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앤디가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방은 어두웠다. 앤디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였다. 약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생각보다 오래 자버렸다. 앤디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으…”]
머리가 아팠다. 손으로 이마를 짚자 끈적한 땀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앤디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커튼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진 런던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로등 몇 개만 쓸쓸히 빛을 내고 있었다. 앤디는 창문 앞 탁자 위에 있던 물을 컵에 따라 마셨다. 맛이 이상했다. 그가 컵 안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젠 괜찮은 것 같았다. 아마도 입안에 약 맛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비린 풋내와 느끼한 끝맛. 앤디가 싫어하는 맛이었다.
[‘우웩…’]
아주 오래전, 교회 앞 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놀던 5살 앤디 코넬은 실수로 다른 이의 음료수를 마시고 말았다. 이상한 맛에 그는 구역질하며 물을 뱉어냈다.
[‘바보야, 그거 네 거 아니야.’]
[‘누가 풀 끓인 물을 넣었어. 역겨워.’]
[‘이거 마셔.’]
레베카가 피식 웃으며 다른 물병을 앤디에게 건넸다. 앤디는 레베카가 시키는 대로 새 물을 마셨다. 앤디는 어릴 적 몸이 허약하고 비위도 약했다. 반면에 레베카는 튼튼하고 똑똑했다. 그녀는 앤디보다 4살이 많았다. 레베카는 앤디에게 명령하는 것이 익숙했고, 앤디는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따랐다. 레베카는 앤디의 입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앤디의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고 머리카락도 다듬어주었다.
[‘앤디, 날씨가 정말 좋아. 그렇지?’]
[‘응. 천국 같아.’]
[‘천국? 하하하.’]
레베카가 들판을 바라보았다. 교회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데이지 꽃밭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맞아. 그래. 천국 같아. 천사 같은 너와 네 친구들 덕분에.’]
앤디가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앤디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이제가 봐.’]
[‘응.’]
앤디가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앤디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흔들었다.
앤디가 창문 앞 의자에 앉아 어두컴컴한 방 안을 보았다. 그의 런던 저택 2층에 있는 이 방은 저택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은 아니었다. 저택의 중앙에 있어 드나들기 편하고 잘 관리한 덕에 내부는 깔끔했지만, 방 크기는 조금 작은 편이었다. 안에 있는 가구도 방의 크기처럼 작았다. 짙은 갈색 침대와 창문 옆 탁자는 좋은 나무로 튼튼하게 만든 것이었지만, 디자인은 매우 단순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들과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부드러운 베이지색에 옅은 하늘색과 금색, 가끔은 앤디를 위해 강렬한 파란색이 들어간,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 대부분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앤디가 치워버린 그녀의 것 중 남은 것 몇 개가 저택 3층, 그 방에 있었다.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된, 이 저택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빈자리를 채우듯, 앤디는 다른 나라에 가면 자잘한 기념품들을 잔뜩 사 왔었다. 그녀와 가본 적 없는 곳일수록 더 그랬다.
앤디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두 뺨은 수척해졌고 입술은 허옇게 갈라졌다. 호주에 다녀온 후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렸다. 기침 때문에 목이 쉬었고 가슴엔 깊은 통증이 생겼다. 열은 내렸지만, 아직 몸에 힘이 없었다. 앤디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숨이 무거웠다. 며칠을 쉬었는데도 지겨운 감기 끝은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앤디가 의자에 앉았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그의 몸과 마음은 너무나 메말라, 툭 건드리면 부서져 사라질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생명력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앤디가 눈을 감았다. 이 방에 있음에도 이 방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앤디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그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지친 몸 위로 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둡고 안락한 방은 외롭고 차가웠다.
두 눈을 감은 앤디의 머릿속에 3층, 그 방의 커다란 문이 떠올랐다. 문이 열리자, 맞은편 창문에서 밝은 햇빛과 상쾌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로열 블루색 카펫 주변으로 화려한 가구들이 빙 둘러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사방에 오색 빛을 뿌렸다. 곳곳에서 그녀가 서 있고, 앉아 있고, 말하고, 웃었다.
앤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릿속 3층 방문이 또 한 번 닫혔다. 천천히 실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둡고 작고 조용한 그의 방이었다. 그는 천국을 닮은 그 방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그녀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방에 가면 그는 그녀가 이곳에 없는 것뿐 아니라, 이다음에도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 아닐까?
[‘여기가 우리의 천국이었다면, 그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앤디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었다. 부드러운 이불에 숨이 막혔다. 그는 한동안 숨을 멈췄다.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릴 때, 그는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간절한 호흡이 가슴속부터 터져 나왔다. 그가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
더 이상 그 방에 가지 않아도, 그녀는 용서하리라. 지친 몸으로 매일 죽음을 연습하는 그를, 그녀라면 분명 가엾게 여겨줄 것이기에.
시간이 흘렀다. 앤디가 잠들었다.
