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의 시간, 고이 접어둘게

2부. 나의 걸음으로 새기는 길

by 윤슬

슬며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점프한다.

“엄마, 딱 5분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아침처럼 명랑하다. 잠들기 전 내 방 침대에 누워있다 제 방으로 가는 의식은, 초등학교 1학년 잠자리 독립 후 중2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잠은 따로 자니 독립은 독립이다. 5분만 이라고 시작되지만 30분, 1시간이 되기도 하고 잠드는 날도 있다. 아이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엄마 침대는 토퍼가 있잖아. 엄마 이불은 푹신해서 느낌이 좋아. 여기서 잠들 듯 말 듯하다가 내 방으로 가면 바로 잠들어. 여기가 수면제야. 엄마가 잠들기 전 책 몇 페이지 읽는 것처럼.”

말은 청산유수다. 듣다 보면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엄마 방에 좀 있다가 가는 게 어때 하고 오늘도 허락한다.

점심에 나온 메뉴가 너무 맛있었는데 친구가 안 좋아한다며 하나를 줘서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 축구하는데 연속 두 골을 넣었다는 자랑, 내일 아침부터 수학이 연달아 두 시간이라서 한숨 나온다는 이야기, 시험 끝나면 롯데월드 가도 되는 지 허락 받기, 이번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두산이 못 나가서 속상하다는 이야기까지. “이제 그만 좀 하자. 벌써 새벽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면 아이는 이제부터 말하는 사람은 가진 돈 다 주기로 하자며 눈을 감고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린다.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도 오간다.

“엄마 나 너무 피곤해.”

“피곤하지? 이제 시험 이틀 남았구나.”

“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번에 또 산을 넘는구나. 살다 보면 작은 산, 높은 산 넘으면서 살게 돼.”

“산은 언제 다 넘는데?”

“넘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크고 작은 산은 언제나 있어. 그게 삶이야. 근데 가다가 잔잔한 호수도 만나고 예쁜 꽃밭도 만나. 힘든 산을 넘고 났을 때 그게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밤이라 감성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런 대화가 어색하지 않다. 평소 같았으면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아이도 손사래를 쳤을 텐데.

얼만큼 더 커야 엄마를 찾지 않을지, 빨리 커버렸으면 하는 시절이 있었다. 아이와의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여겼던 시절이. 어느 날 보니 아이는 훌쩍 컸고, 독립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엄마 손!"이라고 말하면 덥석 잡던 아이가, 좋아도, 무서워도,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그렇게 엄마 손을 찾던 아이가, 이제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는다. 친구들이 보면 어리다고 생각할까 봐 잡지 말자고. 그렇게 5학년 이후로는 말랑하고 따뜻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일은 없다. 상처가 있을 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쓰다듬어주긴 하지만.


잠들기 전 방문을 두드리는 아이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그날이 오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겠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방문을 바라보는 일은 며칠간 이어지리라. 양육의 최종 목적지는 독립이고, 감사하게도 아이는 한걸음 씩 내딛고 있다. ‘언제면 엄마 안 찾을래’ 말하면서도, 그날이 조금 더 늦춰지기를 바란다. 아이를 향한 내 시선은 독립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고 과속하기도, 지체되어 느리게 가기도 한다. 내게 온 귀한 손님을 잘 대접했다 보내야 하는데, 장기 투숙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면 안 되는데, 악덕 업주가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생일이나 어버이날, 결혼기념일에는 아이에게 강제로 편지를 요구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교육과정에 부모님께 편지 쓰는 활동이 있어서, 두세 줄로 된 형식적인 문장이지만 요구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었는데,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도통 갖고 오질 않아 직접 요구했다. 다른 어떤 선물도 필요 없으니, 편지를 달라고. 쓰기 싫다고 요즘 누가 편지를 쓰냐고 버티다, 제 용돈이 나가지 않아도 되니 순순히 따르기 시작했다. 편지에는 지금 아이가 느끼는 생각과 기분, 엄마를 향한 마음, 존대를 하는 제법 의젓한 효도의 자세, 동글동글한 아이의 글씨체도 있다. 아이와 나누는 일상을 고이 접어서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아이의 손이 그리울 때, 밤 수다가 미치도록 하고 싶을 때, 그때 아껴서 하나씩 보려는 마음이라는 걸, 아이는 알까?


“엄마는 말이야, 너와의 지금을 기억하고 싶은 거야. 지금 네가 느끼는 마음, 엄마에 대한 너의 생각,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너무 소중해서, 너무 귀한데 잡아둘 방법이 없어서, 그걸 대체할 방법으로 편지가 생각난 거야. 앞으로도 일 년에 딱 세 번만 협조 좀 해줘. 그렇게 해 준다면 밤 수다 시간은 좀 연장해 줄게. 어때? 괜찮은 협상이지?”


오늘 밤에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올까? 아이의 하루가 눈 앞에 펼쳐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꿈에 아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밤 수다 때문이겠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저 귀요미와 수다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