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그 말이 뭐라고.

2부. 나의 걸음으로 새기는 길

by 윤슬


신호가 바뀐다. 엄마가 내 손을 잡는다. 오랜만에 느껴본 손길이라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어릴 적 엄마는 길을 건널 때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와 하는 유일한 스킨십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기에, 이것마저 없었다면 진짜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에 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셋은 엄마를 쏙 빼닮았네. 하나는 아빠 판박이고.”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다. 엄마를 닮은 곳 하나라도 찾아 나도 엄마 딸이라고 증명하고 싶은 아이에게, 아빠 판박이라는 말은 잔인했다. 언니들은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다 엄마와 손가락, 발가락이 닮았다는 걸 알게 된 날은 안도했다.

왜 나는 아빠를 닮았을까? 아빠는 하늘로 가고 없는데. 엄마는 자주 먼저 간 아빠를 원망했다. 살아있을 때도 술에, 욱하는 성격에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하루가 멀다고 잔소리를 퍼붓는 시어머니에, 애들까지 두고 먼저 갔다며. 아빠에 대한 원망은 나에 대한 원망으로 느껴졌다. 이런 날이면 엄마의 기분을 살폈다.


사랑받지 못하고 컸다는 생각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꽤 크게 작용했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 오거나 호감을 표현하면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왜 나를 좋아하지? 나에 대해 뭘 잘못 알고 있나?’ 하고 의심했다. 애인에게, 남편에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달라고, 나를 더 봐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하는 내 모습을 마주하고는 어릴 적 채워지지 않은 것들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받으려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대부분의 상황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 싫은 제안을 받아도 고개를 끄덕였고, 기분이 나빠도 웃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도 거절당하는 상황을 먼저 떠올렸다. 늘 내가 먼저가 아닌 상대의 감정을 살폈다. 감정은 자주 중립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서른 후반의 어느 날, 엄마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냐고. 큰 숙제를 언제까지 짊어지고 있을 수 없었다. 용기를 내서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른 말만 하고 끊었다. ‘물어보는 건데 뭐 어때’ 하고 생각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와는 내면에 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어서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있었고, 다 지나간 일 꺼내서 괜히 분란을 만드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을까 무서워서다. 뭘 그런 걸 고민하냐고 나의 고민에 대해 가벼이 여기거나, 아니면 다른 아이들보다 덜 사랑한 면이 있다는 말을 들을까 봐. 그래도 내 생각에 오류가 있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엄마 딸이 맞으니까.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서 TV도 보고, 엄마 가슴에 푹 안겨서 사는 게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그렇게 지금이라도 좀 더 가까이 엄마를 느끼고 싶어서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엄마는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게 있다고 했다. “아고 아고 예쁜 내 새끼.” 하고 유난 떨며 안아주는 것을 못 했다고. 물고 빨고 하고 싶었다고. 아빠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 밥해 먹이느라 할머니(엄마의 시어머니)가 우리들 양육을 도맡았는데, 버릇 나빠진다고 아이를 안지 못하게 하셨다. 아이들과 같이 자는 것도 할머니였고. 할머니는 손녀들의 사랑도 독차지하고 싶어 하셨다고. 그래서 외출 할 때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길 건널 때 엄마가 손을 잡아주던 일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엄마가 미안하다. 표현을 몬했다. 와 안 이뿌겠노? 안 그렇겠나? 니 셋째 아이가? 내도 셋째다.” .


그리고 24살의 선자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는 말 많고 활발한 성격이었고, 당시 기준으로는 노쳐녀였다. 부산이 고향인 엄마는 아빠와 중매로 만났고, 만난 날 결혼이 결정되었다. 제주 가서 딱 일 년만 살자는 약속을 아빠는 지키지 않았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약속도. 결혼과 동시에 제주로 내려왔고, 집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아무도 치우지 않고 가버리거나 잠들었다. 엄마는 시집온 첫날 밤새 설거지를 했다. 아빠는 공장의 공장장이었고, 엄마는 공장 직원들의 끼니를 챙겨야 했다. 지붕도 없는 공장 한켠에서 밥을 짓다 보니 여름에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겨울에는 동상에 걸렸다. 일만 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시어머니 재촉에 5~6년 사이 4자매를 낳았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으셨다. 딸을 낳았다고. 어느 날은 제주살이가 섬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친정으로 무작정 가는 길에 아빠에게 들켜 돌아오기도 했다. 엄마는 언제라도 친정에 갈 수 있게 비행기 표 살 돈은 숨겨두었다. 아빠는 아이들에겐 자상했지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타향으로 와서 사는 것도, 매일 공장에서 밥을 해대는 일도, 빠릿빠릿하게 일하라는 할머니의 고함이, 내리 딸만 낳은 것이, 엄마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10년을 함께 산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어느 날은 샤워하고 나왔는데, 투명하고 하얀 피부가 너무 예뻐서 슬펐다고 하셨다. 아직 젊은데 혼자가 되어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 서러웠으리라. 가끔 우리가 다투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옷더미를 던지거나 우리에게 달려와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프진 않았는데, 엄마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당황스러웠다.

생계를 위해 문방구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한창 학용품이 필요한 시기라 선택한 장사였지만,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있어 수입이 좋지 않았다. 7년간의 문방구를 정리하고 분식집을 열었다. 김밥이며 떡볶이, 쫄면, 만둣국은 준비한 재료를 매일 다 소진할 만큼 장사가 잘되었다. 1년을 하고 엄마는 좌골신경통을 얻었다. 엉덩이와 다리의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움직이거나 걷기 힘들어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많이 자랐고, 하나씩 독립했다. 막내를 결혼시키고는 빈둥지 증후군이 찾아와 식욕이 없고, 불면의 날이 계속되었다.

두 시간이 넘는 통화에서, 엄마의 시간이 온통 어둡기만 해서, 엄마는 언제가 가장 좋은지 물었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 나는 맨날 그대로다. 그냥 하루하루 사는 거지.”

좋고 나쁨을 느낄 새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는 말일 테지만, 만약 엄마가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힘든 하루를 살아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무던하게, 덤덤하게 아이들 키우며 살아낸 시간이었다. 엄마는 깊은 우울을 누르며 표현에 무뎌졌다.


과거의 엄마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엄마가 어떤 상황이든 내가 느낄 수 있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상황이 그 시절 내가 느낀 공허함에 대한 구실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린, 그때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니 마음이 아렸다. 젊은 엄마에게 펼쳐진 고난이 까마득했다. 과거의 엄마는 살갑지 않았지만, 엄마의 위치에서 발버둥 치던 시간이었다. 얼마나 고됐냐고, 친정에 자주 가지 못해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냐고 등을 쓸어내려 주고 싶었다. 엄마가 왜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았고, 과거에 집착하며 미련을 가질 생각은 없다. 나는 성인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의 대면이 필요했던 거니까.


엄마는 결혼에 대해 후회는 안 한다고 했다. 반짝거리는 너희들 넷을 얻었으니, 태어나서 그것만큼 잘한 일이 없다고 하셨다. 앨범 속 엄마의 모습을 본다. 신혼여행지인 경주의 한 꽃밭에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이었는지, 웨이브 있는 긴 머리와 분홍빛 원피스가 하늘거린다. 엄마의 꽃 같았던 시간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스몄다.

그 통화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말한다.

“우리 딸 사랑해. 잘자. 좋은 꿈 꾸고.”

간지러운 말이지만 곧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만큼 컸어도 여전히 엄마의 사랑은 좋은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