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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훈 Jul 24. 2019

회사를 관두면 어디로 가야할까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리뷰


잠깐만 회사좀 관두고 올게

ちょっと今から仕事やめてくる, To Each His Own, 2017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영화가 사람을 이끄는 건 다양하다. 노래가 이끌기도 하고, 배우가 이끌어가기도 하며,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개나 스토리의 촘촘함과 같은 것들이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흔히들 꼽을만한 매력 포인트가 많지는 않은 영화다.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영화 티켓을 끊을 만한 배우도 아니고(아마),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울리는 노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엄청난 영상미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스토리는 때로 뜬금없고 때로 진부하다. 보다보면 살짝 지루할 정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고, 또 이 영화에 있어서 무언가 기억을 남기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대사다. 사실 대사도 애매할 수 있다. 우리로선 이미 열풍이 지나간 '힐링'의 메시지에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일본영화 특유의 '교훈+감동'과 약간은 뜬금없는 결말까지 갖추고 있기에 보는 와중에 '뭐야 이건'이라 할 법도 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도 이 영화는 꽤나 인상깊은 대사가 있다. 그리고 그건, '회사에서의 나'라는 주제에 대해 이미 깊이 공감할만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대사를 남다르게 받아들일 법도 하다. 그러니까, 문득 생각해봤을 때, 이 내용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 지방, 혹은 호주에 틀었다면, 그 대사는 오히려 코웃음칠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각 국가에 대한 편견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애초에 스토리나 환경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미국 하이틴 영화나 프랑스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비슷하려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한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만약 희망이 없어지면요?


희망은 없어지지 않아
그저 보이지 않게 될 뿐이지



아오야마는 영업사원이다. 아침이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고, 회사의 규칙에 대해 복창하는 회사다. 그 회사의 규칙이란 건, "넷째, 유급휴가는 필요없다!"와 같은 것들이다. 10개나 된다. 실적에 따라 평가받고, 부장이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회사에서 아오야마는 언제나 '갈굼'의 대상이 될 뿐이다. 



모든 것에 지쳐 지하철 선로로 '빨려들어가는' 그의 앞에 '동창'이라고 주장하는 야마모토가 등장하고, 아오야마의 삶은 조금씩 바뀐다. 조금 다른 색깔의 넥타이를 매고, 하늘을 보고, 웃는 법을 다시 익힌다. 그만큼 실적도 따라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고, 예상못한 난관이 닥치면서, 그는 다시 옥상에 선다. 그리고 야마모토가 등장한다.



회사를 관두는게 네가 죽는 것보다 어려워?



회사를 다니며 가장 힘들어지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나올 수 있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자살을 택하곤 하는 걸까? 회사가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어떤 개인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무너진 인간은 쉽게 길을 찾지 못한다. '나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어'와 '이곳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해'라는 마음의 반복,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절망. 그 과정이 반복되면 남는 건 자신에 대한 혐오, 삶에 대해 무감각해진 자신이다.



"요새 젊은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이런 것도 못 버틴다면 무얼 할 수 있겠나"
"결국엔 도망치는 거고, 도망치는 패배자에게 남은 길은 없다"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대사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군대를 갈 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수많은 사람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 누군가는 2년이면 해방되는 군대에서 삶을 비관하는 이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며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배운 건,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턱없이' 미약했던 것도 아니라는 거였다. 


내가 만약 그런 환경에 놓였다면, 나는 달랐을까? 그 사람이 만약 나와 같은 환경에 놓였어도 그랬을까? 정말로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나약해서 도망치는 것'으로 치부하며 넘길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이어갈 이들이 바스러져 갔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내가 군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던 이유가내가 대단하거나 정신력이 강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영화는 많은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아오야마 다카시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그러니까 누구는 영화를 보며 '다카시가 일을 못하는 건 사실이잖아?'라고 할 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는 베일에 쌓인 사람이다. 왜 바누아투가 등장하는 것인지, 왜 바누아투에서의 삶이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누아투는 '결과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오야마는 결국 다른 회사로 가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본색을 드러내고(?) '교훈기계'로 전락한다. 아오야마가 답을 찾는 주요한 힌트 중 하나는 결국 가족이며, 엉성한 스토리와 약간은 서투른 '떡밥'을 회수하기 위해 설명에 지나치게 치중한다. 그 설명에서도 바누아투의 비중은 너무 과하다. 정말이지 '찝찝한' 결말인데, 그 모든 걸 대충 덮고 치장하는 건 교훈들이다. 


조금은 다른 결말을 기대했지만, 그러니까 <행복을 찾아서>의 윌 스미스가 말하는 행복이 결국엔 취업이라는 '시시하고 뻔한' 거라 할지라도 뭐...라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처럼, 아오야마는 도쿄에 남는 결말이 있을 수 있었을텐데, 아오야마는 결국 바누아투로 간다. 아오야마가 무엇을 꿈꾸는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니 그의 선택에는 물음이 따를 수밖에. 바누아투가 제 3세계에 대한 흔한 고정관념과 시혜적 관점으로만 소비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 역시, 바누아투에 너무 많은 이미지를 덧씌우고 소비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희망"이 바누아투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닐진대, 그러니까 "인생은 살아있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풀리는 법"인데 그들이 바누아투로 가버린다면 결국 도쿄에 남은 이가라시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이가라시도 되지 못한 수많은 '미생'들과 '퇴사준비생'의 희망은 어떻게 해야 보일 수 있다는 걸까. 영화에서 현실적인 설정과 대안을 바라는 것이 쓰잘데기 없는 일이란 걸 <라라랜드>에서 지독하게 배웠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라라랜드>가 압도적인 영상미와 노래를 갖췄지만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스토리는 빈약하다. 그러니까 '헬조선'에 거주하는 이들은 꼰대부터 힐링까지 풀코스로 겪었기 때문에 적당히 떠들고 적당히 감추다가 교훈으로 마무리짓는 플로우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그렇기에 "그래, 희망은 말이야... 보고 있니 준?"이라는 대사를 보고는 흐뭇하게 웃기보다는 오글거림을 참느라 고역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건질 만한게 있다면, 역시 대사겠다. 처음에 답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으니까. 




여기는 천국인가요?


여기는 희망이라고 하는 천국의 입구야


 

물론, 희망을 이야기하는 대사보다 더 가슴을 울렸던 대사들은 오히려 단단하게 매여진 현실의 언어들이었다.



"회사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인정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가능하다면 부장님도 잠시 쉬세요"
"역시 제 동경의 대상이에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회사를 관두는 게 죽는 것보다 어려워?"
"여기서 기다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어쨌거나, 문장 형태의 제목이 사람을 이끌리게 한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 영화 제목이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가 아니고 흔한 "회사원 A", "회사에서 살아남기", "퇴사를 위하여"와 같은 것이었다면 참으로 볼품없는 일이자, 그거야 말로 코미디였을테니까. 


회사를 관두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바누아투는 아니길 바란다. 바누아투에 수학을 가르치러 갈 사람도 필요하지만, 도쿄에 남아, 서울에 남아, 런던에 남아, 제 자리에 남아 삶을 이어갈 이들이 우리는 조금 더 많이 필요하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고 말하는 단단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조금 더 필요하다. "우리가 미약해서 도망친 게 아니다"라는 증명이 우리에게는 조금 더 필요하다. 그게 아쉽지만, 그걸 메우는 영화가 어딘가에, 언젠가 또 나올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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