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잠에서 깬 지 20분이 넘었지만, 승우는 아직 제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조용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하얀색 천장 벽지 위로 반짝이는 선들이 보였다. 저기에 저런 무늬가 있었던가 승우는 새삼 생각했다. 창 옆으로 길게 달린 커튼 봉이 보였다. 이 아파트에 이사 와서 커튼을 달기 위해 저 커튼 봉을 엄마와 마트에 가서 사 왔었다. 승우는 커튼 봉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붙어있는 하찮은 물건들, 지금껏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젠 반대였다. 하찮은 이승우가 사라져도 이 방은 평화로울 것이다. 아무도 그를 그리워하지도 절절히 울지도 않을 것이다. 밖에서 엄마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 딱 한 사람 빼고.’
승우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날짜가 다가오니까 별생각이 다 드네…’
승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이 지나고 이렇게 10시쯤엔 길거리에 사람이 드물었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승우 자신도 이 시간에 이렇게 한가하게 집에 있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승우가 창문 옆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수첩을 꺼내 펼쳤다. 그는 수첩의 한 페이지에 적어 둔 목록을 확인했다. 승우는 목록을 하나씩 읽으며 선을 그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서 아는 형을 만나면 계획했던 일은 다 마친다. 하지만 승우의 머릿속엔 여기에 적어 놓지 않은 한 가지 일이 맴돌고 있었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갔다 올게.”
“…네.”
대답하며 승우가 방에서 나갔다. 엄마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등에 멘 작은 배낭도 보였다.
“시장 가세요?
“응.”
“나도 한번 같이 가려고 했는데.”
“갈래?”
“아니요. 오늘은 학교에 서류 만들러 가야 돼요.”
“그럼, 나중에 가.”
엄마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삐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현관의 전등이 꺼지자 좁은 공간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중...’
방으로 되돌아가던 승우의 머릿속에서 20년 전 기억이 켜졌다.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양복을 입은 아빠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승우야,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아빠 갔다 올게.’
‘아빠!’
‘응?’
‘저도 캐나다에 가보고 싶어요.’
‘그래?’
아빠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럼. 우리 승우도 가야지. 아빠도 승우랑 같이 가고 싶었어. 나중에 같이 가자.’
엄마가 승우 뒤로 걸어와 말했다.
‘자기야, 얼른 가요. 지각하겠네.’
‘응. 다녀올게.’
아빠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혔다. 엄마가 문을 잠그고 현관 등을 껐다. 어린 승우의 눈앞엔 텅 빈 깜깜한 현관이 있었다. 하지만 승우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승우는 알았다. 아빠는 진심이었고 그 약속은 진짜였다. 며칠 전 캐나다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아빠는 말했었다.
‘사진이 별로 없어. 너랑 엄마도 없는데 사진 찍어서 뭐 해. 찍기도 싫더라.’
사진 속 풍경은 눈부시게 멋있었지만, 승우의 눈엔 아빠만 보였다. 까무잡잡하고 마른, 왠지 피곤해 보이는 아빠. 사진을 정리해 서랍에 넣는 아빠를 보며 어린 승우는 생각했다. 꼭, 언젠가 그곳에 아빠와 같이 가겠다고.
‘내가 이다음에 아빠랑 같이 가서, 아빠의 외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몽땅 없애 줘야지.’
하지만 그런 날은 결국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올 수 없었다.
“……”
승우는 서둘러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한 손에 얇은 재킷을 든 채로 급하게 신발을 신은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며 엄마를 불렀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승우는 받은 서류를 정리해 봉투에 넣었다. 늦은 오후, 승우는 대학 본관 행정실에서 나왔다. 메고 있던 검은색 책가방을 열어 안에 있던 쇼핑백을 꺼내고 서류봉투를 넣었다. 가방을 다시 메고 승우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안 됐네…’
엄마와 갑자기 외출하느라 약속 시간을 뒤로 미뤘는데,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건물에서 나온 승우는 광장으로 이어진 긴 계단을 내려왔다. 저 아래 광장 한가운데에 학교를 상징하는 거대한 동상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동상을 바라보고 서 있던 자신의 신입생 시절이 생각났다.
7년 전, 대학 신입생 승우는 광장 한복판에 있던 동상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건물마다 합격 축하 배너가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가벼운 웃음소리,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 승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승우는 같은 과 신입생들이 모이는 한 건물의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 문 앞에 단정한 정장을 입은 안경 쓴 나이 든 아저씨 한 분이 서 계셨다. 승우가 서둘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는 승우를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 그래, 안녕…근데, 나는… 아니야.”
“네?”
그가 승우의 어깨너머로 다른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벌써 왔어?”
