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변

헬로, 앤디 1

by SY전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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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태풍의 여파인지 바람이 꽤 불었다. 차가운 바람은 아니었다. 소금기를 품은 따뜻한 바람이었다. 넷은 모래 위를 천천히 걸었다. 바다 가까이 다가가던 헬렌은 신발이 젖기 직전이 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모래 위로 하얀 파도자락이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그녀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후우…”]


헬렌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근처에 서있던 앤디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 용 감독과 아리얀이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전남편이 자꾸 소송을 걸어요. 양육권을 핑계로…”]


헬렌의 말에 앤디의 표정이 굳었다.


[“애들은 이미 충분히 컸는데, 뭘 더 하겠다고 계속 그러는 건지… 그는 이제 재혼했으니 원한다면 아이도 낳고 새 가족을 꾸리면 될 것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앤디는 발끝으로 모래만 툭툭 건드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헬렌 또한 알 거라고 앤디는 생각했다. 헬렌의 전남편이 원하는 것은 복수였다. 몇 년 전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훌륭한 집안, 수려한 외모,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완벽한 그가 헬렌에게 이혼 소송을 건 이유는 다름 아닌 헬렌의 외도였다.


[“내가 잘못했지만… 지금까지 이러는 건… 너무 길어요.”]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듣고 있다는 반응밖에 줄 것이 없었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모래가 그들의 신발을 푹신하게 감쌌다. 앤디가 헬렌을 슬쩍 보았다. 목에 두르고 있던 얇은 스카프와 함께 그녀의 금발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반듯한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 그 아래 맑은 눈망울도 보였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머릿결이 조금 푸석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미모는 여전했다. 앤디는 생각했다. 헬렌의 전남편은 아마 헬렌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자도 어쩔 수 없었겠지…’]


헬렌이 바람을 피웠음에도 그는 원하는 만큼 벌을 줄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여리고 순수한 성품으로 사랑받는 미모의 여배우 헬렌이었고, 그 상대는 당대 최고 스타인 줄리아였기 때문이었다. 모래 위 둘의 발자국이 길어졌다. 살짝 고개를 숙인 헬렌이 손으로 눈가를 닦아내는 듯했다. 앤디가 물었다.


[“… 괜찮아요?”]


간단한 질문이었다. 헬렌이 내놓을 수 있는 그저 그런 대답은 얼마든지 있었다.


[“앤디, 음… 아주 괜찮다고 할 수는 없어요. 특히…”]


헬렌이 피식 웃었다.


[“줄리아가 떠나고 제가 어땠는지, 앤디도 알 텐데요?”]


생전 처음 와 본 나라의 낯선 바다를 담은 그녀의 눈동자는 그날처럼 외롭게 떨렸다. 담담한 목소리는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바닷속에 툭 던지듯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바위처럼 무거운 속내에 앤디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그는 머뭇거렸다. 헬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앤디, 나는… 난 정말 죽을 뻔했어요.”]

[“……”]

[“그건… 그냥, 나한테 사형선고였어요. 내 마음을 뜯어내서 땅에 내팽개치고 발로 밟아 뭉개는 고통이었어요. 이제 더 이상 살아 숨 쉬지 말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어요.”]

[“헬렌……”]

[“그랬어요. 그랬는데… 나는 살아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잘.”]


헬렌이 앤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깨끗하게 빛났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믿겠어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헬렌이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못 믿는군요.”]

[“……”]

[“앤디, 나는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할 수가 없어요. 신기하게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아요.”]


그녀의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바람에 흩날렸다. 어지러운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고민해 봤어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후회해야 한다면 어디였을까? 정말 끝도 없이 생각했어요. 생각했는데… 세상에, 난 정말 놀랐어요. 왜냐면 깨달았거든요. 나는 단 한순간도 잘못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헬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밤중이었어요. 떠난다는 줄리아에게 울며 매달렸어요. 잠옷 차림으로 그녀의 차를 쫓아가다 넘어졌어요. 집 앞 도로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어요.”]


미안하게도, 앤디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금발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던 그녀의 얼굴, 벗겨진 신발 그리고 까진 무릎에 맺힌 붉은 핏방울까지. 수백 장의 사진들이 인터넷을 뒤덮었었다.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 댔어요.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까지요. 하하…어느 티브이 쇼에선 제가 그날 잃어버린 신발 한 짝과 팔찌가 어느 디자이너의 제품인지 소개도 해주더군요.”]


