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1
책상 위 동그란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보사노바 선율이 나오고 있었다. 스피커 화면 속 초록빛 막대기가 흐르는 음악을 따라 춤을 추었다. 방은 작았지만, 창이 컸다. 밖으로 녹색 잎이 가득한 나무 꼭대기와 건너편 아파트 건물, 그 뒤로 한강이 보였다. 11층 혜진의 집에서 제일 전망이 좋고 볕이 잘 드는 곳이 바로 이 작은방이었다. 창문 앞 너른 책상 위엔 혜진의 물건이 요모조모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혜진이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평소에 잘 끼지 않는 안경을 낀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물을 채워 쓰는 수채 연필은 편리하고 신기하고 또 우스웠다. 세상에 별 요런 게 다 나오다니.
또록
휴대폰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드로잉스타 앱 위에 새로운 숫자가 떴다.
“똑똑~ 엄마?”
승우가 차 한잔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혜진 옆으로 걸어가 책상 위에 찻잔을 올려두고 승우가 엄마의 그림을 보았다.
“와, 예쁘다.”
“괜찮지?”
승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을 따라 그리기만 하면 돼. 정말 신기해.”
혜진이 수채 연필을 들고 흔들었다. 연필 안의 물이 찰랑거렸다.
“이 펜 쓰기 좋아요?”
“응. 좋아. 갖고 다니기도 편할 것 같아.”
“그래? 그럼, 색깔별로 더 사드릴까?”
“아후, 됐어. 이것만 있으면 돼.”
혜진이 손을 휘휘 젓는 사이 승우는 책상 위에 있던 아이패드를 열었다.
“이거 업데이트해야겠네.”
승우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터치하고는 커버를 덮었다.
“저 나갔다 올게요.”
“늦게 와?”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건데, 저녁은 먹고 올 거예요.”
“그래.”
혜진이 다른 펜을 골라 색을 묻히고 종이 위에 칠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연노랑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방에서 나가던 승우가 갑자기 돌아섰다.
“엄마.”
“응?”
혜진이 고개를 돌려 승우를 보았다.
찰칵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승우가 씩 웃었다. 혜진이 눈을 껌벅껌벅했다.
“저 갈게요.”
혜진은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노란 물 자국은 꽃잎 같기도 나비 같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창밖의 해가 기울었다. 조용히 흐르던 보사노바 음악은 언제부턴가 멈췄다. 아무것도 없던 종이 위엔 분홍, 노랑, 연보라색 고운 꽃이 여러 송이 피어났다. 어여쁜 그림에 즐거운 것도 잠시, 잊고 있던 적막이 혜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작은방은 어둑했다. 빈 찻잔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켰다. 창밖으로 조금 어두워진 하늘 아래, 건너편 아파트 집집이 불을 밝혔다. 저 불 하나마다 예쁜 가족 하나씩 복작거리며 분주할 상상을 하니, 혜진은 마음속에 찬 바람 한 줄기가 휭 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과 찻잔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집 안은 어두웠다. 거실 전등을 켜고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시끌벅적한 광고가 나왔다. 혜진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버튼을 열 번 정도 누르는 사이, 사람들이 백 명은 지나갔다. 그녀는 곧 한 채널에 멈췄다.
<"부산 국제 영화제가 한창입니다. 저희는 지금 영화의 전당 앞에 나와 있습니다. 화려했던 개막식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곧 나온 화면에 혜진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사람들 속에 그가 보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너무도 완벽하게 멋진 모습이었다. 젊었을 적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 미모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이름을 외치고 손을 흔들자, 앤디는 가까이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혜진은 자신의 휴대폰을 떠올렸다. 사라지지 않는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깜박거렸다.
부산은 날씨가 좋았다.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광장을 잔뜩 메웠다. 편안한 차림의 배우와 감독들이 건물 위에서 손을 흔들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한 건물 안의 커다란 홀 안에는 VIP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선 가수들이 영화 주제곡을 불렀다. 편안한 소파에 앉은 VIP들은 음악을 배경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홀 한쪽 벽면에 선 앤디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선 신호가 계속 가고 있었지만, 상대방은 응답이 없었다. 그의 표정이 초조했다. 결국 앤디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안 받는군요.”]
앤디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없을 기회라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 앞에는 어린 한국인 여성이 서 있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여성은 예의 바른 모습이었지만 의상은 평범치 않았다. 그녀는 윤기 나는 검은 가죽 재킷과 몸에 꼭 맞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위엔 은빛의 네일 아트가 빛났다. 그녀는 얼굴에도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글리터 파츠로 장식해 쉼 없이 반짝이는 눈가엔 파츠보다 발랄한 미소가 생생했다.
