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하늘은 조금 흐렸다. 땅이 젖은 것을 보니 새벽에 가볍게 비가 온 모양이었다. 혜진은 건물에서 나와 큰길로 걸었다. 양쪽으로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캠퍼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곳은 싱가포르의 한 대학이었다. 도쿄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지애 남편의 학회가 싱가포르로 갑자기 변경되었다. 학회를 개최하는 이 대학은 싱가포르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이었다. 학회 관련 손님들은 교내에 있는 숙박시설에 묵었다. 안전하고 깨끗한 곳이었지만 관광지와는 거리가 좀 멀었고, 호텔처럼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학회와 그 내부 모임을 위한 장소였다. 기숙사처럼 단출한 방을 보고 지애는 구시렁거렸다.
"세상에, 공부쟁이들 따라와서 놀려고 했더니, 내가 공부하게 생겼네. 언니까지 이런데 자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지애야. 좋아. 신기해. 내가 언제 이런 데를 와보겠어."
혜진은 전혀 상관없었다. 지애도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 그냥 던지는 말임을 혜진은 알았다. 어제까지 그들은 단체 프로그램을 통해 싱가포르 관광을 했고, 오늘은 쉬어가는 날이었다. 휘황찬란한 건물들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없는 날을 보내고 난 뒤라, 오늘 이 고요함은 천국처럼 편안했다. 그녀는 얇은 긴 바지에 연두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간편한 차림은 가벼운 아침 산책에 잘 어울렸다. 혜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덥고 습한 공기에 풀 냄새가 가득 섞여 있었다. 길을 걸어 쭉 내려오자, 저 멀리 오른편에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작은 간판들이 쪼르륵 붙어 있었다. 혜진이 건물 가까이 갔다. 간판을 살펴보았지만,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글자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커피 그림을 보니 저곳이 맞는 것 같았다. 혜진이 1층에 있던 카페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밖에 있던 메뉴판을 열심히 보았다.
‘여기는 코코넛 토스트가 따로 있네…’
혜진은 어제 단체 여행 중 먹었던 토스트를 떠올렸다. 그땐 뷔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후식처럼 있던 토스트를 먹었던 지라 특별히 고를 수는 없었는데, 여기에선 토스트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음~ 뭘 주문할까~’
그녀는 천천히 메뉴판을 넘겼다. 인기척을 느낀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한 학생이 카페에 들어가려다 말고 그녀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어…”
귀 기울여 들어보니 영어가 아니었다. 혜진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학생이 영어로 다시 물었다.
[“들어가실 건가요?”]
[“오, 아니에요. 먼저 가세요.”]
[“오케이.”]
학생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혜진이 먼저 주문할 수 있게 해 주려 물어본 듯했다.
‘착한 학생이네…’
바깥에 서서 메뉴판을 조금 더 읽고 선택을 마친 혜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바깥도 더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습했는데, 안에는 에어컨 덕분에 쾌적했다. 동그란 카운터 뒤로 커피 기계와 반짝거리는 컵들이 보였다. 이파리가 천장까지 솟은 실내 야자 식물 덕에, 비록 작은 카페지만 이곳도 외국이라는 분위기가 풍겼다. 스팀 소리와 함께 진한 커피 냄새가 났다. 좋아하는 향에 주문하려는 혜진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주문하시겠어요?”]
카운터에 선 어린 여성이 물었다. 이곳은 학교 안이니 아마 이 직원도 학생이 아닐까 혜진은 생각했다.
[“아침 메뉴 주세요. 3번으로요.”]
[“3번이요…오, 3번은 지금 안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2번…”]
[“지금 아침 메뉴 되는 것이 채소 수프뿐이에요. 주말이라서요.”]
[“아…”]
생각해 온 메뉴가 전부 안 된다고 하자 혜진은 당황했다. 그녀는 천장에 달린 메뉴판을 열심히 보았다. 하지만 글자는 너무 작았고, 음식은 생소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뒤에 줄을 섰다.
[“엇, 죄송합니다. 먼저 하세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아니에요.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먼저 하세요.”]
[“고맙습니다.”]
