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브랜든의 집은 시드니 항구의 북쪽 끝에 있는 주택가에 있었다. 일 년 내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시드니였지만, 이곳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는 한적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거의 모든 집에서 푸른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름다운 동네에는 주민들이 사용하기 좋은 아담한 해변과 고급 세일링 클럽, 잘 꾸며진 산책로가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앤디는 강이 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원에 있는 플라스틱 눈사람과 산타 모형이 불어오는 바람에 간간이 흔들렸다. 낮의 태양 아래 흠뻑 충전하고 나면, 밤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장식이었다. 앤디가 휴대폰에 있는 사진첩을 열었다. 그가 모린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타도 만났어.”]
사진 속엔 강렬한 햇볕 아래 우뚝 솟은,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그 앞에 앤디와 소피, 클라이브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모두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팔다리는 벌겋게 탄 모습이었다. 다음 사진엔 산타 옆에 나란히 앉은 소피와 클라이브가 있었다. 앤디가 사진을 넘기며 주변 풍경을 보여주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산타의 집 안에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빨간 털옷을 입고 풍성한 흰 수염을 단 산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실내에는 에어컨이 있었어. 산타에게 다행이었지.”]
<[“소피가 순순히 산타와 사진을 찍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모린은 소피가 미덥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 제일 투정을 부렸던 것은 클라이브였다. 클라이브는 애쉬튼의 아들로 올해 나이가 10살이었다. 애쉬튼과 클라이브는 영국에 살고 있었는데, 이번 휴가를 함께 보내기 위해 호주에 왔다. 앤디는 영국에서 클라이브를 가끔 만났지만, 소피가 클라이브와 만난 것은 거의 3년 만이었다. 클라이브는 왠지 뾰로통하고 계속 지쳐 보였는데, 소피는 그런 클라이브를 잘 달래서 데리고 다녔다. 애쉬튼이 등장했다.
[“모린, 소피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나 혼자였으면 중간에 그냥 집에 와버렸을 거야.”]
<[“안녕, 애쉬튼!”]>
[“못 만나서 아쉬워.”]
<[“나도 그래.”]>
모린도 호주에 올 계획이었지만, 오기 직전 몸이 좋지 않아 결국 여행을 포기했다. 그래서 호주에 있는 막내 브랜든의 집에는 앤디와 소피 둘이 오게 되었다. 지금 앤디는 지난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화상통화로 싱가포르에 있는 모린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애쉬튼, 밀라는 안 왔어?”]>
[“일이 바빠서.”]
<[“그랬구나.”]>
밀라는 클라이브의 엄마였다. 애쉬튼과 밀라는 연인 사이로, 만남부터 지금까지 거의 12년을 함께 했다. 그들은 함께 클라이브도 낳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다니엘라는 임신 중이라 브랜든과 집에 있었고, 지난 며칠 동안 나랑 아버지랑 소피, 클라이브, 이렇게 넷이 다녔지. 재밌었어. 가든에서 산책도 하고 해변에도 가고. 날씨가 너무 좋아. 영국과 비교할 수 없어. 그런데 가는 곳마다 너무 복잡했어. 지금 크리스마스에 연말, 새해라 사람이 너무 많아.”]
<[“휴, 안 가길 잘했나 봐.”]>
[“와도 좋았지만, 지금은 누나도 조심해야지. 데이빗은 잘 있어?”]
<[“응. 잘 있어. 바빠.”]>
통화 중인 모린뒤로 데이빗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오, 안녕!”]
애쉬튼이 그에게 인사했다. 데이빗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가리키며 말없이 미소로 답하고 곧 화면에서 사라졌다. 데이빗은 모린의 남편으로, 둘은 소피가 8살쯤 되었을 때 재혼했다. 데이빗은 건축설계사였다. 그는 전 세계에 지사를 둔, 큰 건축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앤디가 말했다.
[“데이빗이 많이 바쁜가 보구나.”]
<[“네. 늘 그래요.”]>
[“아시아 나라에 가서 아시아인처럼 일하는 모양이야?”]