“지금 가야 합니다.”
건장한 남성이 다가와 여성에게 말하자 여성이 앤디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는 이제 가야 해요.”]
[“물론이죠.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성이 남성을 따라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다시 소파에 앉은 앤디가 핸드폰을 꺼내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 남성이 다가와 앤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K-pop 가수도 아세요, 아빠?”]
그를 알아보고 앤디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트레비스, 왔군! 못 온다고 하더니.”]
[“스케줄을 겨우 바꿨어요.”]
앤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미국인 남자와 포옹했다. 트레비스는 어릴 적에 데뷔한 배우로, 앤디와 함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앤디는 기뻤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앤디는 트레비스의 뒤에 한 여성이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같이 온 분인가?”]
[“네. 인사하러 왔어요. 자기야, 이리 와. 내 ‘아빠’에게 인사해요.”]
소개말을 듣고 앤디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트레비스 옆에 아름다운 여성이 섰다. 베이지색의 광택이 도는 얇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윤기 나는 옅은 갈색 피부와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누구든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미인이었다. 쌍꺼풀이 없는 눈과 갈색의 눈동자, 동그란 광대뼈로 보아 분명 아시아인이었다.
[“제 여자 친구예요.”]
[“반갑습니다. 앤디 코넬입니다.”]
[“반갑습니다. 모레나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가 앤디 자랑을 많이 했어요.”]
트레비스의 말에 앤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로 답했다.
“저기, 잠시…”
조금 전 여성 가수와 함께 나갔던 체격이 큰 한국인 남성이 모레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모레나는 두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한국인 남성을 따라 홀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던 트레비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여기서 통역을 하는 중이에요.”]
[“훌륭한 분이군.”]
[“네……”]
앤디는 트레비스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건 그렇고, 앤디. 괜찮은 거예요?”]
[“뭐가?”]
[“인터넷에 그 이야기뿐이에요.”]
[“아…”]
앤디는 곧 입을 다물었다. 트레비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진짜… 당신 딸이에요?”]
앤디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웃으며 바로 물러섰다.
[“오케이, 오케이, 난 알았어요. 난 정말 알았어요.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니까요. 당신 딸일 리가 없다고요. 그 애가 당신 딸이라면 당신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가서 그 애를 살폈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잖아요.”]
앤디는 말이 없었다.
[“저는 아직도 앤디 코넬이 만들어 준 조그만 눈사람을 기억하거든요.”]
20여 년 전, 앤디는 한 영화에서 젊은 아빠 역할을 맡았고, 트레비스는 그의 아들 역이었다. 어린 트레비스는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젊을 적 앤디와 쏙 빼닮아, 별다른 연기 경력도 없이 그 역할에 바로 캐스팅되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앤디는 이 소년에게도 역시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영화 촬영을 하는 내내 어린 트레비스를 잘 보살펴 주었다. 브랜든 보다도 어렸던 트레비스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앤디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트레비스는 그렇지 않았다. 트레비스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고 또 외롭게 성장했다. 그는 어머니의 빼어난 미모를 닮아 연기를 시작했다. 낮이면 화려한 촬영장에서 부잣집 아들 연기를 했지만, 밤에는 가구도 변변찮은 집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던 작은 식탁에서 혼자 단출한 식사를 했다. 어느 곳이 진짜 세상인지, 어떤 것이 진짜 자신인지 트레비스는 혼란스러웠다. 아직 여물지 않은 마음속은 멀미가 날 듯 울렁거렸다. 카메라가 꺼지면 그는 시무룩해졌다. 누군가는 피곤해서 그런 거라 다독였다. 트레비스 자신도 그런 줄 알았다.
[“트레비스, 코넬 씨를 불러오겠어?”]
영화 촬영을 하던 어느 날, 한 직원이 트레비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트레비스는 앤디 코넬이 대기하고 있던 트레일러로 걸어갔다. 누군가가 그 직원에게 물었다.
[“이봐, 네 일이잖아. 왜 애를 시켜?”]
[“앤디는 애들한테 친절하잖아.”]
트레비스가 앤디의 트레일러 앞에 서서 노크했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트레비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코넬 씨, 저예요.”]
시끄러운 주변 소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였다. 트레비스가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 숨을 들이켰다.
철컥
[“트레비스, 무슨 일이니?”]
활짝 열린 문 안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앤디 코넬이 있었다. 앤디를 보면 트레비스는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정한 앤디는 언제나 트레비스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해 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트레비스는, 그가 내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맑고 푸르렀던 부산 하늘은 어두워졌다. 까만 하늘엔 반짝이는 별이 보였다. 트레비스는 모래 위에 서서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레나를 알아채고 그가 손을 흔들었다. 둘은 짙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손을 잡고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트레비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연인에게 말했다.