이 사람 또한 학생인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공부하러 가는 걸 텐데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싶어, 혜진은 메뉴를 시키던 줄에서 한 걸음 떨어져 섰다. 누군가가 카페 안으로 또 들어왔다. 이번엔 한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카페 직원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목소리가 즐거운 것으로 보아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녀가 카운터에 서서 음식을 주문했다. 혜진은 제 또래인 것 같은 저 사람은 무엇을 주문할까 궁금해 몰래 들어보려 했지만, 그들은 혜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여성 또한 앉을자리를 찾으러 갔다. 혜진은 여전히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그냥 방에 가서 어제 사둔 주스랑 빵을 먹을까?’
지애는 남편 학회 사람들과 부부 동반 브런치 모임에 갔고, 한 시간 뒤면 돌아올 것이다. 오늘 오후에 지애 남편은 세미나에 참석하고, 지애와 혜진은 어제 갔던 관광지 중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 볼 계획이었다.
‘멀리 안 가도 근처 공원을 걸으며 구경하거나 어디 쇼핑몰에 앉아 있을 텐데, 그러면 또 뭘 먹게 될 테니까…’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까 그 중년 여성이 혜진에게 걸어와 말을 걸었다.
[“이곳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 한국. 한국 알아요. 그러면… 학생?”]
혜진이 풉 하고 웃었다. 그녀도 웃는 걸로 보아 농담이리라.
[“아니요. 관광객이에요.”]
[“관광객이시군요.”]
[“네.”]
[“혹시, 주문 도와드릴까요?”]
[“네...? 아, 네.”]
혜진은 이 여성과 카운터 직원이 서로 눈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직원이 자신을 도와주라고 이 여성에게 부탁한 듯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
[“아, 저는 사실 토스트 세트를 주문하려고 했어요.”]
[“토스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죠.”]
[“그런데 코코넛이 들어있는 것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지금 안 된다고 하네요.”]
[“이것 말인가요?”]
여성이 커피와 토스트, 과일과 계란프라이가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아마 과일이 없다는 것 같아요. 제가 비슷하게 주문해 드릴게요.”]
[“오, 정말요? 고맙습니다.”]
중년의 여성은 카운터에 있던 직원에게 무어라 말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주문을 기계에 입력했다.
[“다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둘은 음식이 나올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성이 물었다.
[“싱가포르엔 처음인가요?”]
[“아, 네. 처음이에요… 거의.”]
[“거의 처음?”]
[“20년 전에 한 번 와봤거든요. 그러니 뭐, 사실상 처음이에요.”]
[“와우? 20년 전에요? 아니, 다시 오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신 거죠? 하하, 농담입니다. 그럼, 처음이나 마찬가지군요. 얼마나 오래 여행하시나요?”]
[“내일 밤에 돌아가요.”]
[“내일 밤?”]
[“네. 온 지 이틀 지났어요.”]
[“그렇군요. 어디를 가보셨나요?”]
[“유명한 곳들이요. 머라이언 공원, 가든, 센토사섬에 가서 케이블카도 타고요.”]
[“유니버설 스튜디오?”]
[“아~아뇨. 그런 곳은 이제 못 가요. 전 이제 너무 늙어서 그렇게 오래 못 걸어요.”]
[“뭐라고요? 무슨 말이에요? 늙었다는 말 하지 말아요~ 우리는…비슷한 나이 같은걸요?”]
혜진이 웃었다. 이 중년의 여성은 혜진보다 키는 약간 작았지만 건강해 보였다.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회색빛이었다.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인상이 둥글둥글 귀여워서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혜진이 말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엔 20년 전에 갔었어요. 남편이랑 아이랑 함께요.”]
[“가족과 함께 여행 오셨군요.”]
[“아니요. 그때 그랬고, 이번엔 같이 못 왔어요. 아이는… 바빠요.”]
[“오, 저도 그래요. 저희 애들도 한 명은 미국에, 한 명은 홍콩에 있어요. 다들 바빠요.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봐요.”]
[“네. 그리고… 남편은 죽었어요.”]
[“오! 저도 그래요! 와! 우리는 공통점이 많군요.”]
활발한 대답에 혜진이 풉 하고 웃었다.
[“음식 나왔습니다.”]
혜진과 여성은 각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었다. 여성이 어깨너머로 혜진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
깨끗한 유리창 밖으로 캠퍼스의 푸른 잔디가 잘 보이는 자리에 그녀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혜진도 따라 쟁반을 내려놓았다. 여성이 자신의 쟁반 위에 있던 음식을 혜진의 쟁반 위로 옮겼다.