<[“뭐라고, 애쉬튼?”]>
[“아, 농담이야. 데이빗은 영국에서도 그렇게 바빴으니까.”]
애쉬튼이 큭큭 웃었다.
[“하버 브리지 불꽃놀이가 오늘 밤이야.”]
앤디가 말했다.
<[“나가실 거예요?”]>
모린이 물었다.
[“오, 절대 안 가지. 사람이 너무나 많아. 폭죽 가루가 사방에 떨어지고 화약 냄새가 진동해.”]
<[“안녕, 브랜든”]>
앤디와 애쉬튼 뒤로 등장한 브랜든이 화면 속 모린에게 인사했다.
[“시작하고 20분 정도 지나면 우리 집까지 그 독한 냄새가 올 정도야. 가까이 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 불꽃놀이는 티브이로 보는 게 최고야.”]
<[“너희 집이 하버 브리지와 가까워?”]>
[“그렇게 가깝진 않아.”]
<[“새로 이사했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와. 언제든.”]
<[“그래. 나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 다니엘라에게 안부 전해줘.”]>
[“응.”]
<[“안녕.”]>
모린이 전화를 끊었다. 애쉬튼, 앤디, 브랜든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셋은 웬일인지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푸른 강이 천천히 흘러갔다. 티브이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시끌벅적한 쇼가 나오고 있었다. 셋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앤디가 물었다.
[“다니엘라는?”]
[“2층에서 쉬고 있어요.”]
브랜든이 대답했다. 다니엘라는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잘 쉬어야 했다. 아기들은 여름에 태어날 예정이었다.
[“다음 달에 다니엘라의 어머니가 오실 거예요. 아기를 낳고 돌보는 데 함께 계셔주기로 했어요.”]
[“다행이구나.”]
[“우리가 와서 다니엘라를 힘들게 한 것 아니야?”]
[“아니야. 다니엘라가 누가 왔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동안 외로웠거든. 호주로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친구도 별로 없는데 임신해서 힘들어했었어.”]
[“그럼, 다행이네.”]
[“애쉬튼, 왜 밀라는 오지 않았어? 다니엘라가 기다렸는데.”]
[“……”]
앤디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얘들아, 잠깐 조용히 해보렴…… 너무 조용한데? 애들은 어디 갔지?”]
시드니를 가로지르는 푸른 강이 햇볕 아래 반짝반짝 빛났다. 하얀 보트 여러 척이 하버 브리지 방향으로 흰 물결을 만들며 달려가고 있었다. 강을 따라 동네를 감싼 산책로는 울창한 나무가 만들어준 시원한 그늘 덕에 전혀 덥지 않았다. 소피와 클라이브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소피는 앞서 걷는 클라이브를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녀는 클라이브가 손잡이를 툭툭 만지는 것이 신경 쓰였다. 나무 손잡이는 거칠어서 손에 상처가 날 수도 있었다.
[“안녕.”]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할머니가 두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 덕에 클라이브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소피는 안심했다.
[“안녕하세요.”]
아무 말 없는 클라이브 대신 소피가 인사했다.
[“해피 뉴 이얼.”]
[“해피 뉴 이얼.”]
할머니는 가볍게 인사하고 소피와 클라이브를 지나갔다. 소피가 그녀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클라이브, 이제 돌아가자. 너무 멀리 왔어.”]
[“……”]
[“클라이브?”]
[“소피, 저기 의자가 있어. 저기 가서 앉을래.”]
[“좋아.”]
둘은 산책로에서 내려가 강가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강 너머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소피는 며칠 전 페리를 타며 보았던 루나 파크가 생각났다. 루나 파크는 하버 브리지 근처에 있는 놀이동산이었다.
[“클라이브, 우리 루나 파크에도 가 볼까?”]
[“아니. 응…응, 어쩌면.”]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클라이브를 보고 소피가 피식 웃었다.
[“신난다. 나도 가고 싶었거든. 클라이브, 놀이동산 좋아해?”]
[“……”]
[“싱가포르에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어. 나중에 와.”]
클라이브는 말이 없었다. 소피는 클라이브가 여행 다니는 걸 싫어한다고 애쉬튼 삼촌이 말한 것이 생각났다.
