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시장 다녀와?”
혜진이 들리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계단 꼭대기에 지애가 서 있었다. 지애는 등산복을 입고 작은 배낭을 멘 채 아파트 단지 입구부터 이어진 대리석 계단을 올라오는 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해를 등지고 선 지애의 실루엣이 빛났다. 하얀 코트를 입은 지애는 코트에 어울리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스톤을 잔뜩 올려 장식한 열 손가락 손톱이 반짝거렸다. 방지애 여사님은 아침부터 예쁘게도 차려입었다. 아니, 아니다. 예쁘게 차려입은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치고 나온 것이 저것일 것이다. 계단을 올라 지애 옆에 선 혜진이 가쁜 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지애가 물었다.
“거기 갔다 오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두 시간?”
“두 시간… 반?”
“대단하다 정말. 오늘은 뭐 샀어?”
“미나리랑 무.”
“무?”
지애가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혜진의 배낭 바닥을 슬쩍 들어보았다.
“어휴, 무거워. 이 무거운 걸 왜 거기서 사 와? 여기 앞에서 사면되지!”
“… 뭐… 그래도 되고…”
혜진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아침 일찍 운동복 겸 등산복을 입고 작은 배낭을 메고 재래시장에 갔다. 가까운 마트도 멀지 않은 시장도 있었지만, 혜진은 단지 밖으로 나가 한강 다리를 건너 저 먼 종합 시장까지 다녔다. 방지애는 혜진이 그 시장까지 거의 매일 걸어서 다녀온다는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지애가 고개를 가로젓자, 혜진이 피식 웃었다.
“집에 승우 있어?”
“어.”
“그래? 그럼… 나랑 잠깐 여기 앉아서 얘기 좀 해.”
“여기서?”
“응.”
아파트 단지 안에는 울창한 나무와 조형물 사이로 세련된 의자와 테이블이 많이 있었기에 이야기를 나눌 장소는 충분했다.
“그래도… 안 올라가고?”
“답답하잖아. 여기서 해. 잠깐이면 돼.
“그래.”
잔디밭 사이로 난 대리석 길을 걸어 나무 아래 한적한 장소에 있던 멋진 의자에 둘이 앉았다. 배낭 안에 있던 물이라도 나눠 마셔야 하나 생각하던 혜진에게 지애가 말했다.
“승우가 우리 윤아 보고 그날 자기 배웅하러 오지 말라고 했대.”
“어?”
배낭 안을 뒤적이던 혜진의 손이 멈췄다. 그런 혜진을 지애가 빤히 보았다.
“승우가 얘기 안 해?”
“……”
“표정 보니까 못 들었구먼? 아니, 애가 어젯밤에 울더라고.”
“아……”
“됐어. 고맙지. 기다리지 말라고 딱 정리해 주고.”
‘…그런 건가?’
혜진이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언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지애가 피식 웃었다.
“애들한테 자꾸 잘 어울린다, 둘이 있으니 너무 예쁘다, 그런 말 하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할 때 그렇게 할걸. 그런 소리 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했던 언니 말을 들었어야 했어.”
장난스러운 지애의 말에 혜진이 씁쓸히 웃었다.
“윤아가 많이 울었어?”
“아니, 쬐금. 걔가 많이 울 애가 아니잖아? 조금 울더니 제 아빠한테 자기 여행 가고 싶다고 카드 달래서 받아 갔어.”
둘이 피식 웃었다. 혜진이 말했다.
“다행이다.”
지애가 입을 한번 삐죽거리고는 말했다.
“나 승우한테 화 안 났어. 고맙고 감사해. 이승우, 진짜 깔끔한 남자야. 아빠 닮았나?”
지애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혜진을 보았다.
“엄만가?”
할 말이 없던 혜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애가 말했다.
“그날, 내가 같이 갔다 오기로 한 건 유효해.”
“……”
“이 말하러 온 거야. 언니는 운전도 잘 못하는데 그 멀리까지 어떻게 갔다가 올 거야? 내가 벤츠로 편안하게 모시고 다녀와 줄게.”
“아휴… 아니야.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갔다 올게.”
“언니, 아니야. 내 마음 무거워서 안 돼. 둘만 보내고 또 언니 혼자 우울하게 오는 거 상상하면서 나보고 어떻게 집에 있으라고? 못해, 못해. 내가 데려다줄 거니까 승우한테 그렇게 전해. 승우한테, 윤아는 안 가고 지애만 간다, 딱 그렇게 말해.”
사양도 대책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 혜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고마워.”