[“자, 됐어요.”]
[“혹시, 당신 음식을 저에게 주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저, 다른 세트에 들어 있던 것으로 주문한 거예요.”]
[“오,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해요.”]
[“괜찮아요. 가격 차이도 별로 없어요. 20년 만에 왔으면, 먹고 싶은 토스트를 먹어야죠.”]
여성이 친절히 웃어 보였다. 혜진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혹시, 같이 앉으시겠어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식사해요.”]
[“음, 오케이.”]
따뜻한 블랙커피 한 잔과 얼음이 든 아이스티 한 컵을 놓고, 두 여성이 마주 보고 앉았다. 혜진 앞에는 커피와 접시에 담긴 바삭하게 구운 코코넛 토스트 두 조각이 있었다. 그 옆 작은 접시에는 삶은 달걀 2개가 있었다. 파란 바구니 안에 조그만 후추와 간장 병도 보였다. 혜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앞에 앉은 여성도 아이스티를 마셨다. 혜진이 포크와 나이프로 토스트를 잘랐다.
[“하나 드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혜진이 자른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역시 맛있었다.
[“전 이 잼이 정말 좋아요.”]
[“이 잼이요?”]
[“네. 정말 맛있어요.”]
[“한국에는 없어요?”]
[“외국에서 수업한 건 있어요. 아마… 한국에서 만들진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혜진이 삶은 달걀 하나를 들어 그 여성에게 내밀었다. 여성은 또 웃으며 거절했다. 혜진은 테이블에 달걀을 살짝 두들긴 후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껍질을 다 벗겨내고 혜진이 달걀을 한 입 먹으려 했다.
[“오오, 그렇게 말고요.”]
[“네?”]
[“접시에 놓고 잘라서 간장과 후추를 뿌려요.”]
[“아!”]
혜진이 탱글탱글한 달걀을 빈 접시에 올리고 칼로 네 등분으로 잘랐다. 촉촉한 노른자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간장과 후추를 뿌리니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혜진은 간장이 밴 달걀을 한 조각 먹었다.
[“괜찮나요? 싫으면 당신의 방식대로 드세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먹는 게 좋아요. 어제 먹었던 토스트엔 달걀이 프라이로 나왔거든요. 삶은 달걀을 주는 곳은 처음 와봐서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줄 몰랐어요. 하하. 도와줘서 고마워요.”]
[“혼자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요?”]
[“아, 가족은 함께 못 왔지만, 친구랑 왔어요”]
[“그렇군요.”]
[“단체로 왔어요. 어제까지 단체로 여행했고, 지금 친구는 잠시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갔어요. 아마 한 시간 뒤에 올 거예요.”]
혜진은 토스트 한 조각에 달걀을 올려 먹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혀 위로 녹아내렸다.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이 개운해졌다. 혜진이 옆에 있던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저는 김혜진이라고 해요. 혜, 진.”]
“혜-진?”
[“네, 그리고… 당신은, 키니?”]
[“네? 무슨?”]
여성이 혜진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그녀의 휴대폰에는 영어필기체로 키니라 적힌 장식 고리가 달려 있었다.
[“아! 아니에요. 이건 제 강아지 이름이에요. 제 애완동물.”]
[“세상에! 죄송해요.”]
[“아니에요. 하하하, 괜찮아요. 저는 리사예요.”]
[“죄송해요. 리사. 정말 죄송해요.”]
[“하하하, 괜찮아요. 사실, 키니는 아니고 키위인데… 그렇게 보일 수 있죠.”]
[“아, 키위.”]
그녀가 휴대폰에 담긴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 까만 털에 입 주위가 하얀, 귀여운 강아지였다.
[“조그만 슈나우저예요. 제 가족이에요. 키위는 지금 집에 있어요.”]
바구니에 웅크리고 앉은 키위의 뒷모습 사진을 보고, 혜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예쁘네요. 너무 예뻐요.”]
[“어릴 땐 산책을 좋아해서 제가 밖에 나갈 때마다 같이 가자고 조르더니, 이제는 안 따라와요. 나이가 들어서 걷는 걸 싫어해요. 지금도 아마 바구니에서 자고 있을 거예요.”]
