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혜진은 한 손에 따뜻한 유자차를 들고 작은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차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열었다. 카페 음악을 선택하자 잠자던 스피커가 깨어났다. 부드러운 선율이 방 안을 채웠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벌건 손가락은 여전히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 주방에서 아침에 사 온 채소들을 다듬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 완성한 후 창 앞에 세워둔 그림을 보았다. 그것은 잔디밭 너머로 보이는 한 카페 그림이었다. 엽서만 한 크기의 그림은 그게 전부였지만, 혜진의 눈엔 더 많은 것이 보였다. 반듯한 테이블과 그 위에 있던 먹음직한 토스트, 향기 좋은 커피. 그리고 혜진이 항상 응원할 리사와 키위도 있었다. 혜진은 기념품으로 사 온 조그만 머라이언 스노볼을 그림 앞에 두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드로잉스타 앱을 켰다. 처음에 올린 것은 단호박과 생강 사진이었다. 지금은 깨끗하게 씻고 냉장고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그다음에 올린 것은 바로 카페 그림과 머라이언 스노볼을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녀가 ‘싱가포르’라고 태그를 달았다. 혜진의 그림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좋은 그림이에요. 한국인가요?]>
<[싱가포르예요.]>
<[평화로운 풍경이군요. 스노볼 속 동물은 상상의 동물인가 보죠?]>
<[네. 싱가포르의 상징이에요.]>
<[아마, 옷쏘(Otso) 같은 것인가 보군요.]>
‘옷쏘(Otso)가 뭐지?
혜진이 검색창에 옷쏘(Otso)를 검색했다. 커다란 곰이었다. 그런데 아주 멋진 뿔을 갖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상의 동물일 것이라고 혜진은 이해했다. 혜진은 드로잉스타를 이용하면서 그녀처럼 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혜진이 주로 찾던 그림은 꽃이나 나무, 혹은 정원 그림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사진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 그림을 찍어 올린 사진이었는데, 그 그림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나무 책상 위엔 깔끔하게 정리된 미술용품들이 가득했고, 창밖으로는 잘 가꾼 짙은 초록의 정원이 보였다.
혜진은 그 계정 속 사진들을 차례차례 보았다. 모두 비슷한 구도였지만 풍경은 조금씩 변했다. 정원 속 꽃과 나무의 색이 바뀌었다. 도자기로 만든 정원 장식의 종류가 달라지거나, 없던 조명이 생겨나기도 했다. 책상 위 자잘한 물건들도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었다. 하지만 항상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는 것은 똑같았다. 그림은 사람이 그렸지만, 사진은 시간이 그리고 있었다. 동화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듯한 이 사진들에 달린 글을 자세히 읽어보니, 계정을 만든 이는 핀란드에 살고 있었다. 혜진은 한 그림에 감탄 댓글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 또한 혜진의 그림에 좋은 말을 달아주었다. 둘은 서로를 팔로우했다. 그 계정주도 혜진도 자신의 사진이나 소개말을 올려두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림만으로 그들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핀란드에 사는 그 혹은 그녀는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 책상을 두고 앉아, 낡은 나무 손잡이가 달린 긴 붓에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밖으로 나가 정원을 가꾸었다. 혜진은 회색 건물들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에 책상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얇고 검은 펜으로 섬세한 선을 만들고, 수채용 플라스틱 연필에 물을 채워 종이에 색을 입혔다. 혜진은 일주일에 두 번, 먼 재래시장에 가서 소박한 장을 보았는데, 사 온 채소를 깨끗이 씻고 다듬어 언제든 바로 요리할 수 있게 만들어 두는 것이 그녀가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 주로 하는 일이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호박죽을 만들 단호박은 잘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손질한 생강으론 생강차를 만들 계획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얼었던 손이 충분히 부드러워지자, 혜진은 새로운 그림을 시작했다. 센터에서 받아온 크리스마스 홀리 사진을 꺼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승우에게 보낼 카드를 직접 그리고 싶었다. 혜진이 사진 뒤를 연필로 검게 칠했다. 그것을 도화지에 올려놓고, 그녀가 홀리를 따라 선을 그렸다. 도화지에 윤곽선이 그려졌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혼자 그리는 것이 그다지 쓸쓸하지 않은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센터에서 그림 수업을 들으며 그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구도를 잡는 것도 센터에서 가르쳐 준 방법이었다.
