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써보는 나홀로 2박3일 - 둘째날 이야기 (6)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것 같은 기분을 준다는 데 있다. 사이사이 사진을 많이 찍고 한정된 시간 내에 여러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니까, 같은 하루를 살아도 좀 더 많은 일들로 채워지고 무채색의 시간보다 컬러로 칠해지는 것 같은 순간들이 아주 많아진다.
둘쨋날 하루를 돌아보아도 무언가 아주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있네. 사실 종일 놀기만 했는데도 보람찬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선물을 주어야지? 이 밤을 그냥 보내기는 아쉬우니까.
그리하여 9시반쯤, 숙소 맨 위층에 있는 루프탑 바에 갔다. 마지막 일정으로 고이고이 남겨놓은 곳. 1층 프론트에 24시까지 오픈이라고 쓰여있어서 내일 머리가 아프던말던, 잔뜩 마실테야, 라는 생각을 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직원이 나를 맞아주며 '30분 뒤에 닫을건데 너 그래도 마실거니?'라고 한다.
이런...월요일이여서일까. 오늘은 10시에 닫는다고 한다. 흥청망청(?) 마시고 알딸딸한 상태로 방에 들어와 뻗어서 기절하듯 자고 싶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쉽지만...
41층에 있는 야외라서 시원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 호젓하게 있을 수 있었다.
나는, 혼자인 것을 좋아해서 관계가 어려운 걸까, 관계가 힘들어 점점 혼자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둘 다 해당되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살짝 도망치듯 짐을 꾸려 바닷가 호텔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후자의 영향이 컸겠지.. 싶다.
떠나오는 날,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사람을 A라고 하자. 나는 A가 힘들고 예민하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A의 말과 태도에 움찔? 할 때마다 스스로를 타일렀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을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상처받지 말자. '라고.
그런데 그 날, A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속에서 A는 밝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사람들의 공기에서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는 A와, 그들이 알고 있는 A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나에게 유난히 날이 서 있었던 것이 맞는데, 나는 나 혼자서 상처안받으려고 애써 그를 포장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고 있던 것이다.
어쩌다보니 사람의 관계나 마음을 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인지라 파고들어 생각하다보면 짐작되는 이유들은 물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유라는 건, 당사자 스스로도 아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일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없이 가깝고 싶지 않은 사람, 마음에 안드는 사람의 명단에 내가 올라가 있는 것이겠지. 사실 그 마음까지도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자꾸 걸려넘어지고, 체하는 쪽은 나였다.
A는 좋은 사람인걸까 나쁜 사람인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일거고,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테니까. 그 시선으로 그를 보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알고 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내가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줄여야 한다는 것도.
사실 나에게는 A뿐만 아니라... B도, C도 있다. 그런 문제들은 넘쳐난다. 그런 문제들이 여러가지가 생기면 다시 또 돌고 돌아 나의 문제인가? 로 귀결된다. 그걸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내 사회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기장을 뒤지다보면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그런 일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그렇다면 역시 나의 문제인가...도돌이표.)
이렇게 좋은 순간에,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매우 소모적인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을 실컷 하면 할수록 무언가 또렷해지기도 했고, 깊이 생각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그림들을 받아들이고나니 오히려 담담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 여행을 다녀온 뒤 일상으로 돌아온지 2주가 지났는데. 나는 요즘 감정적인 상태에서 많이 벗어나 매우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41층 루프탑 바에서 실컷 흘러넘치게 놓아둔 생각들이, 바닷가에 흩뿌려진 모양이다.
칵테일은 맛있었다. 한잔 더! 할수도 있었지만 거기서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매순간 한잔씩만 마셨다. 첫날 바닷가에서도 맥주 한잔, 방에 들어와서도 맥주 한캔, 둘쨋날 키코비치에서도 맥주 한잔, 마지막 밤 칵테일도 한잔.
너무나 모범적인 여행객이네.
(그래서 루틴을 지키느라(?) 자기 전에도 맥주 한캔을 더 마셨다.)
어제도, 아침에도 걸었던 해변가를 다시 걸었다.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이틀동안 실컷 걸은 그 모래사장을 또한번 감동하며 걸었다. 이 순간, 또렷하게 생각했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라고.
마음이 조금 시큰해지고 뭉클해지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없이, 작은 일로 너무다 커다랗게 행복해지는 순간을 만나면, 사람은 좀 더 감동하게 되는가보다. 너무 좋아 행복하다가, 그 마음의 끝에 조금 처연하고 슬퍼지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 슬픈 기분도 싫지는 않았다.
(아, 참고로 나는 F성향이 98점인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