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원 Jan 02. 2021

메마른 땅에 피어나 흔들리는 들꽃들에게

영화 <들꽃> 리뷰

종종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디스토피아를 꿈꾸곤 한다. 멸망해버린 지구나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황폐해져 버린 지구. 아니면 극심한 통제 속에서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생각한다. <매드맥스> 속 절망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그들은 되려 위로를 얻는다. 그래도 내가 사는 세상은 저보다 낫지.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진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들꽃> 속에는 눈을 감으며 도피할 새 없이 벼랑 끝에 몰린 세 소녀가 등장한다.
 
미성년자인 은수(권은수)와 수향(조수향) 그리고 하담(정하담)은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한다. 추운 겨울, 몸 뉘일 곳을 찾아 헤매던 던 그녀들의 발길을 유혹한 건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준다는 한 여인(최문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마냥 모텔 방으로 들어간 소녀들의 비극은 ‘삼촌’(오창경)이라 불리는 악마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사실 ‘시작’이란 단어는 다소 적절하지 않다. 이미 그녀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기 때문. 단지 가출 소녀들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악순환의 마수가 모텔에서 다시 한번 그녀들을 옳아 매어 온 것뿐이다.

우스갯소리로 던지는 말들 중 이런 말이 있다. ‘꿈은 높은데 현실을 시궁창이야.’ 그러나 세 소녀가 마주한 현실은 꿈을 꿀 기회조차 앗아가고 시궁창보다 더한 나락으로 그녀들을 끌어내린다. 그녀들의 눈이 닿는 곳에 희망은 없다. 그녀들은 결코 행복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눈에 담지 않는다. 당장의 생존이 그녀들에게 더 시급한 문제. 세 사람은 오로지 서로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지금 그녀들의 숨을 조여 오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녀들은 이미 알고 있다.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도와줄 어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세 사람이 모텔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태성(강봉성)이나 바울(이바울)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소녀들과 다를 게 없는 처지. 삼촌의 수족으로 살아가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태성이나 귀머거리 바울이 보여주는 몸짓은 그저 같은 진흙탕 속에서 흙탕물을 튀기는 행위다. <들꽃>은 이를 그들이 사는 골목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모텔을 나와도 결국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지옥을 탈출하기에 현실은 지나치게 넓었고 그들을 잡으려는 ‘삼촌’의 손이 그 현실을 덮고 있었다.

다만 기존에 가출 소녀들을 다루었던 <나쁜 영화>나 <눈물>과 달리 <들꽃>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녀들을 바라본다. 그동안 가출 청소년이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상징으로 거칠게 표현되었던 것과 달리 4일 동안 세 사람의 삶을 쫓는 카메라의 시선 안에 왠지 모를 따스함이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은 그녀들이 품고 있는 들꽃과 같은 이미지에 기인한다. 제대로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없이 황량한 땅에 피어난 소녀들. 언제든지 꺾일 수 있는 위협에 노출된 그녀들의 삶. 그러나 세 사람은 마음속에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동질감을 품고 있었다. 동생과 살아가기 위해 강한 모습을 꾸며내지만 속만큼은 여린 맏언니 은수, 은수와 하담을 모두를 아끼며 그녀들을 위해 제 몸 버리기도 망설이지 않는 수향 그리고 언니들과 만나 불안함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위로를 얻는 하담까지. 영화는 야생화와 같이 강한 생존력을 보여주는 세 사람을 묵묵히 지켜본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박석영 감독의 ‘퓨어시네마’ 정신 때문일까? <들꽃>은 인위적으로 구성되기보다는 객관적인 거리에서 다큐멘터리처럼 따라간다. 마치 인물들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며 실제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는 다소 투박하지만 <들꽃>이 지닌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부각한다. 한편, 정착할 수 없는 곳에 앉아 위태롭게 흔들리는 들꽃. 시인 나태주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는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난 자리는 사랑으로 아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