혜진은 작지만 깨끗한 교실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모여있다고 시끌벅적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다들 별다른 말 없이 그림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좋았다. 다 같이, 신중하게, 열심히 예쁜 그림을 그렸다. 수업이 끝나면 혜진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은 책상에 펼쳐두었던 필통, 붓, 팔레트, 물통, 수채화 패드를 정리해 손수레에 넣고, 아직 앉아 있는 사람들 책상에 귤을 하나씩 올려주며 교실을 나갔다. 겨울은 노인들에게 춥고 외로운 계절이었지만, 이름 없는 귤 한 알은 따뜻했다.
혜진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그림이에요.]>
그가 두고 간 열쇠고리를 보고, 혜진은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 후론 특별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데, 방금 올린 그림을 보고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싱가포르인가요?]>
<[네.]>
혜진의 답장에 앤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언제? 오래전에? 아니면… 지금?’]
앤디가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 내가 그걸 왜 알려고 하는 거지?’]
앤디는 메시지를 지우고 그림에 <좋아요> 버튼만을 누른 뒤 앱을 닫았다. 앤디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마도 앤디의 습관이었다. 누군가가 무엇을 말하면 바로 공통점을 찾아내어 유대감을 쌓고 그렇게 연을 맺는 것. 영화촬영장은 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가득했고, 앤디는 거의 모든 대화를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이번에도 앤디는 머라이언 스노볼을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진 것이었다. 자신도 엊그제 직접 가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앤디가 창밖을 보았다. 초록 나무와 어우러진 정갈한 도시가 보였다. 앤디는 지금 싱가포르에 있는 모린의 집에 있었다. 갑자기 거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앤디가 고개를 돌렸다.
소피는 거실 소파에 누워 벽에 달린 커다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모린이 거실로 걸어 나왔다.
[“여행은 나쁘지 않았어요. 좀 피곤했지만요. 하하, 그래요 조심해야죠. 고마워요…응… 그랬구나… 생각해 봤는데, 가정부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서 안 되겠어. 새로운 에이전시에 전화를 해볼까 하는데, 거기는 어때요?”]
그녀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소피가 다니는 학교의 다른 학부모와 이야기 중이었다.
[“그래. 영어를 좀 해야지… 아예 안 되는 건 아닌데, 뭐랄까…자세한 걸 시키면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건지…”]
모린이 소파에 앉았다.
[“네, 거기 연락처 좀 부탁해요. 나중에 봐요. 안녕.”]
모린이 전화를 끊고 소피가 보고 있던 티브이 화면을 보았다. 싱가포르 방송이었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소피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바꾸었다. 소피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학교 갈 준비 했니?”]
[“네.”]
소피는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티브이에는 2년 뒤에 있을 커먼웰스 게임에 대한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영국 왕이 축사를 읽었다. 모린이 말했다.
[“루크가 나간다는 게 저거구나.”]
루크는 소피의 어릴 적 친구였다. 그는 영국에 살고 있었다.
[“루크가 커먼웰스에 나간대.”]
[“… 그래요? 뭐로요?”]
[“럭비.”]
[“아…”]
럭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소피는 그 꼬마가 이제는 우락부락하게 변했으려나 생각했다.
[“저건 아니고, 아마 유스게임이겠죠.”]
[“결국엔 다 같은 것 아니겠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너도 그때 펜싱을 그만두지 말고… 너 어디 가니?”]
소피가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소피를 쳐다보던 모린은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뮤추얼펀드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모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며칠 전 펀드매니저가 인덱스펀드와 ETFs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었다. 그때도 열심히 설명을 들은 후에야 겨우 조금 이해했는데, 지금 나오는 뉴스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린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휴…이런 걸 누가 알아듣겠어? 너무 복잡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런 뉴스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건가? 골탕 먹이려고?”]
[“엄마, 그거 알아? 한국인들은 천재야.”]
