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주

헬로, 앤디 2

by SY전서주




어깨까지 올라오는 검은 돌담을 왼편에 끼고 미희와 혜진이 나란히 길을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그림처럼 파랬다. 푸근한 바람이 검은 돌담 안, 노란 유채꽃밭을 살며시 흔들었다. 진한 꽃향기가 뭉게뭉게 퍼졌다.



“조심해.”



미희의 말에 혜진이 오른쪽 뒤를 슬쩍 보았다. 작은 자동차 한 대가 좁은 길 위를 걷던 둘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를 못 볼 수도 있어. 저 사람들도 바다를 보고 운전할 테니까.”



혜진이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가 넘실거렸다. 정말, 우리 따위는 보이지도 않겠다고 혜진도 생각했다. 미희와 혜진은 계속 걸었다. 둘은 돌담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들판에 도착했다. 초록 들판 위에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분홍, 하양, 노란색의 아담한 꽃들이 반가웠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꽃 사이에 난 초록 풀들에 고정되었다.



“벌써부터 보이네.”

“많이 났다.”



초록색 쑥이 지천이었다. 아직 어린잎이 혜진과 미희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둘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들판을 지나 하늘을 향해 둥글게 부푼 언덕으로 향했다. 오르막을 10분쯤 걸어, 혜진과 미희는 드디어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뜨끈한 햇볕이 머리 위로 오롯이 쏟아져 내렸다. 멀리 시원한 바다가 가득 보였다.



“여기네.”

“벌써 사람들이 와 있어.”

“유명한 곳 맞는가 보다.”



언덕 여기저기 나물을 캐는 사람들이 있었다. 혜진과 미희도 머무는 펜션의 소개를 받아 이 나물 캐는 곳을 알았다. 둘은 어깨에 메고 있던 헝겊 가방에서 챙이 넓은 모자와 스카프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멋진 선글라스도 쓴 그들은 장갑을 끼고 작은 호미를 들었다.



“여기 달래 많은 것 봐. 이뻐라.”

“향기도 좋아.”

“봄엔 꽃구경보다 나물 구경이야.”

“하하하. 맞아. 먹을 수도 있으니.”

“저녁에 전 부쳐 먹자.”



둘은 좀 떨어져 앉아서 나물을 캐기 시작했다. 혜진은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냄새가 퍼졌다. 콧속을 타고 들어와 목구멍을 넘어 가슴속에 쌓이는 정갈한 흙냄새는 혜진의 마음을 맑게 해 주었다. 머지않아 혜진은 무릎이 아파졌다. 쪼그려 앉아 있던 그녀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철퍼덕 앉았다. 혜진이 캔 쑥을 집어 들었다. 달려있던 흙을 곱게 털어냈다. 가까이 대고 맡아보니 어린 쑥 향기가 맑고 진했다. 혜진은 계속 봄나물을 캤다.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날아왔다. 윙윙 소리를 내며 머리 곁을 도는 벌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운 기분이 들었다. 송골송골 맺힌 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그녀는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러자 이번엔 머리카락 대신 흙이 묻었다.


벌 소리가 사라지고,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 푸른 바다와 눈이 마주쳤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언덕 위로 단숨에 날아왔다. 머리에 두른 꽃무늬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고, 통 넓은 바지 안으로 바람이 한가득 소용돌이쳤다. 진한 풀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온몸에 봄을 잔뜩 묻힌 채, 혜진은 잠시 손을 멈췄다. 높은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그녀는 땅 위에 아주 낮게 앉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언덕 위 수많은 들꽃 중 하나인 듯, 그녀는 계속해서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혜진은 나물을 정리했다. 호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그녀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놀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엄마가 만들어준 우산 그늘에 예쁜 수영복을 입은 아기가 모래놀이를 하고, 아빠는 사진을 찍었다. 혜진이 나물을 헝겊 가방에 넣었다. 그녀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르르 웃는 어린 승우의 목소리. 혜진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거만 가져갈 거야?”



옆에 걸어온 미희가 물었다. 하지만 혜진은 대답이 없었다.



“고만큼만 가져갈 거면 가방에 내 것 좀 넣어줄래?”

“……”

“혜진아?”

“응?”

“왜 그래?”

“아, 아니야.”