“아니야. 뭐가 고마워. 승우한테, 이모 화 전혀 안 났고, 승우가 건강하게 잘 다녀오기를 바랄 뿐이고, 또 김혜진 여사님은 내가 곁에서 잘 보필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 줘. 알았지?”
혜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애가 미소를 지었다.
“언니, 괜찮아. 됐어. 이거 무슨 별일이야? 암 껏도 아니지. 승우 생각하는 언니 마음이 훨 복잡하겠지.”
지애가 손을 뻗어 혜진의 손을 덮었다.
“언니, 알지? 시간 금방 간다. 뭐든 하기 전엔 그걸 다 어떻게 해내나 싶지만, 일단 시작하면 시간은 휙휙 날아가.”
혜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 위 나뭇잎을 흔들었다. 혜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가운데 넓적한 하얀 구름이 지나갔다. 지애 말이 맞다. 시간은 휙휙 날아간다. 자신도 시간에 붙잡혀 정신없이 여기까지 끌려왔다. 이제 한숨 돌리고 뒤돌아보니, 기다림도 행복도, 슬픔과 괴로움도 그저 저 먼 산처럼 흐리고 까마득하다. 소중한 것이어도 붙잡을 수 없고, 괴로운 시련이라도 피할 수가 없다. 구름이 지나가고 가려졌던 산이 보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먼 산꼭대기가 유달리 붉었다. 단풍인지 햇볕인지 아니면 불이라도 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색은 울긋불긋 아름다웠다.
‘대체 내가 언제 저 산을 넘어 이곳까지 왔을까.’
이만큼 살아보니, 나는 꽤 험한 산을 넘어왔던 거라고,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승우도 생각보다 금방 올 거야. 걱정 마. 잘할 거야.”
“그래…”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애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지애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니, 공연 보러 가자. 티켓 생겼어.”
“무슨 공연?”
“클래식. 마티네.”
“그래. 좋지.”
휴대폰을 넣으며 지애가 혜진을 슬쩍 살폈다.
“언니, 송 교수 부인이랑 연락해?”
“응?”
“안 하지?”
“… 안 해.”
“불편해서?”
“… 좀”
“자꾸 그런 쪽으로 얘기를 하고, 그치?”
혜진은 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송 교수 부인은 혜진에게 유달리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혜진을 자신의 혼자된 친척 오빠와 이어주고 싶어 했다. 고마우면서도 무거운 호감이었다. 그 이후로 혜진은 지인 모임을 피했다. 그 모임만 피할 수는 없어, 그녀는 거의 모든 모임과 잠시 거리를 두었다. 혜진과 지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조경 사이를 걸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마~아~~ 음이 안 움직이면 그럴 수 있지. 싫은데 이유 있나.”
흥얼거리던 지애가 혜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주… 모자가 인기가 많아…”
“얘는…”
혜진이 지애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언니는 한가할 때 뭐 해? 딱 봐도…”
지애가 혜진의 낡은 등산복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대~단한 데 가는 거 같지는 않은데.”
“지금은 일하니까 한가할 땐 쉬지…”
“아, 그 일… 그래. 나 아는 부인들도 심심하다고, 남편 병원 상담실에 가서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더라. 근데 일 빼고, 언니는 취미 같은 거 없어? 아니, 있으면 내가 알았겠지. 그럼, 새벽기도 같은 거 다녀?”
“……”
“아니, 아니다. 새벽기도를 다니든 새벽시장을 다니든, 난 새벽엔 못 일어나니까 같이 못 하겠다. 언니도 취미 좀 가져 봐. 요즘에 찾아보면 많잖아? 바리스타, 가죽 공예, 라인댄스, 필라테스…그 뭐냐, 내가 아는 누구는 탱화 그리러 다니던데.”
“탱화?”
“응. 탱화 그리기 재밌대. 정신 수양도 되고.”
“그래?”
“나는 돌아다니는 취미가 좋지, 가만히 있는 건 별로지만. 아… 나중에 더 늙어서 걸음도 시원치 않으면 할지도 모르겠다.”
“불교 아니잖아?”
“마지막이 돼서 급하면, 여기저기 다 잘 보여야지 싶지…”
혜진이 웃었다. 지애가 말했다.
“마티네는 가지 말자.”
“왜?”
“뭐… 그냥. 귀찮아서.”
“그러든가…”
“도쿄 갈 준비나 하자고. 도쿄 가기로 한 거 승우도 알지?”
“응.”
방지애 여사님의 의사 남편 학회 참석에 맞춰, 둘은 여행으로 따라가기로 했다.
“예약은 내가 하고 나중에 알려 줄게. 언니, 나 이제 갈게. 나중에 봐.”
“그래. 잘 가.”