[“누나가 여행 다녀온 사진 보여줄까?”]
소피가 휴대폰을 꺼내 클라이브에게 사진을 보여 주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가수야. 알아?”]
[“몰라.”]
[“여기서 사진도 찍고, 간식도 먹고.”]
클라이브가 사진을 보았다.
[“조쉬 아저씨네?”]
[“응. 맞아.”]
[“아저씨랑 같이 갔어?”]
[“가서 만났어. 할아버지랑, 엄마랑.”]
[“……”]
소피가 사진을 차례로 넘겼다. 소피가 엄마와 한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이 나왔다.
[“어때? 예쁘지?”]
[“이게 뭐야?”]
[“한복이라고 한국 전통 옷이야. 나랑 엄마야. 예쁘지 않아?”]
[“이상해.”]
[“으이구…”]
소피가 웃었다. 사진을 보던 클라이브가 물었다.
[“누나 아빠는 어디 있어?”]
[“집에.”]
클라이브가 소피를 쳐다보았다.
[“누나 아빠도 여자 친구가 있어?”]
[“응?”]
소피가 클라이브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소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그게, 글쎄, 여자 친구는 없을걸? 없어.”]
클라이브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소피는 모호하게 둘러댔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있는 소피의 친아빠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의 부인과 함께였다. 싱가포르에 있는 소피의 새아빠는 소피의 엄마 모린이 있으니, 그 역시 여자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피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메시지를 읽었다.
[“클라이브, 할아버지가 이제 집으로 오래.”]
[“우리 엄마는 남자 친구가 있어.”]
[“응?”]
일어나려던 소피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래서 안 왔어. 나는 같이 오고 싶었는데.”]
[“……”]
소피가 클라이브를 보았다. 클라이브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며칠 동안 보았던 그의 찡그린 눈매와 불만 가득한 입술이 생각났다.
[“다음에…같이 오면 되지. 그리고 클라이브, 나중에 싱가포르에 오고 싶으면 같이 와도 되고, 혼자 와도 돼. 클라이브는 언제든 환영이야.”]
[“…정말?”]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가족이잖아.”]
소피가 말하자 클라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피는 말하며 슬퍼졌다. 잠시 후 클라이브가 말했다.
[“소피, 그거 알아? 나는 커서 정치인이 될 거야.”]
[“어?......우, 우와…멋지다, 클라이브.”]
[“나는 정치인이 되어서 법을 만들 거야. 아이가 있는 부모는 무조건 결혼해야 하고, 평생 함께 살게 할 거야. 아이랑 같이 살고, 절대 헤어질 수 없게. 싫어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게, 꼭 행복하게 살도록 법을 만들 거야. 안 그러면 감옥에 가둘 거야.”]
[“뭐?”]
소피가 피식 웃었다. 클라이브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피가 물었다.
[“그러면, 결혼했는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어떻게 해?”]
[“그게 뭐? 결혼했으면 행복하면 되지 왜 안 행복해?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아이를 낳았으면 열심히 행복하게 같이 살면서 같이 키워야지!”]
소피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 혼자 울고 속상해하고 모른 척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클라이브가 그 한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하니, 소피의 마음이 쥐어 짠 듯 아팠다. 소피도 강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클라이브는 눈가를 주먹으로 닦아냈다.
[“클라이브, 네 말이 맞아. 행복하게 함께 살지 않는 부모는…다 감옥에 가야 돼.”]
소피가 클라이브의 손을 토닥였다.
[“클라이브는 훌륭한 정치인이 될 거야. 나는 널 뽑을게.”]
클라이브가 소피를 보았다.
[“소피, 고마워.”]
[“천만에.”]
소피가 클라이브의 손을 꼭 잡았다.