“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교수님과 아저씨를 보며 승우는 강의실로 들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늦은 저녁 다 같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 아저씨는 졸업생이고 지금은 직장을 다니는 중이었다. 그때는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승우는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다음 해 여름, PEET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에서였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둘이 눈이 마주쳤다.
“어, 너 맞지?”
“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그… 네 이름이 뭐였지?”
“이승우 요…”
“아, 승우. 그래, 그때도 잘 생겼다 했어. 여기서 보니 반갑다.”
“…아…네.”
쑥스러웠지만 반가운 것은 승우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경쟁자 무리 속 그나마 덜 낯선 딱 한 사람. 그가 자신의 옆에 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둘은 나란히 앉았다.
“시험 준비하게?”
“네.”
“벌써?”
“…네.”
“군대 안 가고?”
“아…네.”
“그래… 뭐… 붙고 가면 되지. 빨리 준비하면 좋지.”
승우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처럼 빨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직장 다니면서 하면 힘들어. 게다가 난 여자친구한테 맨날 혼나. 시험 빨리 붙어야 한다고. 휴… 무서워…”
그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날부터 둘은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회사 때문에 자주 지각하는 형을 위해 승우는 항상 자리를 맡아 두었다. 자료와 필기도 챙겼다. 형은 고마워하며 승우에게 커피와 간식을 사주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둘은 늦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또 이거 먹네. 지금 시간에 여는 곳이 여기뿐이라. 불백 괜찮아?”
“저 불백 좋아해요.”
싹싹하게 말하며 승우는 컵에 물을 따라 형에게 건넸다.
“힘드시죠? 일하고 공부도 하시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난 여기 온다고 가끔 일찍 빼고 오는 것도 있어.”
그런 회사도 있구나 생각하며 승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반찬이 몇 가지 나왔다. 그는 소시지 반찬을 승우 앞으로 옮겼다.
“너도 힘들지? 매일 학교 갔다가 저녁에 여기 와서 공부하고.”
“아…저 학교 안 가요.”
“응? 왜?”
“곧 휴학할 거예요.”
“휴학? 아니… 왜? 이 시험 때문에? 아직 좀 더 다녀야 하지 않나?”
“네…”
“근데 왜 휴학을 해?”
조금 머뭇거린 후 승우가 말했다.
“형. 저 형한테만 말할게요. 비밀로 해주세요. 저… 아버지가 편찮으세요. 지금 병원에 계세요. 항암치료 중이신데,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요. 아버지와 시간을 좀 더 보내려고 우선 휴학하려고요. 그런데 그냥 휴학하면 안 좋아하셔서, 시험 준비한다고 말했어요. 아버지는 응시 자격 같은 거 잘 모르시니까 대충 둘러댔어요.”
놀란 형은 숟가락을 든 채로 말이 없었다. 승우는 시선을 떨궜다.
“그랬구나....”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학교 애들은… 아무것도 몰라?”
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형이 승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젓가락으로 소시지를 하나 집어 승우의 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승우야,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숟가락 위 소시지를 보고 승우는 피식 웃었다. 별말 없이 또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고마웠다. 어깨에 지고 있던 무게를 조금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동상 뒤로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7년 전보다 살이 찌고 특히 배가 많이 나온 모습이었다.
“승우야.”
“형.”
승우가 반가운 표정으로 형에게 걸어갔다. 형은 정장 차림이었다. 퇴근하고 바로 온 모양이었다.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준비는 다 했고?”
“응.”
“드디어 가네? 어머님은 잘 계시고?”
“응.”
“내 연락처 알려 드렸지?”
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우가 없는 동안 승우 어머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실 수 있게, 형은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드리라고 했다.
“군대 늦게 가서 고생 많이 하겠다.”
“괜찮아. 다 알고 가는 건데 뭐. 형은? 형은 잘 지냈어?”
“나? 나야 항상 좋지.”
“언제지?”
“이제 거의 다 왔어. 다음 달이야.”
“와, 긴장되겠다. 아빠가 되다니.”
형이 씩 웃었다. 승우도 함께 미소 지었다.
“이거.”
승우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기 옷이야.”
“야, 너 뭘 이런 걸 갖고 오고…”
“엄마가 형 갖다 주래.”
“항상 감사드린다고 전해드려.”
