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순례자의 조언
어딜 가든 사람들로 가득했던 리스본과 달리, 세비야는 말 그대로 고즈넉함 그 자체였다.
좁은 골목 사이로도 햇살이 스며들어와, 마음까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왜 많은 이들이 세비야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리스본이 ‘즐기라’고 속삭이는 도시였다면, 세비야는 도시이면서도 ‘쉬어가라’고 말하는 곳 같았다.
속도를 늦춰도 괜찮다고, 잠시 머물러도 괜찮다고, 따뜻한 햇살로 등을 다독여주는 그런 도시였다.
스페인 북부의 소멸해 가는 도시들이 보여준 황량한 모습과는 달리, 세비야는 생기가 넘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로 내 마음까지 느긋하게 만들어주었다. 숙소를 나와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 보니 작은 분수대가 있는 아담한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미술 학도들이 스케치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 그림 속 풍경 같았다. 자유롭고 햇살 가득한 유럽의 어느 날, 그늘 아래 앉아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이 피카소나 가우디 같은 예술가들의 젊은 시절과 겹쳐 보였다. 그들이 매일같이 마주했을 이 풍경 속에서, 나도 잠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늘 아래 펼쳐진 풍경은 한마디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 순간이 영원히 박제되어도 좋을 만큼 완벽했고, 아쉬울 만큼 짧게 스쳐갔다.
유명한 관광 명소가 아니어도, 나에게는 그곳이 오늘의 진짜 '명소'였다.
2023.11.06 / 월요일 오후 16:53
구시가지의 골목을 지나, 대형 슈퍼마켓 MERCADONA PLAZA DEA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샀다.
여행 중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마주치는 커다란 마트와 쇼핑센터를 보면, ‘역시 도시가 편하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하게도 나는 오늘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2.1km 정도 되는 거리를 마을을 구경하듯 느릿느릿 걷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 길 위에서 세비야 미술관(Museo de Bellas Artes de Sevilla)의 외관을 마주했는데, 건물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그래,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리를 건너, 규모가 거대한 현대미술관 Centro Andaluz de Arte Contemporáneo에 들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외형의 압도적인 모습만 감상하고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타이밍, 묘하게도 예전에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도 하필이면 전통시장부터 국립공원까지, 가려던 곳마다 휴일이었고, 구제주의 상점들조차 문을 닫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람 한 점 없이 파도도 없고, 바다는 안개로 자욱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과 안개가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빗나간 하루였지만, 결국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되어주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어지간한 계획 틀어짐쯤은 실망 대신 유연한 전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은 이 길이 아니구나!”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은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이 도시를 느껴보기로 했다.
내가 세비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오렌지 나무와 플라멩코 전통 공연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도시에 들어서니, 공유 자전거를 이용해 관광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박물관이 휴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강가를 따라 중심 관광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세비야의 강변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어 조깅이나 사이클을 즐기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사벨 2세 다리가 있는 곳은, 마치 파리의 퐁네프 다리처럼 일몰과 세비야의 풍경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누구라도 이곳이 유명한 명소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곳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2.3km를 더 걸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비야는 신혼여행지로도 꽤 유명한 도시였다.
포르토와 리스본 역시 강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지만,
내게 리스본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강 너머로 펼쳐지는 북대서양의 드넓은 바다 때문이었다.
리스본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스페인 남부 특유의 타일 양식이 눈에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경우, 건물 전체를 화려한 색감의 타일로 뒤덮어 마치 건물 자체가 하나의 캔버스처럼 느껴졌다면, 세비야는 그와 달리 마치 벽지 포인트를 붙여놓듯 절제된 색감과 일정한 규율을 지키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파란색 타일보다는 스페인 성당에서 자주 보았던 금색 장식이 자주 쓰였다.
붉은색과 함께 스페인을 상징하는 강렬한 색감들이, 흰색 벽과 조화를 이루며 세비야의 거리 곳곳을 물들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건물 외벽은 흰색 벽면에 금색 포인트 컬러를 얹은 형태로 통일감을 이루고 있었다.