[“흠… 저는 그게 뭔지 알아요. 더 이상 긴 산책도 놀이공원 구경도 하기 힘들죠. 키위를 이해할 수 있어요.”]
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오, 아니에요. 그런 말 말아요. 슬퍼지니까… 하하.”]
혜진도 함께 웃었다.
[“저는 여기서 일해요. 이 카페도 자주 오고요. 사는 곳도 이 근처예요.”]
[“살기 좋은 곳 같아요. 조용하고 깨끗하고요.”]
[“네. 맞아요. 좋은 곳이에요. 음… 당신은 어때요, 혜진?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요? 당신도 개를 기르나요? 고양이? 아니면… 오리?”]
리사가 물으며 손짓으로 혜진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혜진의 휴대폰에도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하하, 아니에요. 저는 애완동물이 없어요. 이건 그냥 귀여운 장식이에요. 오리는 아니고, 갈매기예요.”]
혜진이 웃으며 장식을 만졌다.
[“저는 가정주부예요. 서울에 평범한 집에 살고 있고, 특별한 직업은 없어요.”]
[“직업은 없어도 괜찮죠.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행복하죠.”]
[“하하하, 맞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여행 온 것은 드문 일이에요. 최근까지 집에 아이가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도 많았는데, 마침내, 한 번 오게 된 거예요. 이건 아주 특별한 일이에요.”]
[“그렇군요. 저도 비슷해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지금은 특별히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요. 아이들과 함께 살 땐 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지금은 다 떠났고요.”]
[“저도 그래요. 그 시절 같은 에너지가 생기지 않아요.”]
혜진의 말에 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 말이 없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각자의 음료를 마셨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에너지?”]
[“에너지.”]
말하고 둘이 웃었다. 리사가 물었다.
[“그럼, 평소엔 무얼 하나요?”]
[“지금은 취미로 뭔가를 배우고 봉사활동도 조금 하고 있어요. 저도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50이 넘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하지 않아요. 저 또한 젊을 때처럼 항상 건강하고 컨디션이 좋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천천히 생각해 보는 중이에요.”]
[“저도 나이가 50이 넘었고, 몇 년 뒤에 퇴직할 것 같아요. 그런데 싱가포르에선 50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어요.”]
[“맞아요. 저도 봤어요.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커피숍, MRT역에서도요.”]
[“한국에서도 노인들이 일을 많이 하나요?”]
[“네. 이곳과 비슷해요.”]
[“국가에서 도와주기도 하나요? 연금 같은?”]
[“연금은 젊을 때 일을 했던 사람들이 월급을 받으며 오랫동안 따로 모아둔 것을 정부가 나중에 주는 프로그램이 있고, 연금 말고 65세부터 한 달에 미국 달러로 300달러 정도를 주는 게 있어요. 그런데 모두에게 주지는 않고 소득이 낮은 노인에게… 음, 잠깐만요, 한번 찾아볼게요.”]
혜진이 휴대폰을 켜고 검색했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괜찮아요. 궁금할 수 있죠. 잠깐만요…아, 재산 기준이 있는데…”]
혜진은 검색한 내용을 쉬운 영어로 천천히 설명했다. 리사는 혜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연금과 보험, 한 달에 쓰는 생활비 그리고 노인들의 일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국 저희 동네엔 아침에 젊은 사람들이 등교하거나 출근하고 나면, 동네가 좀 한가해져요.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이나 노인들이 밖에 외출을 나오는데,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나와요.”]
[“손수레요?”]
[“네. 기다란 천 가방에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거예요. 모양은 다 비슷한데, 우선 가볍고, 색이랑 무늬가 화려해요. 시장에 장 보러 갈 때 주로 써요. 그런데 시장에 갈 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져가요.”]
[“예를 들면 어떤?”]
[“노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동네마다 있어요. 기본적으로 저렴하고 어떤 경우엔 무료예요. 노인들은 그 수레를 학생들 책가방처럼 써요. 공부하러 가면 책도 넣고, 운동하러 가면 갈아입을 옷도 넣고, 그림 그리러 가는 날엔 물감이랑 붓이랑 종이, 뜨개질하러 가는 날엔 실꾸리. 악기도 넣어가요. 우쿨렐레, 칼림바, 젊을 때 플루트 했던 사람은 플루트도 넣어서 끌고 가고…”]
[“아주 유용하군요.”]