[“깜짝이야…”]
어느새 거실로 돌아온 소피가 모린 뒤에 서 있었다. 그녀 또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소피는 한 손에 사과를 들고 있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먹은 소피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평범한 사람도 수학을 잘해.”]
[“응?”]
[“한국인들은 수학을 잘한다고.”]
[“그래? 아시아인들이 그렇겠지.”]
[“그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어. 거의 전 국민이. 지금 한국의 4, 50대는 대학 진학률이 70퍼센트가 넘었어. 엄마 나이 사람들.”]
[“그래서 너를 이 학교에 보냈어. 공부는 아시아 학교가 최고니까.”]
[“……내 말은, 한국이란 나라는 지금 가면, 길거리에 마주치는 성인 한국인들 대부분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란 뜻이야. 사무실에서 일하던,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던, 그 어느 곳에서 일하던.”]
모린은 소피의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바꾸었다.
[“놀랍지 않아? 엄마?”]
[“…응? 뭐가?”]
소피를 보고 모린이 잠시 생각했다.
[“아, 그건…글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일종의 교육의 낭비 아닐까?”]
소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엄마 말대로라면, 내가 다니는 학교 자체가 낭비인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학교에선 케임브리지 학위를 가진 선생님이 유치원생도 가르쳐. 그게 낭비란 이야기야?”]
[“그건 다르지. 그분들은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받으며 뛰어난 애들을 가르치는…”]
[“엄마가 말했었잖아. 기본적으로 어떤 기준 이상인 사람들만이 이 학교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학교가 특별한 거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고급 교육을 받았어.”]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소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모르지. 엄마는 한국에 가서도 아무랑도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그거야 그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잖아.”]
[“그들도 영어를 해. 엄마가 한국말을 못 하지.”]
[“내가 왜 한국말을 해야 하니? 아니, 대체 누가 한국말을 하겠니?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나 한국말을 하지.”]
[“엄마는 싱가포르에 살아도 중국어를 하나도 못 하잖아.”]
모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딴 게 뭐? 그녀는 지금껏 살면서 한국어나 중국어를 못한다는 핀잔을 듣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소피, 네가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엄마를 무시하는 건 옳지 않아.”]
[“나는 엄마를 무시하지 않았어. 난 그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똑똑하다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서 엄마를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렴. 루크가 해 낸 걸 봐. 어렸을 때도 그 아이는 정말 인내심이 뛰어났지. 너도 그 정도는 하고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 운동은 이미 그만두었으니, 좋은 대학에 가서 나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봐.”]
[“엄마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잖아.”]
[“소피?!”]
모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화낼 것 없어. 나도 대학을 안 나왔는걸. 내 말은 엄마와 내가 똑같다는 거야.”]
[“똑같다니? 너는, 너는 다르지! 너는 대학을 갈 거고!”]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물론, 갈 거지만, 안 갈 수도 있…”]
[“뭐라고?”]
모린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앤디가 거실로 나왔다.
[“무슨 일이니?”]
[“아…아, 정말! 너는 점점 더 제멋대로 구는구나!”]
모린이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소피는 입에 물고 있던 사과 조각을 씹지도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앤디가 소피에게 걸어갔다.
[“소피…”]
소피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앤디는 소피가 침착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앤디는 소피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거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손녀의 마른 몸이 떨렸다. 앤디가 소피를 토닥였다. 그는 소피에게 저쪽으로 가자고 눈짓했다. 앤디와 소피는 부엌으로 갔다. 소피를 바에 앉히고, 앤디는 물 한 잔을 따라 소피 앞에 두었다. 소피는 고개를 숙인 채, 물 잔을 보고만 있었다. 앤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잠시 후, 앤디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렴. 내가 갖고 있을게.”]
소피가 들고 있던 사과를 앤디에게 건넸다. 소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피… 네 엄마는 저렇게 흥분하면 안 돼.”]
[“……”]
[“엄마는 지금 감정이 들쑥날쑥해.”]
[“……”]
[“물론, 안다. 소피. 네 엄마가 잘못했어.”]
[“……”]
[“엄마가 나빴다.”]