재미있던 건, 타일 기념품에 **‘세비야’**라고 적힌 제품들이 리스본보다 1유로가량 비쌌다는 점이다.
불과 며칠 전, 바로 옆 동네인 리스본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더욱 실감이 났다.
왜 많은 유럽 여행자들이 여름휴가로 리스본을 택하는지,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정말 저렴하고, 즐기기 좋은 나라였다.
여태까지 내가 여느 사람들과 같은 장소를 방문했음에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곳을 소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순례자의 시선으로 완전히 다른 루트를 따라 여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2주 동안의 파리 체류, 41일에 걸친 스페인 북부 순례길, 그리고 포르투갈의 포르투와 리스본에서의 시간.
그 여정 속에서 나는 한국 여행자들이 주로 가는 경로에서 벗어난 길을 걸었다.
익숙한 도시에서도 낯선 방향으로, 혼자만의 리듬으로 길을 걸으며, 내 여행은 조금 다르게 빛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몰려드는 장소보다는, 조금은 비켜선 곳에서 느린 속도로 마주하는 풍경들이 훨씬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세비야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더욱 색다르게 다가왔다.
유럽 여행 중 이렇게 많은 한국 관광객을 한꺼번에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래킹이나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온 순례자와 일반 여행자는 외형부터 확연히 다르다.
우선 입는 옷부터 다르다. 여행객은 깔끔하고 잘 갖춰진 복장에 머리도 정돈되어 있지만,
순례길을 시작하거나 마친 순례자들은 이미 옷과 생필품이 많이 닳아 있을 정도다.
이들은 마치 현지인처럼 이미 현지 문화와 환경에 적응해,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매일 한식을 먹는 한식파도 아니었고,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도 여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만약 자전거를 가지고 다니거나 텐트를 짊어지고 다녔다면,
나처럼 순례자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들 틈에 섞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세비야에서 오랜만에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관광용 시티투어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과달키비르 강 근처는 일몰을 감상하며 쉬거나 앉아 있기에도 넉넉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시티투어 버스에서 호객 행위가 이어지면서 이미 정신없던 거리가 더욱 붐볐다.
한참 다리 위에서 일몰을 바라본 뒤, 나는 다시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간만에 보는 관광객들의 화려한 의상들이 이곳이 분명 도시임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숙소에서 이곳까지 5km 이상 걸은 것 같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세비야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인 ‘세비야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온 동네 건물들이 모두 역사적 유적지라 굳이 한 곳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마드리드와는 또 다른, 세비야만의 독특한 개성이 존재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세비야 트램이 오렌지나무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이곳에서는 바쁘게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했다.
연말 축제로 라팀음악 어워드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세비야 대학교의 외관은
유럽 중세 대학 건물에 대한 상상 그대로의 판타지를 채워 주었다.
대학교 주변에는 현대식으로 증설된 트램이 다녔는데,
리스본의 노란 트램과는 또 다른 아기자기한 모습이었다.
내가 방문했던 유럽 도시들 중 세비야가 가장 깨끗했고,
역사적 유적들조차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해 소란스럽지 않은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왜 그렇게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을 꼭 가봐야 한다고 하는지, 직접 방문해 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규모와 화려함에 나는 압도당했다.
스페인 광장의 장식은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면서도,
차분하고 겸손한 분위기 속에 고급 자재로 만들어진 명품 같은 느낌을 줬다.
이곳에서는 신랑신부가 웨딩 스냅 촬영을 하기도 하고,
다리 위에서는 플라멩코 버스킹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참을 걸으며 둘러보다 보니 이미 해는 오래전에 졌는데도,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은은한 노란 불빛이 감도는 스페인 광장의 정취도 꽤 볼 만했다.
플라멩코의 도시답게 진한 붉은 꽃을 단 무희의 우아한 움직임이 광장과 어우러져,
광장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였다.
2023년 11월일 , 이 모든 풍경과 순간들이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을 광장 주위를 돌다가 나는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배가 고팠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음식점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식당도 찾아봤지만 결국 숙소로 돌아가 슈퍼에서 사 온 음식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다.