승우가 웃었다. 수험 기간 내내 승우는 직장 생활 경험이 있던 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형은 합격하고 바로 결혼했다. 결혼식에서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는 형을 보며, 승우는 병실에 계신 아버지 생각을 했다.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결혼하게 되는 날, 나란히 앉아 뿌듯하게 자신을 바라봐 주실 두 분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몇 달 뒤, 아버지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중환자실은 면회도 쉽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는 차분히 전해야 아빠가 편하실 거라고 말했던 엄마는 결심과는 달리, 아빠를 볼 때마다 손을 꼭 잡고 절절히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승우는 자신의 몸이 발밑에 난 깊고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처박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드문 곳을 찾으려 나간 병원 뒤 벤치에 앉아, 승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을 삼켰다. 형은 승우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버지는 후에 일반병실로 옮겼지만, 의식이 온전치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깜깜한 터널 속을 홀로 걷는 듯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 끝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끝에서 나는 기뻐하게 될까, 슬퍼하게 될까?’
어느 추운 날, 승우는 버스를 타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뿌연 창밖으로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웅크린 채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세상은 온통 회색 빛이었다. 승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승우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다들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이런 슬픔은 더 늘어나기만 할 것이었다. 승우는 두려워졌다.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승우는 이 겨울이 그대로 멈추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흘렀다. 계절이 바뀌고 어느 날 유난히 차분했던 오전, 도서관에 있던 승우는 결국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 형은 3일 내내 승우와 엄마 곁을 지켜주었다.
조그만 쇼핑백을 받아 들고 멋쩍게 웃던 형이 말했다.
“가기 전에 저녁이나 사주려고 했더니, 너 약속 있다며?”
“응. 형도 집에 가야지. 기다리시잖아.”
“그렇긴 하지…”
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윤아의 모습이 보였다. 형의 말을 들으면서도 승우의 시선은 어느새 윤아에게 가 있었다. 부는 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날렸다. 단정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윤아는 참 예뻤다. 승우가 다른 곳을 보는 것을 알아챈 형이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아를 발견한 그가 미소를 지었다.
“여자 친구 만나기로 했구나?”
“아니.”
윤아가 승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승우도 손을 흔들었다.
“만나기로 했구먼.”
“여자친구 아니야.”
“아니야? 그럼 뭐야?”
“그냥 동네에 아는… 후배야.”
“이야, 무슨 저런 동네 후배가…아차차, 너 그 동네 살지?”
승우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좋은 데서 살고 봐야 해. 그냥 아는 애가 저런 애고… 그냥 아는 오빠가…”
형이 승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애고…”
“안녕하세요.”
가까이 걸어온 윤아가 형과 승우에게 인사를 했다.
“응. 안녕.”
말하며 형이 짓궂은 눈빛으로 승우와 윤아를 번갈아 보았다. 승우는 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윤아야, 승우가 군대 가서 어떡해?”
“아…네…”
장난인 듯 진심인 듯 윤아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승우는 그런 윤아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기다릴 수 있겠어?”
“안 기다릴 거예요.”
윤아가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바쁘고 할 일도 많아요. 시간 금방 갈 거예요.”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승우를 흘끗 보았다.
“그래서 승우가 나한테 부탁하는구나? 윤아가 너무 바빠서?”
“네? 뭘요?”
“승우가 자기 간 사이에 어머님 좀 챙겨달라고 나한테 부탁하던데.”
윤아가 승우를 빤히 보았다. 고개를 슬며시 돌린 승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윤아가 승우 어머니를 아직 잘 모르나?”
윤아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긴요. 저희 엄마랑도 친하시고… 잘 알아요…”
“그래?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신신당부를…”
“형…”
승우가 그만하라는 눈짓을 했지만 형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빠 어머님이랑은 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알았어요. 좋은 분이시고 저한테도 잘해 주세요.”
“그래?”
“네. 교양 있고 친절하세요. 오빠가 워낙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유명하기도 했지만, 오빠 엄마도 유명하셨어요.”
“왜?”
“오빠를 학원도 하나 안 보내고도…”
“그만, 그만…”
승우가 윤아의 어깨를 잡아 돌리고는 지하철역을 향해 걷게 했다. 자신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형, 저 갈게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어, 그래. 잘 가.”
승우와 윤아가 나란히 지하철역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형이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승강장에 나란히 서서 승우와 윤아는 지하철을 기다렸다. 투명한 안전문에 둘의 모습이 비쳤다. 윤아가 안보는 척 고개를 돌리며 문에 비친 승우의 모습을 살폈다. 승우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나왔다. 더 이상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지하철이... 안 오네?"
윤아의 말에 승우가 전광판을 확인했다. 윤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많이 속상해하시지?”
"어? 어..."
“많이 걱정돼?”
“그렇긴 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 주변에서 계속 신경 쓰실 거니까…”
“응.”
“우리도… 알잖아. 우리 집 가깝기도 하고, 우리 엄마가 자주 보실 거고…”
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가 승우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나한테는 왜 말 안 해?”