짧게 인사하고 지애는 휭 돌아 단지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뒷모습 또한 당당했다. 잠시 후 혜진도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에서 승우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혜진이 티브이 화면을 슬쩍 보았다.
“뭐 봐?”
“그냥. 생각이 나서…”
오래된 화면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젊었다. 아주 옛날 셋이 호텔에 갔던 영상이었다. 파란색 자동차 튜브를 끼고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 아기 승우를 승우아빠가 천천히 밀어주고 있었다. 긴장했던지 승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종훈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게 나 몇 살 때라고?”
“한…세 살?”
답하고 혜진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여니 찬 기운이 폴폴 쏟아져 나왔다. 혜진은 채소를 제 자리에 넣는 것에 집중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배낭 속을 비우는데 승우가 부엌으로 왔다.
“엄마, 나 주스 마실 건데, 엄마도 드려요?”
“아니.”
“그럼, 뭐? 식혜?”
“… 주스 줘.”
승우가 컵 두 개를 식탁 위에 올리고 주스를 따랐다. 혜진에게 물었다.
“아빠 가기 두 달 전이었어? 저 때가?”
“응.”
“그리고…4년 뒤에 오신 거지?”
“응. 너 초등학교 가기 직전에…”
“……”
승우가 엄마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혜진이 괜히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엄마가 여기서 나 혼자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겠다 싶어서…”
“새삼스레…”
“아빠도…”
“……”
비디오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아빠가 슬퍼 보였다.
“아빠 마음이 어땠을까? 지금 내 마음일까?”
“지금 니 마음이 어떤데?”
“걱정되는 마음.”
“뭘 걱정해?”
“엄마 걱정. 엄마 혼자 있잖아.”
혜진이 피식 웃었다.
“아이고, 별소리를 다 하시네. 제발 혼자 좀 있고 싶다. 평~생을 너 아빠, 너 뒤치다꺼리를 했구먼. 이제 겨우 쉰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고생을 시켰다고? 나 착한 아들이었는데?”
“나는 나쁜 엄마였니? 나는 나쁜 엄마여서 20년을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점심에 일어나서 밥하고 저녁에 일어나서 밥 하고…”
“아이고~내가 괜히 말했네. 괜히 말했어.”
승우가 웃었다.
“하긴, 엄마는 나만 키운 게 아니지, 집안일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병간호도 하고…”
힘들었던 지난날에 혜진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도 벌었잖아. 애들 모아서 가르치고…”
“… 그랬었지.”
승우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종훈은 당장 직장을 잃지는 않았지만, 월급이 줄었다. 일 년이 지나니 회사가 휘청거렸다. 결국 직장을 나온 종훈은 캐나다에 있던 친척의 제안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그 사이 혜진은 전공을 살려 동네에서 애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며 푼돈을 벌었다. 1년만 있어 보겠다던 종훈은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며 귀국을 미루더니 결국 4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돌아왔다. 종훈이 오자마자 혜진은 서랍 깊숙이 모셔 두었던 통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종훈은 그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 그가 보냈던 돈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어머님이 도와주셨고, 나도 일했고. 그리고 승우가 어려서 돈 쓸 일이 별로 없었어…”
종훈의 눈에 4년 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뉴욕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그녀가 이렇게 초라해진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일까? 종훈의 마음이 아려왔다.
“왜 그래?”
눈시울이 붉어진 종훈을 보고 혜진이 놀랐다.
“웬일이야, 오빠 울어?”
“아니…”
“나 오빠 우는 거 처음 봐…”
“안 울어.”
혜진이 웃으며 얼굴을 기웃거리자, 종훈이 웃었다.
“혜진아…”
“왜?”
종훈이 손으로 혜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혜진의 볼을 가볍게 감쌌다.
“혜진아…”
“……”
“우리 혜진이…”
“아, 왜?”
혜진의 눈가도 괜스레 빨갛게 변했다.
“이제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다 할 테니까.”
“…뭘 다해?”
“그냥. 다. 전부 다.”
종훈이 혜진을 꼭 안았다. 혜진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종훈이 혜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혜진이 코를 훌쩍거렸다.
“혜진아, 울어. 눈물 나면 그냥 울어.”
“…어?”
“참아서 뭐 해. 우리가 같이 있을 때 울고, 같이 있을 때 웃고 그래야지. 안 그래?”
“……”
종훈의 팔 안에서 혜진은 참았던 한숨을 폭 내쉬었다. 혜진도 두 팔로 종훈을 꼭 안았다.
‘나는 어떻게 이런 순간 없이 지난 4년을 보냈나…’
혜진이 종훈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지난 4년을 보냈을까?’
