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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Apr 19. 2018

인생은 선택의 연속: 출산 백일 만에 출국

10개월 아기 엄마의 스위스 유학기 05


출산한 지 100여일 만에, 대학원 개강 사흘 전, 

홀로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선택이었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오며, 결정의 순간이 왔다. 학교에서는 가을학기는 입학 시즌이라 비자 발급이 늦어질 수 있다며 적어도 4개월 전에는 비자 신청을 마치길 권했다. 신랑과 머리를 맞대며 상의하다 주변 지인들의 의견도 들어보기로 했다. 


의견은 제각각이었다. 돌 이전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공부는 다시 할 수 있지만 아기의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며 육아를 우선순위에 둘 것을 권하기도, 어떤 분은 신랑에게 "공부하겠다는 와이프 발목 잡았다가 평생 원망 들을 수 있으니 혼자라도 보내줘라"하고 조언하시기도, 유학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라며 신랑에게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같이 떠나라는 분도 있었다. 1년이라도 늦어지는 게 아쉽고 조급해지는 우리의 나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을 탓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자체가 엄마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출처: http://centonomy.com/why-wealth-is-a-choice


모든 걸 다 갖길 원하는 건 욕심이었다. 현실적인 제약을 인정하고 포기할 부분은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선택에 있어 충돌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았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학업 (커리어) :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 공부는 할 때 해야 된다는 생각(1년 쉬면 다시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경력 공백으로 저숙련, 저임금 일자리만 가능할까봐 두려웠다. 공부하려는 분야가 좋았고, 전망이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 신랑의 직장 (커리어) :  경력관리가 중요한 시점(30대 중후반)인데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생계와 유학자금 마련을 생각하면 재직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30대의 시간 : 박사 학위 받고 정착할 수 있는 나이가 마흔이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다. 40세가 넘으면 자리 잡는 데 제약이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고민.

✓ 아기와의 시간 : 돌 전이 예쁠 때라고들 하시는데.. 은퇴를 앞두신 부모님의 큰 희생이 필요했다. 나중에 다시 아기와 애착 관계를 맺는데 갑절의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 아내, 딸, 며느리로서의 역할 : 죄송합니다. 제가 잘할게요..

 

신랑과 양가 부모님, 가까운 친구들의 응원이 아니었다면 결정을 내리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가족들부터 내 선택에 힘을 실어줬다. 한국의 아기와 부모님들께는 본인이 잘 할 테니, 먼저 출국해서 첫 학기 적응부터 하라는, 누구보다 내 공부를 지원해주는 신랑. 웬만하면 사서 고생 말고 신랑의 월급과 아이 커가는 재미에 만족하며 살라고 하시면서도, 정 네가 그렇게 공부를 해보고 싶으면 일정 기간 육아를 전담해 주시겠다는 친정 부모님. 가장 걱정했던 시부모님도 꿈을 펼쳐보라고, 먼저 가서 자리 잡아 신랑도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지지해 주셨다. 


엄마의 학업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뱃속의 아기에게는 못 물어봤지만, 꿈을 포기한 걸 후회하며 불행한 엄마보다는 힘들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한 엄마가 더 나을 거야, 라며 합리화했다. 여기까지가 현실적인 고민이었다면, 신앙인으로서 사명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확신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선 허술한 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5월 중순, 스위스 대사관 비자 신청 인터뷰 예약을 잡았다. 아기의 비자도 함께 신청하고 싶었으나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여권을 만들 수가 없어서... 만삭의 몸으로 대사관을 찾아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고 학생비자 관련해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학생비자 (3개월 입국비자)는 기다리면 나올 것이었다.





그 무렵, 산부인과에서는 이미 머리 크기가 42주가 넘어버려 몸무게가 3.7kg 정도 된 태아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예정일까지 3주가 남았는데 이대로라면 아기가 4kg가 넘을 것 같아 유도분만을 해야 할 텐데. 최악의 상황(유도 분만해서 장시간 힘들게 진통하고 결국 응급 수술하는)은 피하고 싶었다. 무섭기도 했고. 결국 제왕절개를 선택했다. 혼자 떠나기로 결정하고, 대사관 비자 신청을 한지 열흘 만에 수술 날짜를 잡았다. 자연분만을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냐는 엄마 선배들의 조언도 들었지만, 두상이 큰 가족력과 나의 저질 체력, 출산 후 빨리 회복해 출국해야 하는 일정,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는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수술일 당일 아침 7시에 입원해 8시 50분에 수술실에 걸어 들어가 9시 8분에 3.8kg의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 수술실의 밝은 조명, 하반신 척추 마취할 때의 따끔함, 다리를 벌리고 수술대에 누웠을 때의 긴장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갓 태어난 아기와 볼을 맞댔을 때의 감동. 이 모든 걸 압도하고도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순간은, 뱃속의 아기를 흔들어 꺼낼 때의 느낌(하반신이 좌우로 흔들리고 뱃속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은)과 퉁퉁 불어있는 아기가 생각보다 커서 의사 선생님 이하 병원 직원분들이 "헉!"하고 내지른 탄성(?) 소리. 아기가 이렇게 클 줄은 모르셨단다. 원장님 말씀으로는 절개한 부위가 꽉 낄 정도였다고... 선택제왕이 빛을 발했다. 이후 회복은 시간문제였다.



난생처음 겪는 수술부위 통증을 느끼며 (그래도 산통보다는 덜 아프지 않았을까, 진통을 안 겪어봐서 모르겠다), 면회 때마다 아기 얼굴 보고, 수유콜 오면 신생아실 내려가서 좌절하고 (낳기만 하면 모유가 콸콸 나올 줄 알았다), 부어오르는 젖몸살에 신음하고, 배는 아픈데 때가 되면 어김없이 요동치는 나의 위장에 놀라고, 맛있는 병원밥에 감탄했다 (미역국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했다니!). 입원 3박 4일이 지나고, 산후 조리원으로 이동했다. 이제 나는 중요한 걸 결정해야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출국 전까지 아기와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선택의 기로에 놓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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