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시고 한밤에 버스에서 내려 한남대교를 건너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림픽대교를 건너다 다리를 지키는 초소 경비원에서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 나이에 이런 말을 쓰려니 너무 오그라들지만, 그시절, 진지하게 꿈을 꾸기도 했다. 첫키스를 한강다리 위에서 하고 싶다고.(결국 이루지 못했다.)
늦은밤 버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 버스 창에 기대어 바라보는 한강이, 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좋았다. 서울이 좋은 이유 중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마 한강이었던 것 같다.
처음 호치민에 왔을 때 반가왔던 점 중 하나는, 이곳이 물의 도시이고 강물이 흐르는 도시라는 점이었다. 메콩강 줄기는 정말 길게 뻗어있어서, 도시 어디를 다녀도 금새 강물과 만나고 다리를 건너게 된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한강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지 이 도시를 흐르는 물줄기가 친숙하고 마음에 들었다. 베트남에 처음 와서 살았던 아파트는 바로 앞에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더운 날씨에 입맛을 잃고,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기의 날들, 소통이 되지 않는 낯선 도시에 온 막막한 마음들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물을 보며 어찌어찌 견디기도 했다.
그 강변을 따라 베트남 사람들은 열심히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싣고 바람을 가르며 휙휙 지나치곤 한다. 매일 아침, 강변을 따라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연인들은 데이트를 하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한강과는 다르게 강물은 누런색일 때가 많고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쓰레기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강물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었으리라.
새벽마다 강을 따라 펼쳐진 가로수 길이나 공원을 많이 걸었다. 해가 막 뜰 무렵의 시간에는 여름나라의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 얇은 반팔 티셔츠만 입고 강바람을 맞으며 걷고 뛰는 것이 1년 내내 가능하다는 점은 물의 도시 호치만이 가진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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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많다. 경기도 다낭시라 불리우는 다낭,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나트랑,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푸꿕, 한국의 가을날씨를 닮은 달랏...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은 다낭 근처에 있는 호이안이다.
처음 호이안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곳만의 분위기가 확실하다는 느낌이었다. 노란색 붉은색 건물들과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넓은 강이 그곳에도 있었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해질무렵부터 하나 둘 켜지는 알록달록한 등이었다. 그 화려한 불빛들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며 황홀해하고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이국적인 풍경에 반해버렸다.
베트남에 살면서 네 번 정도 호이안을 방문했다. 이제는 도시 전체가 관광으로만 먹고 사는구나, 싶을 정도로 관광객을 위한 가게와 음식점들이 온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모습들조차 호이안이 가진 매력이라 여겨질만큼 도시는 아름답다. 나는 한적하고 호젓한 장소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채워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듯한 공간을 좋아하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작은 호이안의 올드타운은 여러나라 사람들이 뒤섞여 거리를 메워놓는 모습도 근사하다. 골목골목 켜진 가로등을 따라 다니다보면 재미있는 소품이 가득한 가게들이 있고,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을 따라 배와 소원등이 두둥실 떠다닌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이 도시를, 언젠가는 꼭 혼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로 빼곡히 채워진 곳을 혼자 이리저리 떠돌며 사람들 속에 묻혀 있고 싶고 나도 그 곳의 풍경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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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사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운명처럼 이곳에 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십년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살고 있다. 호치민의 햇살이 아이들을 키워냈고, 우기와 건기 두개의 계절뿐인 도시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하늘의 구름 모양을 올려다보는 일과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걷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이 도시는 빠르게 변하고 눈에 보이는 속도로 세련되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다른나라에서 살다보면, 처음에는 익숙해지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나면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여행지일텐데 너무나 무심하고 당연한 마음으로 덤덤하게 이 도시 속을 걷고 있는 나를 깨달을 때가 있다.
언젠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지인이 말했다.
"우리는 야자수를 보아도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는 한국 사람이 되어버렸잖아요."
그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아, 가끔 이 나라의 더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한번씩 떠올려보곤 한다. 그리고 요즈음 나는 이 나라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고 있다. 가보지 않은 골목을 들어가보고, 구글맵을 요리조리 뒤져 궁금한 곳을 찾아가보기도 한다. 사진으로 찍고 기억해두려한다.
마음 한켠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내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멀리 떠나 붕 떠있는 것 같은 상태로 살고 있는 내 삶이 조금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