[“눈이 오는 날엔 꼬마 눈사람을 만들어 트레일러 창문에 올려 두고, 나한테 선물이라고 만날 때마다 하나씩 주셨어. 눈사람 만들어 준 게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들리겠지만, 나한텐 그렇지 않았어. 그전에도 후에도 나한테 그런 눈사람을 만들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내가 다음에 만들어 줄게요. 아주 큰 걸로.”]
모레나가 말하자 트레비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내가 만들어 줄게. 자기를 위해. 그리고…”]
트레비스가 모레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우리 아기를 위해.”]
그의 말을 듣고 모레나가 서둘러 말했다.
[“헤이, 자기야, 알고 있죠? 이 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알아. 알아.”]
트레비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아빠가 되면. 난 앤디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거든.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모레나가 트레비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연인의 얼굴 위로 천진한 소년의 미소가 번졌다. 모레나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코넬 씨는 정말 다정한 분인 것 같아요.”]
[“맞아.”]
[“… 그러니 이해돼요.”]
[“뭐가?”]
[“… 왜 그를 그토록 사랑하는지요.”]
트레비스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나의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기분 좋게 앞뒤로 흔들렸다.
공항에 출근한 혜진이 폐백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폐백실 유리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간식 사 왔어요. 좀 드시고 하세요.”
직원은 테이블 위에 과자와 음료를 올렸다.
“식혜로 사 왔어요.”
“고마워요.”
혜진이 의자에 앉았다. 식혜 캔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직원도 맞은편 의자에 앉아 식혜를 마시고는 물었다.
“이번 주 주말이죠?”
“네.”
“마음이 적적하시겠어요.”
“뭐… 그렇죠.”
혜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을 푹 쉬고는 직원이 말했다.
“하… 정말, 언제 다 키우나 싶은데, 키워서 또 그렇게 보낼 생각 하면 마음이 무거워요…”
혜진은 아주 오래전 시어머니에게 딱 저렇게 말했던 자신이 생각나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속상하시죠?”
“그럼요. 속상하고 싱숭생숭하고…”
“그래도 아주 힘든 곳은 안 갈 거예요. 약대생이잖아요.”
“… 그런가요?”
혜진은 그런 도움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군대에 간다고 조언해 주고 배웅하러 나갈 아버지도 없는 마당이었다.
“어쩜 아드님을 그렇게 잘 키우셨어요? 비결이 뭐예요?”
혜진이 쑥스러워했다.
“잘 키우지 못했어요.”
“뭔가 달랐어요? 어릴 적부터 똑똑했어요?”
혜진이 탁자 위에 식혜 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아니요.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니, 그랬대도 몰랐을 거예요. 너무 바빠서.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애가 어땠는지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자식 잘된 부모님들은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애들이 알아서 컸고 뭐든 스스로 다 했다고.”
“우리 애 잘된 자식 아니에요.”
“아니긴요. 그 정도면 엄청나게 잘 난 아들이죠. 인물도 좋다고 하던데요?”
가끔 혜진을 데리러 공항에 온 승우를 보고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칭찬해 주시니 고맙지만, 알고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직원은 식혜를 마저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빈 캔을 탁 내려놓았다.
“아후… 저는 걱정이에요. 애들을 언제 다 키우나… 정말 너무 힘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먹이고 입혀서 등원시키기까지만 해도 등에 땀이 줄줄 흘러요. 머리가 핑 돌고…”
“음… 몸이 좀 허한 거 아닌가요?”
“그런가요? 내가 몸이 허한가?”
“영양제나 보약 같은 거 먹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직원이 자기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지금 살도 안 빠지는데 보약까지 먹어야 할까요? 지금이 제 인생 최대 몸무게예요.”
“아휴… 살이랑 체력이랑은 또 달라요.”
“그런가요? 그럼, 약사님 어머님이시니까, 뭐 좋은 약 좀 있나요?”
“아이고, 그런 거 몰라요.”
혜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네… 나중에 아드님 공부 다 마치고 약국도 여시면, 그때 약 사러 갈게요. 추천 좀 해주세요.”
둘이 함께 웃었다. 직원이 또 한숨을 폭 쉬고는 말했다.
“애 키우는 게 힘들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버티면 좋은 날이 올까요?”
혜진이 조금 생각하고는 말했다.
“딱히… 안 와요.”
“네?”
“좋은 날이 나중에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온 거예요. 지금이 좋은 날이에요.”
