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치민 - 이나영
아침마다 하루 일정을 확인하고, 사이사이 짬이 날 때마다 무엇을 할지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 다이어리를 정리할 수도 있고, 필사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모든 일들이 준비물이 필요한 일이라는 점이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었다 뺐다, 두꺼운 책을 넣었다 얇은 책을 넣었다, 노트와 필통을 챙길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거의 매일 대부분 들고 나간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가방이 무겁다. 성당에서 일을 하고, 상담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당 사무실 열쇠와 상담실 열쇠를 챙겨야 하고, 성당 핸드폰과 개인 핸드폰이 따로 있어 핸드폰도 두개를 들고 다닌다. (한국 전화번호가 들어 있는 핸드폰도 따로 있어서 원래는 전화기가 3개이다.) 노트북이나 핸드폰에 기록해도 되지만 손으로 적어야 마음이 놓이는 아나로그형 인간이라서 좋아하는 펜이 들어 있는 필통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템이다. 핸드백 하나만 손에 들고 가볍게 다니는 멋쟁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만, 나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포기하고 살았다.
오늘도 노트북도 넣고, 다이어리도 넣고, 책도 넣고, 핸드폰과 안경을 넣은 가방을 두개 들고 나왔다. 비는 시간이 생기면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라는 생각은, 내 일이 바빠질수록 더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다. 좋아하는 일들이 일상에 밀리고 치여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꾸 미루게 되는 날이 많아진다. 책을 일주일 내내 가방에 넣은채로 다니다보면 책이 가방 속 물건에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쉽게 낡아지곤 한다. 그렇게 상처가 나는 책을 보는 건 달갑지 않은 기분이다. 짬날 때마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읽는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할 것 같다. 글쓰는 시간도 그렇고 일기를 쓰는 시간도 그렇고..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시간을 미리 빼어놓고, 꼭 채워가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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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가방에 초록색 아이템이 많아지고 있다. 초록색 다이어리, 초록색 가죽 지갑, 초록색 우산... 이번 여름방학, 소현이가 파리의 Merci에서 사다준 천가방도 초록색이다. 물건을 살 때 대부분 검정색이나 무채색만 사곤 했는데 .. 최근 한두해동안 나도 모르게 내 삶이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분탓일 수도 있지만 검정색 옷을 많이 입고, 무채색 물건만 들고다닐 때보다 마음이 밝고 씩씩해지는 것 같다. 샤프가 필요해서 하나 샀는데, 색깔을 한참 고민하다 내가 평생 사본적이 없는 샛노란색으로 골랐다. 그 샤프를 쓸 때마다 신선하고 새로운 기분, 밝아지는 기분이 된다. 가볍다는 이유로 오래 들고 다니던 땡땡이무늬 우산이 고장이 나서 새로 사면서 별 고민없이 초록색으로 주문을 했는데 비오는 날마다, 우산을 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 삶에 기운을 첨가해주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다가, 이 나이가 되어도 이렇게 소소한 일들이 기쁨이 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들이 많은 것, 내 취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내 삶에서 중요한 일이다. 초록색을 좋아하고 스누피를 좋아하고, 초승달을 좋아하고 비를 좋아하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가 많은만큼 감탄하고 즐거워할 일들도 많다. 스누피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사들고 와서 건네주는 이들이 내곁에 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나영이 지금 기분 좋겠네' 라고 메세지 보내주는 친구가 있고, 하늘에 손톱달이 걸려있기만 해도,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만 해도 금새 와와! 하고 신나는 기분이 되어버리니까.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 가방 속에 이것저것 잔뜩 들어 무겁게 이고지고 다니지만, 언제든지 시간만 허락한다면 가방 속을 휘휘 저어 내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일들을 골라내어 할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다.
앞으로는 가방 속 물건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무거운 가방을 이고지고도 잘 걸어다닐 수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살자고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