옆집 소녀처럼 다정하고 친근한 배우였던 그녀를 아끼는 사람이 그 순간 단 한 명도 없었던 걸까? 그 누구도 나서서 헬렌을 감싸주지도,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았다. 무심한… 아니, 무서운 사람들.


[“… 그거 알아요? 재밌는 게… 저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 혹시 내가 촬영 중인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수많은 휴대폰 카메라 렌즈와 끊임없이 터지던 플래시는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어 놓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이게 현실이 맞는지, 아니면 자신이 어떤 영화 작품 속에 있었던 것인지 몽롱한 착각에 빠졌다.


[“… 그런데, 그 반대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안 것 같아요. 그동안 내가 영화에서 해왔던 것들은, ‘진짜’ 연기였다는 것을요. 실제는 선명한 고통이었어요. 만남도, 함께한 순간도, 헤어짐도. 전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숨조차 쉬기 어려운, 정말 순수한 고통.”]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릴 적 헬렌은 사랑이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배웠다. 어여쁘고 수줍은 소녀였던 헬렌은 다소곳이 기다리면, 머지않아 그 귀한 사랑이 찾아와 그녀를 알아보고, 정숙한 그녀를 칭찬하며 영원한 행복이란 상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줄리아를 만난 뒤,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사랑의 힘이 그토록 강할 줄이야. 헬렌은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자신이 놀라웠다.


[“내가 창조한 사랑이고 내가 그 사랑의 주인이었어요… 정말, 아이가 된 것처럼 설렜어요. 번호를 교환하고 밤새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날, 그녀가 내 손을 처음 잡았던 날…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그 후, 세상의 기준은 그 빛을 잃었다. 헬렌이 사랑이라 정의한 그 감정만이 그녀에게 사랑이 되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둘만의 비밀이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해방감이었다.


[“팔짱을 끼고 사람들 사이를 웃고 떠들며 걸어도 아무도 우릴 쳐다보지 않았어요. 별일 아닌 듯,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 알았어요. 이게 사람들이 하는 ‘진짜’ 사랑이구나.”]


그날, 오전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친 후, 헬렌과 줄리아는 짧은 산책을 했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향하는 넓은 길은 깨끗했다. 맑은 하늘 아래 공기가 시원했다. 아직 물기가 남은 곳곳이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부드러운 바람에 헬렌의 금발과 줄리아의 하얀 원피스 자락이 날렸다. 바다를 따라 걸으며, 헬렌은 자신의 손을 간지럽히는 줄리아의 가는 손가락에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부산 바다 앞에서, 헬렌이 손을 폈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날의 그 느낌이 생생했다. 눈부셨던 산타모니카 해변은 기억나지 않았다. 헬렌의 기억 속엔 줄리아만이 있었다. 쉬지 않는 파도 소리와 휘날리는 금발 머리 사이로 두서없는 말을 내뱉는 헬렌의 마음은 한 줌의 모래가 되어 바람을 따라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밝아진 듯한 그녀의 표정에, 앤디는 왠지 서글퍼졌다. 헬렌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미모로 전 세계 사람들의 찬사를 받던 헬렌이었다. 줄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헬렌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헬렌은 잘못 알고 있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헬렌과 줄리아, 바로 그 둘이었다. 스무 해 가까이 차가운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그 뒤로 줄 서 있는 수백만 사람들의 시선을 상상하고 살아왔던 헬렌은 그때 처음으로, 수백만이 아닌 단 한 사람의 눈동자만을 간절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군중 속에서도. 또, 단둘이 대기실에 있었을 때도.


헬렌과 줄리아는 좁은 대기실에 앉아 티브이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앉은 서로의 발끝이 살짝 닿았다. 헬렌이 수줍게 미소 짓자, 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향 어때?’]


특별한 향수를 뿌렸다며 줄리아는 손목을 내밀었다. 자기 코 바로 앞까지 온 가는 손목을 보고 헬렌은 조금 망설였지만 수줍게 향을 맡았다. 온기에 헬렌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리고 헬렌의 볼을 가볍게 만지던 줄리아의 가늘고 고운 손가락. 줄리아는 조그마한 병에 들어있던 향수를 손끝에 가볍게 묻혔다.