Gustavo Adolfo Bécquer 기념비 (Monumento a Gustavo Adolfo Bécquer)
내가 세비야를 좋아했음에도 하루밖에 머물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 여행 메이트를 이곳에서 만나거나 함께 다녔다면 하루를 더 머물렀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밤골목에는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술집과 클럽, 상점들의 간판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플라멩코 공연장이 성업 중이라는 전광판도 눈에 들어왔다.
밤이 되고 쌀쌀해진 날씨에 하루 종일 걸었던 터라,
허기와 추위에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이 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특별하게 지어진 Antiquarium 고고학 박물관의 외형은
마치 말벌집을 닮아 인상적이었다.
그 외형만으로도 이곳을 충분히 즐겼다고 할 만큼
현대 건축물 중에서도 임팩트가 큰 편이었다.
오후에 아무도 없던 숙소와 달리, 저녁이 되자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공유주방에 꽤 모여 있었다. 금발의 독일 남자와 영국 여행자, 그리고 말이 정말 많은 미국 여행자가 식사 중이었다.
나는 오후에 사둔 음식을 들고 주방으로 와서 인스턴트 스파게티를 데워 TV를 보며 먹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독일, 영국, 미국 여행자가 함께 있었다.
스몰토크가 이어지던 중, 미국 여행자는 세비야 관광지 뒷면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면서 "세비야에 왔다면 플라멩코 공연은 꼭 봐야 한다"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혼자 떠드는 미국 여행자를 뒤로하고, 독일과 영국 여행자 그리고 나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우리는 테이블을 떠나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독일 여행자와 영국 여행자도 각자 자리에서 휴식을 마치고 이야기에 합류했는데, 알고 보니 그 독일인은 전문 산악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그가 전문 산악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3,000km가 넘는 거리를 종주한 베테랑이었다. 독일인답게 진중하고 과묵한 성격인 그는 내가 순례길을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교환했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미국 여행자는 30km를 걸었다는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순례자로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크는 세비야가 너무 큰 도시라서 하루 만에 모두 둘러보기는 무리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영국 여행자도 그의 동료였다.
마크의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던 중, 나는 'Hexa Trek'이라는 프랑스 북부에서 남부 룰르드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횡단하는 트레킹 루트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 산티아고까지 3,000km 이상을 걸었다고 했다. 마크는 나에게 어떤 신발을 신는 것이 좋을지까지 친절히 조언해 주었다. 독일인 특유의 차가운 첫인상과 달리, 그들의 따뜻한 조언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했다.
당시에는 브룩스라는 브랜드를 몰랐지만,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미국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많이 신는 유명한 브랜드였다. 지금은 러너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신발이었다.
우연히 들른 세비야에서 낯선 순례자에게 얻은 귀한 조언은 또다시 한 번 나를 일깨워 주는 듯했다.
밤이 되자 세비야의 거리는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역시 스페인이었다. 특별한 공간과 온화한 날씨, 느릿한 분위기가 나에게 여유로운 걸음을 선물했다. 특별한 친구가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문 산악인의 충고는 마음 깊이 오래도록 남았다.
순례길을 막 마친 이들에게는 정보가 너무 많으면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속도에 맞춰, 소화할 만큼만 여행할 것이다.
정해진 정답은 없다. 하지만 아마도 일반 관광객 눈에는 일주일 치 여행을 다 흡수한 듯한 나만의 세비야 여행이었다.
낯선 여행자와의 대화를 끝으로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내일은 아침 8시 37분 기차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떠난다.
87유로나 되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오후 2시쯤 바르셀로나 역에 도착할 예정이다.
여전히 발바닥에서는 순례길을 걸으며 느꼈던 열기가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마치 나의 순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세비야의 따뜻하고 반가웠던 햇살을 뒤로한 채, 스페인의 최종 목적지인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마리아도 코루냐에서 카풀을 통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세비야에서 특별한 날을 보냈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비야 자체가 나에게 따뜻하고 여유로운 쉼표를 선사했다’고 답하고 싶다.
그곳에서 하루만 있었음에도 충분히 충전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버스를 타지 않으려 한다.
버스 여행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내일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여정을 위해 이만 글을 줄인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하루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며,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