[“그리고 제일 재밌는 점은, 저마다 맛있는 간식을 하나씩은 꼭 갖고 다닌다는 거예요.”]
[“하하.”]
리사가 웃었다. 혜진은 갑자기 민망해졌다. 이런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을까? 하지만 리사의 표정은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혜진이 말을 이었다.
[“저는 매일 비슷하게 살아요. 일주일에 두 번은 센터 가서 뭐 배우고, 두 번은 봉사활동 하러 가고, 나머지 날은 집 정리하고, 단출하게 음식 해 먹으며 보내요. 어디 갈 땐 운동하기 위해서 주로 걸어 다니고요. 절약해서 살면서 세금 내고, 저축하고. 운 좋으면 저축한 것을 병원비로 쓰는 대신 이렇게 여행도 오고요. 보잘것없죠?”]
[“아니에요. 혜진, 저도 그래요. 저도 일 년에 한 번, 아니 이 년에 한 번, 외국에 있는 애들 보러 가는 게 전부예요. 평소엔 일하느라 하루하루가 똑같고요. 사실, 저는 아는 사람의 수가 매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같은 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만나는 사람은 비슷한데, 새로 알게 되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아요. 다른 지역으로 떠나든, 먼 나라로 떠나든, 아니면 하늘로 떠나든…”]
리사가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사실, 다들 비슷할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죠. 이 나이엔 더 힘든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렇죠.”]
맞는 말이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 가냘픈 운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인생을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 빼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잔디가 단정했다. 저 잔디처럼 아주 바싹, 많은 것들을 잘라내야, 그래야 앞으로도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겠지. 혜진이 리사의 짧은 회색 머리칼을 보았다. 아까는 분명 멋진 헤어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리사가 아이스티를 다 마셨다. 컵엔 하얀 얼음만 조금 남았다. 혜진의 커피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혜진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는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나가실 건가요?”]
[“네.”]
둘은 식기를 반납하고 카페 밖으로 나갔다. 덥지만 상쾌한 풀 냄새는 여전했다.
[“저는 이쪽 길로 가요.”]
[“네. 저는 이쪽으로.”]
[“만나서 반가웠어요. 리사.”]
[“반가웠어요. 혜진. 좋은 여행 되세요.”]
[“고마워요.”]
둘은 손 인사를 하고 서로 반대편으로 향했다. 리사는 캠퍼스 밖으로 이어진 길로, 혜진은 잔디 사이로 난 큰길을 거꾸로 올라 걸었다. 오전을 쓸쓸히 보내게 될 줄 알았던 혜진은, 친절한 낯선 이 덕분에 맛있는 토스트를 먹고 즐거운 대화도 나누었다. 어쩌다 보니 여행 이야기를 넘어 혜진의 생활, 한국 노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굳이 드러내서 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였기에 솔직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기분은 조금 우울했다. 일상은 평화롭다, 나쁘지 않다, 말했지만, 중년의 삶은 어디나 비슷하게 힘들고 외로운 것 같았다. 옮기는 걸음이 무거워졌다. 바로 옆 단정한 잔디가 혜진의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푸를 때는 몰랐던 두려움. 그것이 발아래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어떻게 해야 자꾸만 찾아오는 이 기분을 떨칠 수 있을까? 걸음을 멈추고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리사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보통의 활기찬 걸음이었다.
‘키위를 만나러 가는 거겠지?’
키위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그녀는 분명 행복하리라. 혜진은 속으로 기도했다.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고마워요. 잘 살아요. 부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요.’
혜진이 숨을 살짝 들이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사, 좋은 하루 보내세요.”
혜진이 손을 들어 그녀를 향해 흔들었다. 리사의 뒷모습은 점점 더 작아졌다. 곧 그녀가 저 멀리 담벼락 뒤로 사라졌다.
‘안보네…?’
혜진은 손을 내렸다. 만약에 리사가 돌아보았다면, 그래서 이 언덕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혜진을 발견했다면, 분명,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 상상으로 혜진은 행복해졌다.
“리사, 안녕.”
다시 부를 일이 없을 이름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혜진은 돌아섰다. 건물로 향하는 혜진의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Hello and Good bye, Lisa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