“헉.”
질색하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 혜진이 웃었다.
“진짜예요. 나중엔 이날을 그리워할 거예요.”
“다들 그것도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애가 어리고 엄마 찾고 요럴 때, 지금이 제일 예쁜 날이라고요. 그런데 너무 힘드니까 예쁜 게 잘 안 보이고, 또 지금 안 보이니 놓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지고… 후, 너무 스트레스받아요.”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사람들이 애 열심히 키워 봤자, 남는 것 하나도 없다고들 하잖아요.”
“음…”
“나중에 남을 것도 없는 일을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지금 할 건 너무 많은데 뭘 우선순위로 둬야 하는지. 애 인생이 먼저 인지 내 인생이 먼저인지, 부부가 먼저인지, 뭐가 더 중요한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여사님은 뭐가 먼저인 것 같으세요?”
혜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직원이 물었다.
“부모? 자식?”
“흠…”
“뭐가 제일 중요하던가요?”
혜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손주?”
“네에?”
“그게, 참… 표현하기가 어려운데…아, 나는 음… 만약에 손주가 있다면, 물론, 지금은 없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좀 우습지만, 만약에 나중에 손주를 만나게 된다면, 그 애가 할머니 잘했다고, 아빠 잘 키웠다고 칭찬 들을 수 있게,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손주한테 혼나지는 않게 그렇게 해 보자고… 옛날에 애 키우는 게 힘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어…”
혜진이 말을 이었다.
“자식 키워서 남는 거… 있어요. 없을 것 같은데,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나중에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고, 음… 정말 그 시간에 빠져들어서 치열하게 보내고 나면, 그러면 나중에 깨닫게 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혜진이 직원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금 딱 열심히 빠져들어서 잘하고 계세요. 머리가 핑글핑글 돌 정도로 열정을 다 하고 있잖아요.”
“… 순간 일 그만둬야 하나 생각했어요. 가뜩이나 요즘 마음이 복잡한데.”
“하하, 아이고, 아니에요. 너무 잘하고 계신걸요. 이렇게 잘하고 있으면서도 부족한 거 같아서 마음이 조급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잘하고 있는 거예요.”
입을 삐죽 내미는 직원의 얼굴이 빨개졌다. 혜진이 말을 이었다.
“옛날에… 누가 그랬는데, 사과나무를 키우듯 하래요.”
“사과나무요?”
“사과나무를 키우는데, 열매는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하면서, 그저 정성 들여 키우래요. 그럼 된대요.”
“헉… 왜 열매를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 결국 남 좋은 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셈이죠.”
“쳇…”
직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혜진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다른 건 다 넘어가도, 전 진짜 나중에 손주는 절대 안 봐줄 거예요.”
직원의 말에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님은 나중에 봐주실 거예요?”
“글쎄요.”
“저희 부모님은 지방에서 아예 올라오지도 않으세요.”
“힘드시면 그럴 수도 있지요.”
“아빠가 당뇨 시라 좀 편찮으시긴 해도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거든요. 엄마는 가끔 와서 들여다봐 주실 수도 있는데, 좀 너무하다 싶어요.”
<‘애 아빠가 아픈 거 애들한테는 자세히 말 안 했어…’>
혜진은 주연과 했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자기들 사느라 바쁜데 이런 거 알아서 뭐 해. 괜히 마음만 무겁지…’>
잠시 생각하던 혜진이 말했다.
“부모님이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네?”
“이렇게 똑똑하고 야무진 따님에, 건강하고 훌륭한 손주를 둘이나 보셨으니까요.”
“아…하긴, 손녀 보셨다고 정말 좋아하셨는데… 흠… 손자까지 생기니 힘드셔서 그런가?”
“할머니 되셨으니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여사님은 할머니가 되고 싶으세요?”
“그럼요.”
“연세도 아직 그렇게 많지 않으신데…”
“나이 더 많아져 봤자 몸만 아플 테니, 지금 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
“남자애만 키워봐서… 손녀가 생기면 어떨까 싶어요.”
“딸은 또 딸이라 이쁘죠.”
딸 아들 골고루 가진 직원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혜진이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걸 못 느껴 봤어요. 궁금하기도 하고…”
“여사님은 손녀가 생겨도 잘 돌보실 거 같아요.”
“그런가요?”
혜진은 어린 손녀를 앞에 앉히고 머리를 땋아주는 상상을 했다. 한복을 입은 조그만 아이가 머리끝에 빨간 댕기를 달고 까르르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혜진의 눈빛이 그윽해지고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언젠가…그런 날도 오면 좋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혜진이 말했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