앤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피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많이 속상하지? 네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앤디가 소피 옆에 앉았다. 소피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앤디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는 들고 있던 사과를 바 테이블에 올려놓고 휴대폰의 알람을 껐다. 잠시 후, 소피의 휴대폰에서도 음악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도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바에 앉아 있었다. 십 분 정도 흘렀을 때, 저쪽에서 무언가 탁탁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다시 거실로 나온 모린이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소피는 할아버지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잠시 후, 모린이 복도로 걸어갔다. 아마 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소피는 긴장이 풀렸다. 앤디는 소피를 한 팔로 꽉 안고, 머리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우리 예쁜 소피…”]
소피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손녀…”]
소피도 앤디를 안았다. 앤디는 소피를 토닥였다. 잠시 후 소피가 물을 마셨다. 앤디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사과를 집어 소피에게 내밀었다. 소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앤디는 사과를 한입 먹었다.
[“맛있구나. 어제 같이 나갔을 때 사 온 거였나?”]
[“……”]
[“가서 더 사 와야겠구나.”]
[“… 할아버지.”]
[“응?”]
[“… 한국은 성인의 70퍼센트 이상이 대학에 갔대요.”]
[“뭐?”]
[“그들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국민이 그렇게 공부했대요.”]
[“오, 그러니? 대단하구나”]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알게 된 거예요.”]
[“좋은 것을 배웠구나.”]
소피가 고개를 들어 앤디를 보았다. 앤디가 미소 지었다. 소피도 앤디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앤디가 소피를 토닥였다. 소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단다. 소피.”]
날이 부쩍 추워졌다. 출근길에 바깥공기가 서늘한 것이, 당장 오늘 밤부터 눈이 내릴 것 같았다. 폐백실 창고에 들어간 혜진이 근무복 차림으로 나왔다. 잔잔한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폐백실도 크리스마스 단장을 했다. 마루 위 병풍 앞엔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도 있었다. 특별히 만든 자개 장식품 사이사이, 구슬 전구가 반짝거렸다. 혜진이 멍하니 트리를 바라보았다. 승우가 고등학생이 되고, 남편이 병에 걸린 그쯤부터, 집엔 더 이상 트리가 없었다. 빛을 따라 추억이 깜빡거렸다.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마법이 있었다.
“여사님, 이거요.”
혜진은 직원이 건네는 빨간색 산타 요정 모자를 받았다. 직원은 이미 요정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혜진이 거울 앞에 섰다. 작은 핀으로 그녀가 모자를 머리에 고정했다.
“이런 걸 다 하라고 하네요.”
“좋죠. 연말 기분 나고.”
“어머, 여사님도 이런 거 좋아하세요? 저도 사실 너무 좋아해요. 하하하.”
직원은 휴대폰 속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귀염둥이들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방 안에서 루돌프 코를 붙이고 놀고 있었다.
“주말에 시청에 가려고요. 스케이트장이랑 눈썰매장이 있대요. 크리스마스트리도 크게 해 놓고요. 저번에 백화점 가서 트리를 보고 애들이 입이 떡 벌어져 놀라더라고요. 너무 크고 예쁘대요.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는데…”
“광화문이랑 청계천에도 볼거리를 잘해놨대요.”
“아, 거기도 가야겠다. 남편한테 말해놔야지.”
바로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 계획을 세우는 직원이, 혜진은 너무나 예쁘고 또 부러웠다.
“오늘도 예약한 관광팀이 있어요. 이렇게 추운데. 저 같으면 따뜻한 나라에 있지, 여기 안 올 것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눈 보러 온대요. 그 나라엔 눈이 안 와서.”
“아~ 그렇구나.”
직원이 휴대폰 검색을 했다.
“그럼 온 김에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가야 하는데… 아직 눈 소식이 없네요.”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며 들뜨던 때가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여사님은 크리스마스에 뭐 하세요?”
“저요? 별다른 거 없어요.”
