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봄, 나는 머리를 기증한다

당연했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순간

by 성장썰
사진 : Unsplash의 Anastasiya Badun




머리카락 기증을 결심하다


나에게 긴 머리는 귀차니즘의 상징이다. 꾸미는 데 신경 쓰기 싫어 대충 묶고 다니다 보니 머리는 점점 길어졌다. 단발머리는 더 손이 많이 간다는 생각에 차라리 기르는 쪽을 택했고, 어느새 1년 가까이 미용실에도 가지 않았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머리카락 기증을 위해 머리를 기르는 한 남자아이를 보았다. 여자아이처럼 곱게 기른 머리가 눈길을 끌었고, 그 모습 덕분인지 문득 거울 속 나의 머리카락이 크게 다가왔다. 이미 골반에 닿을 만큼 자라 있었고, 30cm를 잘라내도 중단발 정도는 남을 길이었다. ‘나도 기증해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가위를 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긴 머리를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잠시 욕심을 부려 결심을 미룬다. “그래, 6개월만 더 기르고 내년 내 생일에 자르자.”



그 뒤로 거울 앞에 서면 잘린 머리카락이 어디로 갈지, 누구에게 닿을지 상상하게 된다. 암 투병 중인 어린아이들이 떠오른다. 대부분 머리를 짧게 밀어버린 모습이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라푼젤처럼 긴 머리를 땋고 예쁜 드레스를 입는 게 가장 큰 소원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단순히 귀찮아서 길러온 머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감을 되찾게 하는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네이버 웹툰 「모발 이식 서비스」를 보았다. 탈모로 고통받던 주인공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자신감 없이 지내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얻은 뒤 완전히 달라진다. 머리카락은 단순한 외형을 넘어, 삶의 태도와 직결되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그렇다면 내 머리카락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용기와 생기를 불어넣는 재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머리카락에서 시작된 생각은 내 일상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에겐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바람일 수 있다. 수도권에서 누릴 수 있는 도시의 자원들, 여전히 건강하신 부모님, 나를 아껴주는 연인, 활력을 주는 직장, 스스로 선택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삶,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강한 몸. 떠올리기만 해도 감사함이 끝도 없다. 나는 이미 수많은 소중한 것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아직 머리카락을 자르지는 않았지만, 내년 생일 즈음 기증할 날을 떠올리니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저 불편함을 피하려 길렀던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 소중히 쓰일 것을 생각하니, 일상 속에서 하찮게 여겼던 것이 다른 빛을 띤다.


기증을 결심한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큰 선물을 얻었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사실,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할 수 있다는 깨달음. 곧 다가올 그날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내 주변에 놓인 소중한 것을 더 자주 의식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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