바람이 매섭게 차가웠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목도리와 모자까지 쓰고 혜진이 길을 나섰다. 언제부턴가 습관이 된 마스크도 잊지 않았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만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일 년이 지나가다니 새삼 놀라웠다. 혜진이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갈 동안 함께 내려가고 올라오는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승우가 군대에 간 지금, 혜진의 시간은 다시 지독히도 느려지고 있었다. 몸을 바쁘게 움직여도 잠시 멈추는 순간엔 애가 탔다. 제발 뉴스에 대단한 소식 없이, 오늘도 온 나라가 심심하게 지나가기를 혜진은 늘 기도했다. 그녀가 지하 꽃가게에 들렀다. 분홍색, 빨간색 장미를 한 송이씩 간단히 포장했다. 겨울꽃은 비쌌지만, 향기가 깊었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가서 그녀가 한 역에 내렸다. 역에서 나와 좀 걸어 도착한 곳은 그녀가 매주 오는 문화센터였다. 평소와 달리 센터 앞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입구엔 풍선으로 장식한 배너가 달려 있었다.
<문화센터 발표회>
혜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엔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벽을 따라 놓인 기다란 탁자 위에 라탄으로 만든 바구니와 가방, 한지로 만든 보석함이 있었다. 혜진은 긴 어깨끈이 달린 예쁜 라탄 가방에 감탄했다. 자신도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지 보석함은 화장대에 두고 쓰면 좋을 것 같았다. 맞은편 탁자에는 재봉틀로 만든 각종 덮개가 있었다.
‘이런 걸 이렇게 잘 만들다니…’
하얀색 레이스를 덧댄 가벼운 덮개가 혜진은 마음에 들었다. 부엌에 있는 밥솥과 죽 만드는 기계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덮어둔다면 좋을 것 같았다. 거실에 있는 공기청정기와 겨울에 쓰지 않는 선풍기에도 똑같은 덮개를 맞춰 씌우면 예쁠 것이다.
‘하지만 재봉틀 만지는 건 자신이 없어.’
혜진이 탁자를 따라 계속 걸었다. 코바늘 인형과 귀여운 수세미 옆에, 손으로 엮어 만든 한복 노리개가 있었다.
‘이런 것도 만드네…’
혜진은 노리개를 유심히 보았다. 평소 폐백실에서 일하며 혜진은 노리개를 늘 보았지만, 폐백실 물건들은 시장에서 사 온 것이었다. 이 노리개들은 손으로 만든 것으로, 그 생김새가 다 달랐다. 매듭의 색과 형태가 다양했고, 장식으로 자개나 옥, 혹은 진주도 달려있었다. 혜진이 한 노리개를 보았다. 노란 나비 장식 아래 동그란 옥 두 개가 초록 매듭에 얽혀 있었다. 옥 장식은 재료 가게에서 사 온 것이 아니었다. 손이 탄 생김새가 누군가가 끼던 반지 같았다.
‘이렇게 자기가 쓰던 걸로 만들기도 하는구나…’
혜진은 주변을 보았다. 이 노리개 앞엔 꽃이 없었다. 혜진은 들고 있던 꽃 한 송이를 노리개 앞에 놓았다. 로비 한편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하얀 상의에 하의로는 청바지를 맞춰 입고 손에 악기를 든 노인들이 줄 서서 복도를 지나갔다. 연주회 예행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혜진은 그림 전시장으로 갔다. 전시장에는 안내원이 있었다. 숱이 많은 흰머리를 하나로 곱게 땋아 내리고 금테 안경을 쓴 여인이 혜진을 반겼다.
“혜진 씨 왔구나?”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혜진보다 열다섯 살은 많은 어르신이었다.
“저도 일찍 와서 도울걸, 죄송해요.”
“아니야, 젊은 사람은 바쁘니까 나 같은 사람이 하면 되지.”
젊은 사람이란 말에 혜진이 쑥스럽게 웃었다.
“이번엔 뭐로 내셨어요?”
“나는 개나리. 저기 있어.”
“어후, 너무 예쁘다.”
그것은 색연필로 그린 식물 세밀화였다. 얇은 선 하나하나마다 채도가 다른 노란 결이 보였다.
“수채화랑 또 다른 매력이 있지?”
“네, 너무 섬세하고 예뻐요.”
“다음엔, 이 수업도 들어봐.”
“여기도 교재가 있어요?”
