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나의 걸음으로 새기는 길
왜 내 연애 세포는 죽지 않는 걸까? 연애 세포는 기한이 없나?
나이가 든다는 사실보다 힘든 건 마음이 늙고 있지 않는다는 거다. 마흔이 넘었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시작되는 연애를 보면 배꼽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올라온다. 깊어가는 사랑을 보면 손끝만 닿아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던 그때.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라고 아무나 붙잡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 연애의 결과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던 연애 기간. 그야말로 콩깍지가 씌어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 봤다. 말수가 없는 것은 가벼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좋았고 욱하는 성질은 남자가 그 정도 고집은 있어야지 하며 정당화했다. 지금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고, 예고 없이 화를 내서 자주 다투고 있다.
그럼에도 내 죽지 않는 연애 세포 덕에, 이 연애 세포를 먹여 살려야 하기에 나는 노력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과 연애할 수는 없으니까(가끔 칠순 잔치를 한 후에는 남사친을 만나는 상상을 한다. 다 늙어서 불륜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것도 피곤할 테니). 연애는 하고 싶고, 미우나 고우나 상대가 정해져 있다.
남편과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는 게 가능할지, 방법이 있기나 하는 건지 의구심과 고민을 반복하던 차에 가능성을 보았다. 어느 날 남편이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았냐고 물어왔다. 나는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오고, 할머니를 보살피고 나서 불 꺼진 방에서 커피믹스를 타 마시는 장면이 마음 아팠다고, 볼 때마다 목 안이 따끔거리게 만드는 드라마라며,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다고 짧은 평을 했다. 남편은 요즘 정주행 중인데 드라마를 안 보는 본인이 빠져들고 있다며 좋은 드라마 같다고,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했다. 그때 알았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도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걸, 맞장구치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식 이외의 공통의 관심사가 생긴다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그야말로 가능성을 본 순간이었다. 그게 무엇이든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출근 전 내 책꽂이를 보며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골라 간다. 독서에 그리 취미가 없었는데 최근 2년간 아이의 독서 습관을 위해 한 달에 2차례 주기적으로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었고 20~30권 정도의 책을 한 번에 반납하고 대출하느라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도서관에 함께 다녔고, 요즘은 남편 책상에도 가방에도 늘 책이 있다. 무릎을 쳤다. '그래! 책도 있었지.'
책이라는 것을 두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연애 시절처럼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한마디 한마디에 맞장구치며 감응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드라마로 가능성을 보았고 남편이 책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으니 밑져야 본전, 해볼 만했다.
책만 잘 고르면 될 일이었다. 어떤 주제여야 할까? 무겁지 않으면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책. 관심사나 취미로 일치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 비슷한 것이 없으니까. 남편은 나와 함께 골프를 치고 싶어 하고 나는 남편과 산책하고 싶다. 나는 골프 스윙 소리가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 같아 무섭고 남편은 목적 없이 걷는 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술을 즐기고 나는 커피와 빵을 즐긴다. 나는 맥주 한 캔이면 취하고 남편은 단 음식엔 손을 대지 않는다.
굳이 공통점을 꼽으라면 우리는 각자의 배우자, 부부라는 거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면 공통의 관심사 찾기는 해결이다. 시중에 부부에 관한 책은 부부 대화법, 부부관계 개선을 위한 책이라 당장 뭔가 공부해야 할 것 같고, 실천해야 할 것 같아 다소 부담스럽게 작용할 수 있었다. 부부에 관한 책이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은 나이가 들어서도 연애하면서 사는 노부부에 관한 것이다. 「당신과 이렇게 살고 싶어요_구딩 노부부처럼」 그림 에세이의 긴숨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마냥 환상을 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우리 부부 같아요’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허황된 꿈만은 아니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어쩜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왔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연애를 꿈꾸는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자와 함께 맞고 싶은 아침과 일상, 나누고 싶은 사랑과 계절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은 노부부의 일상을 삽화와 함께 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포옹으로 시작하고, 숨어 있다 놀라게 하는 장난을 한다. 야식 먹고 싶은 마음을 눈빛으로 알아채고 아무 날도 아니지만 꽃을 선물하며 특별한 날로 만든다. 노년의 삶에 한계를 짓지 않고, 걱정하는 노년보다 색다른 재미있는 노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그려볼 수 있는 책이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한번 읽어볼래?” 하며 책을 건넸다. 그날 퇴근 후 남편은 “당신도 이 책 읽었어? 딱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이야. 우리도 이렇게 살자.”라고 말했다.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이 굳었다. 생각도 굳었다. 꿈같은 장면이었다. 내 연애 세포가 오랜만에 과식을 한 순간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드는 감정이었고 너무 오래 기다린 설렘이었다. 책을 두고 마주 앉았다. 책장을 넘기며 우리도 이렇게 커플룩을 입자고 아침에 눈 뜨면 같이 스트레칭하자고, 이렇게 장난치며 놀자며 한참을 이야기 나눴다.
책을 놓고 이야기 나누는 순간만큼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우리의 공통 관심사를 담은 책을 찾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내 연애 세포의 끼니쯤은 충분할 것 같았다. ‘어떤 책이 좋을까?’ 오늘도 내 연애 세포의 먹이를 찾아 나선다. 다가올 두근거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