“응?”
“아니, 부탁 안 해도 어련히 알아서 그렇게 할 거지만… 나는… 나는 오빠가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직접 부탁하는 줄 몰랐어.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하면서 왜 나에겐 그런 말을 안 하고…”
“형한테만 얘기한 거야. 사람들에게 다 한 건 아니고.”
“내 얘기는 그게 아니잖아. 왜 오빠는…!”
높아진 목소리에 승우가 윤아를 바라보았다.
삐리리 삐리리 삐리리리리
지하철이 들어왔다. 두꺼운 소음이 둘의 주변을 꽉 채웠다. 숨을 한번 참는 사이 텁텁한 기운을 가르고 지하철 문이 열렸다.
“왔다. 타자.”
승우가 윤아의 어깨를 살짝 잡아 밀며 문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내밀었던 손을 윤아는 다시 털썩 떨구었다. 둘은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섰다. 지하철은 계속 달렸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승우는 깜깜한 유리창만 바라보았다. 윤아는 손에 든 휴대폰을 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승우에게 가 있었다.
“앉아.”
빈자리가 생기자, 승우가 윤아를 앉게 했다. 그는 윤아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윤아는 보고 있던 휴대폰을 자기 손가방에 넣으려 가방을 열었다.
“앗!”
가방 안에 있던 머리끈이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끈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는 윤아의 옷 목둘레선 안으로 그녀의 몸 안이 살짝 들여다보였다. 승우는 메고 있던 책가방을 윤아의 무릎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거 갖고 있어.”
윤아가 깜짝 놀랐다.
“어?”
“들고 있으라고.”
“… 알았어.”
승우는 바닥에 있던 머리끈을 주워 윤아의 손에 툭 내려놓았다. 윤아는 승우가 주워 준 끈을 손목에 걸고 무릎 위 책가방을 옆으로 곱게 정리했다. 승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니, 앞으로 메고 있어.”
“왜?”
“그렇게 놓으면 옆 사람들한테 방해되잖아.”
“……”
윤아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승우가 시키는 대로 커다란 책가방을 부둥켜안았다. 표정 없이 윤아를 보던 승우가 시선을 내렸다. 자기 신발이 보였다. 오늘 신고 나온 검은색 운동화는 승우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운동화였다. 꽤 인기 있는 모델로 승우가 편하게 자주 신는 신발이었다.
“……”
하지만 예쁘게 반짝이는 베이지색 구두 옆에선 그저 낡은 운동화일 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윤아의 집 방향으로 걸어오며, 승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말이 없기는 윤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윤아의 머릿속은 조급한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오빠는…’
인도에 사람들이 몰리자 승우가 앞서 걸었다. 윤아의 눈에 검은 책가방 양쪽으로 흔들리는 승우의 빈 손이 보였다.
‘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도, 승우는 윤아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윤아가 먼저 잡거나 팔짱을 끼면 가만히 있기는 했어도, 승우가 먼저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윤아는 이번에도 자신이 먼저 저 손을 잡을까 고민했다.
‘아니야…’
조윤아가 이승우의 뒤통수를 보았다. 꽉 막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저럴 수가 없었다. 오늘도 내가 먼저 잡기는 싫었다. 하지만 잡아 주기를 기다릴 만한 여유도 이젠 없었다.
‘내가 한 번은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할 말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둘은 윤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제 길거리엔 사람이 드물었다.
"이거."
승우가 가방에서 책 몇 권을 꺼내 윤아에게 건넸다. 학교 교양수업 교재였다. 윤아가 책을 받았다.
"고마워."
"고맙긴. 편하게 보고, 다시 안 줘도 돼. 필기는 좀 했는데 글씨가 엉망이라 도움이 안 될 거야."
"하하... 알지. 오빠 글씨..."
윤아가 훑어보고 미소 지었다.
“이제... 들어가.”
윤아가 승우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승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윤아가 용기를 냈다.
“오빠, 저기 내가…”
“윤아야.”
“어?”
승우가 윤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
“……”
차분히 이야기하는 승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하지만 듣는 윤아의 몸엔 소름이 돋았다. 오늘 날씨가 이렇게 쌀쌀했던가 그녀는 생각했다. 승우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다정하고 친절했던 이승우에게 저런 표정도 있었던가? 윤아는 승우의 눈을 서서히 피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너머 서 있던 가로수에 매달린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자그만 연노랑 나뭇잎 하나가 힘없이 흔들렸다. 윤아가 고개를 숙이자, 아까처럼 비어 있는 승우의 손이 보였다. 승우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 괜찮지?”
“……”
윤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