[‘이리 와 봐.’]


그녀의 눈짓에 헬렌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한쪽 목과 어깨를 보였다. 줄리아가 헬렌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등 가운데 무언가 가볍게 눌렸다. 헬렌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뜨거운 귓불 아래 줄리아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닿았다.


[‘내가 좋아하는 향이야…’]


줄리아가 자신의 목덜미 향을 맡은 것 같다고 헬렌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터질 듯 뛰는 심장 소리가 헬렌의 귓속을 쾅쾅 울렸다. 그녀는 분명 꼼짝하지 않고 있었지만, 한참을 뛰어온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화장대 거울 위에 촘촘히 달린 조명의 열기가 뜨거웠다.


헬렌은 두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낯선 이국의 바람에 거세게 날릴수록, 그날의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 모든 기억이… 차라리 없는 게 나을까요? 지금 그녀가 내 곁에 없어서?”]


앤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헬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전남편과도 마찬가지예요. 그를 만나고,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웠던 그 모든 순간마다, 나는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선택을 했어요. 너무나도 어리석은 용감한 선택을. 내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금의 나를 만든 게 내 운명이었다는 거예요. 자잘하고 하찮은 우연도, 남이 만들어서 가져다준 숙명도 아닌… 바로, 내 앞으로 찾아온 내 운명.”]


내 운명. 내가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부터 나를 찾아온 존재. 그 뒤로 길게 이어진 외로운 발자국.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 선 한 사람.


[“나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거예요. 내 운명을 알아보았으니까요. 그 얼굴 위에 내 이름이 적혀 있던 것도 아닌데…”]


온몸에 시커먼 재를 뒤집어썼지만, 그 이마 위에 선명히 적힌 나의 이름. 그 아래 형형히 빛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


[“전남편도 줄리아도 정말 분명히 내 운명이었어요. 그들에게도 분명 나는 운명이었어요. 내가 그들을 잊을 수 없듯, 그들도 절대 저를 잊지 못하겠죠.”]


헬렌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정말 괜찮아요.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해요.”]

[“헬렌…”]


이름을 부르고도 그다음 꺼낼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앤디가 고민하던 찰나, 헬렌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이름과 사진을 확인한 헬렌이 깊은 미소를 짓고는 앤디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여주었다.


[“내 운명이 나를 부르네요.”]


헬렌의 아이였다. 통화를 시작하며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앤디는 더 이상 그녀를 쫓지 않았다. 아리얀과 조 용 감독이 앤디를 향해 걸어왔다.


[“근처에 펍 같은 건 없나? 오며 보니 몇 군데 있던 것 같은데.”]


아리얀이 묻자 조 용이 답했다.


[“당연히 있습니다. 뭘 원하시죠? 맥주? 와인?”]

[“나는 맥주가 좋은데, 앤디, 자네는 어떤가?”]

[“……”]

[“앤디?”]

[“…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펍에 갈 거야?”]

[“펍?”]

[“아리얀 씨가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하세요.”]

[“아……”]

[“같이 가세.”]


아리얀이 헬렌을 부르려 할 때 앤디가 말했다.


[“나중에 하는 게 어때?”]

[“응?”]

[“개막식 끝나고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앤디의 말을 듣고 조 용 감독은 말없이 서 있었다. 앤디와 조 감독을 한 번씩 보고 아리얀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위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아리얀이 차고 있던 고급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자네 말이 맞아. 호텔로 가야겠어. 개막식에 맞춰 준비하려면 우선 돌아가세.”]


조 용 감독과 아리얀이 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헬렌이 그들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앤디도 뒤를 따랐다. 모래사장에 푹푹 파묻히는 걸음마다 앤디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앤디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닿은 하늘은 맑고 또렷했다. 고요한 바다엔 태풍의 흔적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주 오래된 그녀의 목소리는 꿈인 듯 희미했다.


[‘앤디… 후회해?’]


앤디의 머릿속에 하얀 침대 위에 누워있던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떠올랐다. 30년이 지났지만 번지는 가슴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젊은 앤디는 레베카 옆에 앉아 푸른 눈을 찡그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날 만난 것… 후회해?’]