서양에서나 크리스마스가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지,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휴일 그 이상은 아니었다. 혜진은 옛 생각이 났다. 오래전 혜진이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는 한 미국인 가정에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집 안은 혜진에겐 마치 영화 촬영장 같았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아주머니는 손님으로 온 혜진에게 그녀가 처음 보는 음료를 내밀며, 거실에서 편하게 트리 구경을 하라고 했다. 높은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트리에 넋이 나간 혜진은, 곧 그보다 더 크고 넓은 주방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집주인아주머니가 혜진이 난생처음 보는 음식들을 만드는 것을 보고, 혜진은 자진해서 음식 준비를 도왔다. 카운터 위에 있던 다양한 종류의 음료수병을 구경하던 혜진에게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혜진, 한국에선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교회를 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데이트해요.’]
[‘거기선 크리스마스에 뭘 먹어요?’]
[‘특별히 크리스마스 음식은 없어요.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풍성하게 음식을 차리고 온 가족이 모이진 않아요. 이런 행사는 ‘추석’이라고, 이곳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날에 해요. 크리스마스는 가족보단 연인의 날이에요.’]
[‘오, 그러면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특별하진 않겠네요.]
[‘아이들에겐 특별해요. 선물을 받으니까요.’]
[‘하하. 그렇죠. 맞아요. 혜진도 어릴 적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어요?’]
[‘아니요. 저희 집엔 크리스마스가 없었어요.’]
[‘뭐라고요?’]
[‘저희 부모님은 특별히 그걸 기념하지는 않으셨어요.’]
집주인아주머니의 깜짝 놀란 표정에 혜진이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사실, 뭐, 몰랐으니까 슬픈 것도 없었어요. 부모님은 특별히 종교가 있지 않았고, 교회도 다니지 않으셨어요. 저도 어릴 적엔 그런 걸 잘 몰랐고요.’]
[‘오, 혜진, 불쌍해라.’]
[‘아… 아니에요. 저 행복해요. 지금! 행복해요. 이런 멋진 식사에 초대도 해주시고, 정말 이 순간이 선물 같아요. 진짜예요. 감사합니다.’]
[‘오, 혜진.’]
말을 보태면 보탤수록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하자, 혜진은 자신이 좋은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진땀이 났다.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혜진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민망했지만 고마웠다. 30년이 지났어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날 생각이 났다. 그 한 번의 식사가 혜진이 기억하는 서양의 크리스마스 전부였다.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트리도 좋았지만, 자신 같은 낯선 이를 초대해 대접하는 그 마음이 혜진이 배운 크리스마스였다. 생각해 보면 좋은 기억은 항상 좋은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마무리 정리를 마친 혜진과 직원이 창고에서 겉옷을 입고 나왔다. 직원이 스위치를 눌러 폐백실 밖 유리 등 불을 껐다.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안녕히 들어가세요.”
“어, 여사님. 머리에?”
“네? 아, 하하.”
혜진이 여전히 요정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벗어 책상 위에 놓고, 둘은 폐백실에서 나왔다. 직원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주차장으로 걸어갔고, 혜진은 정면의 대리석 계단을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녁 시간 퇴근길에는 차도 사람도 많았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눈사람 같은 모습으로 바람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혜진도 능숙한 솜씨로 사람들 무리에 합류했다.
‘어?’
하얀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만 보고 가던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깜깜한 하늘에서 가느다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옷들 위에 하얀 눈송이가 나풀거렸다.
<올해 첫눈이 오고 있습니다…>
건물 위 전광판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광화문 앞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는 연인, 특별한 케이크를 만드는 요리사, 받고 싶은 선물을 카드에 적는 유치원생들,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님, 구세군 자선냄비에 용돈을 넣는 청소년, 크리스마스에도 나라를 지키는 앳된 군인들, 무료 급식소에서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배식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뉴스에 차례로 나왔다. 그다음엔 핀란드 어딘가 있다는 산타 마을의 분주한 모습과 호주와 두바이의 한여름 크리스마스 풍경, 그리고 바티칸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황이 등장했다. 마지막엔 한국의 작은 성당이 나왔다. 성당을 방문한 스님을 신부님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정중히 맞인사를 나누는 그들 뒤로,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반짝 빛났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마법이 정말로 있었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