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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28. 2020

소녀와 엄마, 모두 여자

영화 <인 허 플레이스> 리뷰

 여자로 태어나서 어머니가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여자들은 여성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또다시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받으며 살고 있다. 과거의 여자들이 현모양처라는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아래 가정 안에 갇혀있었던 반면 현대의 여자들은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 진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파걸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에 다시 묶이고 말았다.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을 해내는 직장인의 모습까지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굴레의 되물림에는 이미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에 길들여진 여성들이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자식을 낳을 것을 강요당하는 불임 여성. 한 순간의 실수로 어린 나이에 생명을 품게 된 10대 소녀.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는 소녀의 어머니. 그녀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가 그들에게 찍을 낙인이다. 불임과 미혼모, 그리고 홀어머니. 이 사회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 세 사람은 서로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기로 결심한다. 영화 <인 허 플레이스> 속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은 이런 세 사람의 욕망이 얽히며 기이한 공간으로 재 탄생했다. 그녀들의 욕망은 그 각자의 안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동시에 밖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라캉이 말하길 ‘인간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던가. 사회가 만들어낸 프레임을 욕망하는 세 여자. 이와 맞물려 차오르는 개인의 욕구가 찾는 모든 것들을 서로에게서 발견한 세 여자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긴장감 속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은밀한 거래 속 이해관계에 의해 한 집에 살게 된 여자들은 억지웃음으로 서로의 욕망과 불안을 포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안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제 아이를 품은 소녀를 보며 마치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하고 이내 소녀를 제 몸처럼 구속하기 시작하는 여인. 반면 아무런 준비 없이 아이를 갖게 된 소녀는 모든 것이 무섭고 당황스럽다. 제 뱃속의 아이를 보며 자꾸 자신의 아이라 세뇌시키는 여인까지. 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소녀의 어머니는 그저 이 모든 게 하늘의 뜻대로 흘러가 아무 일 없던 듯 일상으로 돌아가길 갈망한다. 그러나 난생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불신은 그런 그들 안에 피어나는 두려움을 키우고. 이 감정을 세 사람을 혼동의 구렁텅이로 이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치닫는 파국이 더 씁쓸하게 보이는 건 그 불안정함의 원인에 남성의 결핍이 존재하기 때문. 여인의 남편은 여인을 버려둔 채 떠나고 다시 만났을 때도 그저 짐승 같은 교미만 이어가 과연 여인이 원하는 것이 진정 아이였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한편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녀 역시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 소녀를 임신시킨 어린 소년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떠나버리고 그런 그녀를 보듬어야 하는 건 남편을 잃은 어머니뿐이다. 미성숙한 서로를 안고 살아가는 두 모녀. 결국 <인 허 플레이스>는 남성의 부재로 인해 의존할 곳이 없어진 여자들이 스스로 일어날 힘을 잃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또다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냉소적으로 비춘다.  

알버트 신 감독이 한국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들은 실제 가족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인 허 플레이스>. 임신을 원했던 여인이 가족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 후 홀연히 사라져 버린 기이한 일을 엿듣고 호기심을 갖게 된 감독은 3년 동안의 사전 조사와 한국 올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지금의 <인 허 플레이스>를 만들어 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며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 고찰한 한국적인 여성 이야기. 한국 사회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 그녀들의 모습에는 우리 사회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숙연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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