[‘무슨 소리야?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말하면 할수록 레베카의 호흡은 짧아졌다. 편히 숨을 쉬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앤디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푸석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에 앤디는 계속 입을 맞추었다. 새빨갛게 부어 있던 그의 눈가에 또 눈물이 맺혔다.


[‘하… 미안해…’]

[‘아니야…’]

[‘앤디, 하… 하… 정말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나에겐 축복이었어. 널 만난 모든 순간이… 하아… 하… 하…’]


더욱 얕아진 호흡에 레베카가 아파하자 앤디는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아이들을…’]

[‘걱정하지 마. 아니,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창밖에는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힘없이 누워 있는 레베카를 보고 앤디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이 어두운 터널 끝엔 그녀가 함께하는 결말만이 있게 해달라고, 그는 신에게 울며 기도했다.


[‘엄마?’]


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병실 문 옆에 모린이 서 있었다. 곧 일곱 살이 될 모린은 도톰한 코트를 입고 하얀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털모자 아래로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추위로 빨개진 어린 딸의 두 볼을 보고 앤디가 물었다.


[‘모린? 괜찮니? 추워? 애쉬튼과 브랜든은?’]

[‘아빠.’]


앤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애쉬튼과 브랜든이 모린 뒤로 나타났다. 둘 다 따뜻한 겨울 옷을 입고 있었다. 애쉬튼과 브랜든이 두꺼운 장갑을 낀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선물…’]


손 위에는 하얀 눈을 뭉쳐 만든 꼬마 눈사람이 있었다.


[‘오… 아가…’]


레베카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미안. 엄마가 약속했는데… 하… 눈이 오면… 눈사람을 같이… 만들기로…’]

[‘엄마. 괜찮아요. 제가 만들었어요.’]


레베카가 손을 들어 아이들이 들고 있던 눈사람을 만졌다. 하지만 별로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각이 무디어진 것일까?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브랜든이 물었다.


[‘엄마, 마음에 안 들어요?’]

[‘… 그럴 리가 있니? 너무… 너무 예쁘단다…’]


레베카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앤디가 아이들로부터 눈사람을 건네받았다.


[‘방이 너무 따뜻하니까, 창문 밖에 올려 둘까? 엄마가 오래 보실 수 있게.’]

[‘네.’]


앤디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바깥쪽에 꼬마 눈사람 두 개를 올려 두고 그가 유리창을 닫았다.


[‘… 예쁘구나. 고마워.’]


애쉬튼과 브랜든이 누워있던 레베카를 와락 껴안았다. 힘에 겨운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앤디가 두 아이를 말리려 했지만, 레베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없이 멈춰 선 앤디가 뒤에 서 있던 모린을 보았다.


[‘… 모린?’]


모린의 표정이 슬펐다. 앤디는 다가가 딸을 안아주었다. 그가 모린의 등을 토닥이자 모린이 작게 속삭였다.


[‘아빠…’]

[‘응?’]

[‘나는… 눈사람 안 만들었어요.’]


앤디가 모린을 바라보았다. 모린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다음에 꼭… 엄마랑 같이 만들려고 안 만들었어요.’]

[‘그래… 괜찮아…’]


앤디가 모린을 꼭 안아주었다. 앤디의 어깨너머로 엄마와 두 동생을 바라보는 모린의 갈색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쉼 없이 부는 바닷바람 때문인가, 나이 든 앤디의 눈가가 붉어졌다. 모래 위 발걸음이 무거웠다. 제발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랐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금방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이별을 향한 여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슬픔에 괴로워했던 그 겨울이 그들에겐 행복한 시간이었다.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다섯이 함께했던 순간이었다. 앤디는 헬렌의 말을 곱씹었다.


[‘그 모든 기억이…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까요? 지금 그녀가 내 곁에 없어서?’]

[“그럴 리가…”]


앤디는 걸음을 멈췄다. 벌써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꿈같기도, 오래전에 촬영했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가 바다를 향해 긴 한숨을 뱉었다. 고요한 바다엔 태풍의 흔적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파란 바다 저 멀리 요트 한 척이 하얀 돛을 펄럭이며 천천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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