또록
앤디의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화면에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메일 확인해 주세요. from 조쉬]>
<[앤디와의 우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새 출발 하는 에바의 새해 첫 인터뷰]>
<[코넬 씨, 새로운 예약 알립니다]>
<[앤디, new 메일 확인해 주세요. from 조쉬]>
<[HOT: 진정한 친구가 된 앤디와 에바]>
<[안녕하세요! 코넬 씨, A&L입니다]>
<시금치>
휴대폰 화면에 초록색 시금치 한 다발이 등장했다. 윤슬이 반짝이는 강을 배경으로 찍은 싱싱한 시금치였다. 두 눈을 꼭 감은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푸른 시금치 빛이 비쳤다.
남향 아파트여도 난방을 아낀 탓에 집이 냉랭했다. 아침엔 더 그랬다. 혜진은 식탁에 앉아 떡국을 먹고 있었다. 뜨끈한 사골 국물에 노란 계란 지단을 넣고 검은 김 가루를 뿌린 간단한 떡국이었다. 설날에 먹고 남은 떡이 있었다. 승우가 있을 때처럼 떡을 많이 사 온 것이 남았다. 혜진이 떡국을 한 숟갈 떴다. 철 숟가락 위에 동글납작한 떡이 국물을 머금어 탱탱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띠리링 띠띠 띠리링
휴대폰이 울렸다. 혜진이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응. 미희야.”
<“뭐 해?”>
“밥 먹어.”
<“뭐 먹어?”>
“떡국.”
<“뭔 떡국을 아직도 먹어? 2월인데.”>
“떡 남은 게 있어서.”
<“으이구, 증말. 신경 쓰여.”>
“하하하…”
<“승우는 연락 왔어?”>
“응. 전화 왔었어.”
승우의 신병교육대 수료식에 미희가 같이 가주었었다. 펜션을 예약한다길래 뭘 그렇게까지 하나 생각했었는데, 미희 말을 듣기를 잘했다. 덕분에 승우는 잠시나마 잘 쉬고 잘 먹고 들어갔다.
<"찐아, 다음 달에 제주도 가자.">
"제주도? 뭐 하러?"
<"나물 뜯으러.">
"아…"
<"왜? 바빠? 안 되나?">
"아니, 바쁘진 않은데, 일하는데 얘기를 해놔야 해서. 내일 출근하니까 가서 말해볼게."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이모, 안녕하세요?">
미희의 딸이 인사했다.
"어, 그래. 안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아."
<"이모, 저 절도하고 있어요. 제 절 받으세요. 엄마, 화면 켜.">
미희가 화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모, 세뱃돈 주세용.">
<"니가 왜 절을 하나 했다.">
"어머, 이뻐라, 이모가 세뱃돈 줘야겠다."
<"주기는 뭘 줘, 직접 가서 해야지.">
<"잉잉, 주세요.">
"그래, 줄게. 하하하"
<"너 그렇게 돈 쉽게 벌려고 하면 안 된다. 이모가 널 보고 주니? 날 보고 주지…">
미희의 타박이 이어졌다. 혜진은 그저 웃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혜진이 마무리 청소를 마쳤다. 오늘도 바빴던 폐백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처럼 다시 깨끗해졌다. 며칠 전 봄맞이 대청소를 한 덕에 폐백실은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겨우내 마루 위에 있던 크리스마스 장식은 온데간데없었다. 병풍 앞 도자기 꽃병에 꽂힌 분홍색 진달래꽃이 화사했다. 혜진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여사님,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아참, 여사님, 올해 재계약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연락을 못 받았어요.”
“그래요? 다른 분들은 다 연락을 받은 것 같은데…”
“아…그럼, 안 되려나 봐요.”
“어, 정말요? 이상하다…”
“다른 데서 들었는데, 저는 어려울 수도 있대요. 60세 이상이 되어야 정부에서 인건비 지원을 해주는데, 저는 너무 젊다네요.”
“하지만 여사님은 임금도 적게 받으시고 영어도 하시는데…”
“밖에서 보면 청소랑 정리만 하면 되는 거라, 그런 건 상관없나 봐요.”
“아, 안 되는데… 여사님 아니면 저 혼자 여기 오는 모든 관광객과 다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후…”
“좋은 분이 오시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뵐게요.”
혜진이 인사하고 폐백실을 나왔다. 그녀는 대리석 계단으로 걸어갔다. 마찬가지로 며칠 전 봄맞이 물청소를 한 덕에 계단은 유난히 깨끗했다.
‘이제 이 계단을 오를 날도 얼마 안 남은 건가?’
혜진은 뽀얀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낮에 불던 따뜻한 바람은 고새 사라졌지만, 퇴근길 사람들 옷차림은 밝고 가벼웠다. 서울이 이렇다면 아래는 더 따뜻하리라.
‘제주도 갈 걱정은 없겠다.’
혜진이 미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
<주연이는 못 온대. 지금 한창 바쁜가 봐.>
‘경주는 봄에 바쁘겠지.’
휴대폰 알람이 떴다. 혜진의 그림에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몇 달 전 시장에 다녀오며 한강을 건널 때 찍은 시금치 사진에도 같은 이가 <좋아요>를 눌렀다. 혜진이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실수인가?’
그녀가 길을 나섰다. 찬 바람 사이 섞인 보드라운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 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한가한가?... 아니, 아니지. 내가 누구보고. 하하하.’
그녀가 혼자 조용히 웃었다. 뾰족한 나뭇가지에 움튼 초록 봉오리들이 보였다. 아직 날 리 없는 봄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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