혜진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낮이 되기 전에, 혜진과 미희는 언덕을 내려왔다. 둘은 아침보다 조금 불룩해진 헝겊 가방을 메고 검은 돌담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아휴, 힘들다. 점심 먹고 쉬었다가, 해 조금 지면 산책 갈까?”

“그래.”

“내일 저녁 비행기인데 그전에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



하지만 혜진의 머릿속엔 피하고 싶은 곳들만 금방 떠올랐다.



“내일은 바닷가에 내려가서 방풍나물 캘래? 그리고 점심 먹고 비행기 타러 가면 되겠다. 점심을 유명한 데서 먹을까? 뭐 먹을래? 전복? 흑돼지?”

“내가 티브이에서 봤는데, 서귀포에 퓨전 레스토랑이 있더라고. 유명하대. 새로 생겼대.”

“퓨전 레스토랑? 뭐 파는 곳인데?”

“파스타랑 샐러드.”

“파스타?”

“응…”

“… 나물 캐느라 질렸어?”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한 손에 호미를 쥐고, 나물을 가득 담은 천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래. 파스타 먹으러 가자.”



혜진은 웃음이 터졌다.



“우리 김혜진이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미희가 다시 걸었다. 혜진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 혜진이가 먹고 싶은 거 먹어.’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또 혜진을 쫓아왔다. 혜진은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 위 뜨끈한 해가 그녀의 축축한 마음을 모두 말려주길, 그래서 산뜻한 봄바람처럼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그녀는 제주 바다가 보이는 좁은 길을 친구와 나란히 걸으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경주에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 두 개 있었는데, 북천과 남천이었다. 지금은 강이라기보단 개울에 가까워 보이지만, 물이 맑고 강 주변의 꽃과 나무가 아름다우며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주연은 경주에 이사 와서 북천 산책을 자주 했다. 남편과 거의 매일 운동 겸 같이 걸었고, 아이들이 경주에 내려오면 밥 먹고 산책 한번 하자며 북천을 걸었다.


산책로를 꽉 채우며, 주연은 남편과 아이들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 거진 다섯 걸음마다 멈춰 서서 그들은 휴대폰으로 온갖 사진을 찍었다. 화려한 봄꽃에 취해 별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땐 새소리도,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몰랐다. 주연은 누군가가 아파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 가족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주신 축복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시간이 흘렀다. 숨 막히는 여름과 추운 겨울이 지나갔다. 아픈 남편은 점점 산책을 피했고, 바쁜 아이들은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다시 봄이 왔지만, 주연은 이제 북천을 혼자 걸었다. 하얀 벚꽃과 노란 개나리 대신 회색 보도블록만 보며 걷는 그녀의 귀에, 재잘대는 새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너무나 아름답고 한없이 서러웠다.


이른 새벽이었다. 주연은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얇은 솜이 들어간 단정한 외투를 입은 그녀는 한 손에 오래된 갈색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살짝 열린 가방 속으로 작은 성경책과 주보가 보였다. 그녀 옆에 초록색 마티즈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운전자는 주연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이었다.



“집에 가세요?”

“네.

“새벽 예배를 다니시고, 하여튼 부지런하셔.”



운전자는 조수석 의자 위에 있던 작은 박스를 열어 녹즙을 하나 꺼냈다.



“이거 드세요.”

“아이, 아니에요.”

“샘플 나온 거니까 부담 없이 드세요.”

“고맙습니다.”

“아저씨는 어때요?”

“맨날 똑같아요.”

“그게 나아지는 병은 아니라더니…”

“그렇죠, 뭐.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경주 시청하고 그 앞에 우체국에 배달 갔다 왔어요. 아침엔 거기 한 바퀴 가고, 점심때 시내로 가요. 이따가 여행사에도 들를 테니까 사무실에서 봬요.”

“아, 저 없을 거예요.”

“어디 가세요?”

“친구가 왔어요.”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봬요.”



초록 마티즈는 다시 출발했다. 주연의 가방 속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주연아, 오고 있지?">

"벌써 일어났어?"

<"배고파서 일어났어. 너 어떻게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냐.">

"냉장고에 과일 있어. 과일이랑 요구르트 꺼내 먹어."

<"밥 했어. 냉이된장국이랑 쑥 부침개 했어.">

"정말?"

<"빨리 와. 식어.">

"알았어. 혜진아,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치고 주연은 다시 서둘러 걸었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가벼운 걸음이었다. 그녀는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노란 개나리가 살랑바람에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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