“있는데, 이건 내가 사진 찍어온 거로 그린 거야. 봄에 꽃구경하러 갔었거든. 사진을 인쇄해서 갖고 오면 선생님이 몇 번 색연필로 어떻게 칠할지 알려줘. 따라 하다 보면 완성이 돼. 할 만해.”
“아, 그렇구나.”
혜진이 들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좋은 작품 감상했으니 감사 인사를 할게요.”
“어머, 아니야.”
“그래도요.”
“아니야. 호호호, 괜찮아. 다른데 줘. 난 이따가 딸이랑 손녀가 오기로 했거든.”
“아, 그래요?”
“잠깐 들른다고 하길래, 내가 그러라고 했지. 바쁘면 오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그래도 온다고 해서…호호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웃자, 혜진도 같이 웃었다.
“손녀가 학생인가요?”
“응. 고등학생이야.”
“한창 바쁠 때네요.”
“응, 바빠. 애들 어릴 때는 내가 봐주고 그랬는데, 이젠 다 커서 도와줄 것도 없고, 이젠 걔들이 뭐 하는지도 잘 몰라. 그 애들도 늙은이가 맨날 어디 가서 뭐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걸? 그래도 여기 온다고 하네. 할머니가 열심히 그림 배우러 다니고 전시도 한다고, 와서 축하해 준대.”
“가족분들이 와서 그림 보시면 깜짝 놀라시겠어요. 너무 예쁘게 잘 그리셔서요.”
“하하, 그런가? 내가 젊을 땐 손재주가 있다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그런데, 다 지난 이야기지. 이 늙은 손으로 이렇게 예쁜 꽃 그림을 그릴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어르신이 쭈글쭈글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옛날엔 이 손으로 더 예쁜 것들도 많이 만들었지.”
그녀의 마음속에 소중한 자식들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예쁜 걸 많이 만들었는데, 그걸 누가 알아줘…”
“할머니!”
경쾌한 목소리가 어르신을 불렀다. 입구에서 한 가족이 어르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가 달려와 할머니에게 안겼다.
“어이구, 우리 손녀 왔구나!”
“저 가볼게요.”
“응.”
혜진은 서둘러 인사하고 자리를 비켰다. 그녀는 가족들에 둘러싸인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손녀가 어여쁜 꽃다발을 어르신에게 건넸다. 가족들이 개나리 그림을 보았다. 손녀는 큰 소리로 감탄하며 휴대폰으로 그림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와 셀카를 찍으며 손녀는 할머니의 볼에 뽀뽀했다. 노란 개나리 앞에서 그들은 가족사진도 찍었다. 활짝 웃는 어르신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작품은 그림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고귀하고 예쁜 것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새해를 맞는 불꽃놀이가 끝났다.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한 후, 앤디는 맥주 한 병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텅 빈 검은 하늘을 닮은 검은 강이 유유히 흘렀다. 앤디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브랜든이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폭죽 냄새가 나죠?”]
[“그런 것 같구나.”]
[“이렇게 가족이 함께 새해를 맞이해서 기뻐요. 올해는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아요.”]
[“그럼. 너는 아빠가 될 건데.”]
[“네. 하하하.”]
브랜든이 쑥스럽게 웃었다.
[“아빠, 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다니엘라도 감사하고 있어요. 이렇게…집을 옮길 수 있게 도와주시고 사업도 도와주셔서요. 일이 잘 풀리면 다 갚을게요.”]
[“그래. 걱정 말거라.”]
앤디가 브랜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마당에 있던 산타 장식이 은은히 빛났다. 검은 강도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허니?”]
2층에서 다니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 보렴.”]
[“네. 가볼게요.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앤디를 한번 꼭 안고 브랜든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앤디는 혼자 맥주를 마셨다. 그는 여전히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었다. 브랜든뿐만이 아니라 애쉬튼도 그랬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앤디 코넬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모린 정도가 독립을 한 편이었다. 새해가 오지만 그런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검은 하늘 저 멀리 자그만 달이 보였다. 앤디가 속삭였다.
[“해피 뉴 이얼.”]
그가 맥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