혜진을 바라보는 종훈의 표정이 어색했다. 어느새 웃는 것보다 찡그리는 게 더 익숙해진 것 같은 그 얼굴에, 혜진은 마음 깊은 곳이 바늘로 콕 찔린 듯 아팠다. 혜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종훈이 부드러운 손길로 혜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 잘될 거야.”
“응…”
혜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다 잘 되었다고, 마치 아름다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것처럼 완벽하게 다 잘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종훈은 머지않아 꽤 괜찮은 회사에 경력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로 계속 종훈과 혜진은 열심히 살았다. 몇 년을 아끼고 모아 둘은 좋은 동네에 아파트를 샀다. 지금에 비하면 한참은 젊었던 어느 날, 계약서를 들고 신이 난 혜진이 말했다.
“대출 반 정도 갚으면, 그때 우리가 들어가 살자.”
“반을 어느 세월에 갚아?”
혜진은 종훈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종훈이 대범한 혜진을 보고 웃었다. 장군감 부인이었다. 웃는 것도 또 우는 것도.
부엌 식탁 위, 빈 주스 컵 두 개를 놓고 혜진과 승우가 마주 앉아있었다.
“엄마, 그때… 내가 여기 이사 와서 학교 갔는데, 애들이 나보고 공부 어떻게 하냐고 물어봐서, 내가 엄마랑 같이한다고 했더니 애들이 다 놀라더라.”
승우가 엄마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엄마 대단했지. 진짜 똑똑하고…”
“똑똑은 무슨…”
“똑똑하지. 자식한테 고등학교 수학 가르쳐 주는 엄마가 어딨어?”
혜진이 피식 웃었다.
“그거, 내가 가르쳐 준거 아니야.”
“…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
“아니야, 그거 네가 학교 간 사이에 답지 보고 외운 다음에 아는 척 풀어 준거야.”
“나 학교 간 사이에?”
“그럼,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다 척척 하니? 답지 있으니까 너 없는 사이에 미리 풀어 봤지. 아주 그때 내가 혼자 머리 싸매고 앉아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간병한 게 그거보다 쉬웠어. 내가 옛날로 돌아간대도 그건 다시 못 하겠다.”
“그렇게 힘들면 그냥 학원 보내지 그랬어?”
“학원?”
“집 앞에 수학학원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때는…”
혜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곧 털어놓았다.
“내가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그때 대출금 갚느라 돈이 없어서 학원비가 없었어. 안정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어떻게든 최대한 버텨 보려고 한 거야.”
“……”
“돈이 없으면 몸을 쓰든 머리를 쓰든 해야지… 뭐 어떡해.”
혜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승우는 말없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혜진이 아들의 손을 토닥였다.
“방지애 여사님이 고맙대.”
“응?”
“윤아한테 잘해줘서 고맙대. 너 가는 날도 약속했던 것처럼 데려다주러 온대.”
“……”
“승우야, 괜찮아. 엄마도 지애아줌마도 신경 안 써…”
“… 형한테 부탁해 놨는데. 그날 같이 갔다 와달라고.”
“아니야. 지애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또 못 하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흠… 그런가?”
하긴, 엄마한테는 그게 더 편할 수도 있겠다고 승우는 생각했다.
“승우야, 네 생각만 해.”
승우가 말없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남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다 잘 있을 거야. 너만 잘 있으면 돼. 그러니까 네 생각만 하고 건강히 잘 있다가 집에 잘 올 생각만 해. 알았지?”
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이 승우의 손을 쓰다듬었다. 승우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도톰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오빠, 오빠 생각만 해.”
공항 출국장 앞에 선 종훈이 말없이 혜진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 포대기를 두르고 아기 승우를 업고 있는 혜진의 두 눈이 빨갰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야 가족들이랑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오빠가 잘 있다가 잘 오는 게 중요해. 알지?”
“응.”
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종훈이 잠든 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진의 손을 잡은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 이제 갈게.”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저 가요.”
종훈이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 돌아 입국장으로 들어갔다. 혜진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곧 그는 유리 벽 뒤로 들어갔다. 불투명한 유리 벽 뒤로 검고 긴 실루엣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 실루엣마저 사라져 버리자, 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흐흑…으… 엉엉! 엉엉엉!!!”
주저앉아 혜진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업혀 있던 승우가 잠에서 깼다. 놀란 시어머니가 혜진을 달랬다.
“얘, 얘야… 승우어멈아…”
“오... 오빠…... 엉엉!!! 엉엉엉!!! 흐엉엉…”
승우의 등을 토닥이며 혜진을 안아주던 시어머니의 옷소매에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혜진은 큰 소리로 울었다. 그렇게 혜진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