이 영화까지 예술 전반에 거쳐 수용범위를 넓히며 미술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고자 하는데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영국이 바라보는 가치를 표방한다. 이미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빛났던 대영제국을 넘어 여전히 그 건실함을 잃지 않고 있음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렸던 영국은 얼마 전 진정한 그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회, 문화, 역사,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아울러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가진 광범위한 힘을 보여주려는 것. 그리고 바로 내셔널 갤러리를 통해 영국은 자신들이 가진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결국 내셔널 갤러리를 통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 셈이 된다.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온라인을 통해 미술관의 작품들을 상세한 설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의 발이 움직이는 건 우리 안의 욕망이 우리를 움직인 것. 쉴 새 없이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미술관의 목표인 작품의 연구와 보존을 이어가며 결코 미술이 가진 본질을 잃지 않으려 하는 미술관의 굳은 신념은 영국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라는 모습의 실상이었다.  두 눈보다 렌즈 너머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세상 속 우리는 <내셔널 갤러리>를 통해 다시 한번 타인의 프레임으로 미술관을 엿보며 우리의 소비한다. 더불어 정적인 모습으로 태어나 그 누구보다 동적인 존재들과 마주하는 작품들은 마치 우리의 욕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는데. <내셔널 갤러리>는 어쩌면 액자 속에서 수 세기의 시간을 묵묵히 지내온 작품들이 우리에게 하는 손짓이 아닐까? 그들이 숨겨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금 바로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은밀히 속삭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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