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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ur mind Mar 24. 2021

나의 총명한 할머니 이야기.

<나의 할머니> - 나의 이야기.

"너네 엄마는 얼마나 살림이 야무지니. 요리 잘하지, 집도 잘 꾸미지, 화초도 잘 키우고 손도 빠르고." 


어릴 적 할머니의 대사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엄마에 대한 칭찬이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편하게 대하는 분이셨고, 엄마와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엄마에게는 시어머니가 어땠을지는 몰라도... 젊을 땐 꽤 꼬장꼬장하셨었고, 우리 엄마가 첫아이를 낳고 백일도 채 안되었는데 겨울에 손빨래를 시키셨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손녀딸에게는 언제나 그 아이의 엄마에 대해 칭찬의 말만 하셨던 것은 감사한 일이다.


내가 본 할머니의 아침 일과는 깨끗한 흰 천에 단정하게 싸놓은 참빗을 꺼내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곱게곱게 빗으신 후, 뒤로 쪽 지어 단장을 하시는 모습이다. 뒤로 묶은 머리만이 익숙한 모습인데 아침마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의 할머니를 보는 일은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종일 말씀이 끊이지 않으셨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이야기하셨고, 사돈의 팔촌까지, 동네의 누구의 사촌까지 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종일 이야기하셨다. 기억력이 어찌나 좋으신지 한번 들은 이야기는 잊지도 않고 그대로 이야기하셨다. 나에게 제일 많이 하셨던 이야기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코가 우뚝하고 허연 게, 아주 잘 생긴 아가가 태어났는데... '거 하나 달고 나왔으면' 오죽 좋니. 그게 그렇게 아쉽더라."


엄마에게도 "아들을 낳고 싶어 가진 아기였는데 딸이길래, 간호사가 와서 안겨주는데 너무 화나서 쓱 밀어버렸어."라는 출생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꽤 들었던 터라 할머니의 그 반복되는 아쉬운 레퍼토리는 그렇게 서운하지도 않게 들렸다. 그리고 그 잘 생긴 아가가 너무 기특하고 예뻐서 매일 등에 업고 다니신 분이 나의 할머니라고 한다. 엄마 말로는 그때 너무 업고 다니셔서 내 다리가 살짝 휘기까지 했다나.


아무튼 그렇게 야무지고 말씀도 잘하시는, 꼿꼿하고 대단하신 나의 할머니에 대한 결정적 사실 하나를 나는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글을 못 익히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할머니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거나, 안타깝다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저 내게 '충격적으로 놀라운 일'로 여겨졌다. 첫째는 너무나 야무지시고 총명하신 분이라고 늘 느꼈기에 글을 못 읽으실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두 번째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부분은 아직도 미스테리인데...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신 걸까, 아니면 손녀인 내가 할머니의 총명함에 눈이 어두워 그저 생각도 못했던 걸까.


그렇게 '글을 읽을 줄은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셨던' 나의 할머니는 아흔 살을 넘기고 많은 분들이 '호상'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의 시골로 내려가는 날... 바로 그 날, 나는 내가 임신했음을 알았다. 할머니의 장례가 준비되고 있는 시골집 마당에 서서 친정엄마에게 처음으로 작은 소리로, 조용히 임신했음을 전했다.


바로 그 순간 나를 휘감는듯 했던 특별한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마치 할머니가 떠나시면서 선물 하나를 내 품에 넣어준 것만 같은 막연한 기분... 시골 밤의 어둑한 배경과 풀벌레 소리, 시골 특유의 나무 냄새 같은 것들...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생명 하나를 내 몸에 품었다는, 생애 처음 느끼는 특별한 감정들.... 그 모든 감정과, 감각들이 뒤섞이고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영혼이 그 집을 막 떠나는 순간 할머니의 며느리이자 나의 엄마에게 새로운 생명이 왔음을 속삭이던 그날의 장면은 사진처럼 나에게 새겨져 있다. 


그렇게 '나의 총명한 할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에게 온 소중한 생명은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되어 이 브런치에 나와 함께 글을 쓰고 있다.


공주 시골집 마당에 소녀가 그린 그림들.


* 글: 나영/ 인스타그램 @etesian_wind

* 그림: 찰스/ 인스타그램 @slz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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